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4
솔직히 저 오만불손한 기사 놈들이야 별로 마음에 드는 것들도 아니었으니 저기서 죽어 나간다고 딱히 양심의 가책 느낄 것은 없겠지만…… 게다가 토드도 다시 만나고 보니 영 구해 주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그 신관 꼬맹이랑 죄 없는 노예 애들이 죽어 버리면 꿈자리가 좀 사납겠지?’
안 되겠다.
레펜하르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단련된 육체가 놀라운 도약력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툴툴거리며 그는 통로의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아, 제대로 꼬였네.”
☆ ☆ ☆
한 줄기 섬광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다.
“으아악!”
비명이 좁은 석실 복도를 메아리쳤다. 붉은 선혈이 석벽 위로 가득 튀며 찐득하게 흘러내린다. 섬광의 정체는 날카로운 붉은 낫이었다. 피를 뿌린 기사가 어깨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토마스 경!”
다른 기사들이 동료의 부상에 격정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감히 방패를 들고 용맹하게 동료를 감싸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눈앞의 적은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기사들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악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계의 마물이 통로 저편에서 다가온다.
“크크크크…….”
2미터에 달하는 거구에 뒤틀린 근육으로 뒤덮인 붉은 몸체, 흉악한 입가에 누런 불길이 맴돌고 공허한 눈동자는 심연을 담아 끝없이 검을 뿐이다. 인간의 스무 배의 힘과 권능을 지녔다 알려진 이계의 악마, 베이터였다. 그 악마가 지금 돋아난 네 개의 팔에 각자 칼이며 낫, 도끼 등을 들고 그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기사 중 하나가 절규했다.
“아! 인간이 어찌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이냐!”
‘우와, 아주 저 말투가 뼛속까지 박혔구나.’
절규마저 고풍스러운 알티온 기사를 보며 실란은 혀를 내둘렀다.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저런 말투가 자연스레 나오다니 어떤 면에선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크, 지금 이런 잡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실란은 고개를 저으며 쓰러진 토마스 경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치유의 빛이 깃들기를 원하나이다.”
과연 사랑의 여신답게 분홍빛(!) 성광이 솟구쳐 상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뼈와 근육이 급속도로 아문다. 이 정도로 빠른 치유력을 보이는 이는 필라넨스 교단에서도 드물었다. 나이와 맞지 않게 그는 굉장히 높은 위계를 지닌 신관이었던 것이다.
고통이 잦아든 토마스 경이 감사를 표한다.
“고맙습니다, 신관님.”
‘고마울 것까지야. 댁이 죽으면 다음엔 내 차례잖아?’
속마음과 달리 실란은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그의 태도가 교단의 평판과 연결이 되니 어떤 경우에도 성직자다운 모습을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예쁘장하고 착해 보이는 성직자 소년은 사실 꽤나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으아아!”
다시 일어선 토마스 경이 검과 방패를 들고 일어나 괴성을 지른다. 애써 고함을 질러 없는 용기를 끌어내려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하고도 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다. 실란은 남들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젠장, 초반엔 쉬워 보였는데…….’
처음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과연 던전답게 온갖 마물과 기형화된 짐승들, 사령들이 나왔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마물들이라 봐야 카비치나 그렐린 정도의 하위 악마였고 기형화된 짐승들도 거대한 쥐나 벌레 정도였으며 스켈레톤 몇 구가 삐걱거리며 덤벼드는 수준이었다. 내심, 고작 이 정도 유적에서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클로드 경이 왜 죽었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변이 생긴 것은 통로를 세 개 정도 지나 둥근 석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켈 하인 스페르타차카나!
요상한 목소리와 함께 석실 좌우 문이 닫히며 갑자기 바닥이 무너진 것이다. 정확히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벌컥 열린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그게 그거였다.
비명과 함께 스테반 일행은 일제히 10여 미터나 아래로 자유 낙하했다. 중간에 토드가 빠르게 마법을 외워 바닥에 부드러운 공기층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가벼운 엘프와 기사들은 모를까 실란과 오크 노예들은 그대로 추락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위층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들이 속속 등장했고 스테반 일행은 필사적으로 반대편 통로로 도주하고 또 도주했다. 그러기를 10분여, 결국 그들은 통로 좌우로 다가오는 악마들에 의해 포위당해 버렸다.
“크르르르…….”
“크으으…….”
좌우에서 악마의 숨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온다.
“헬트로!”
갑자기 베이터 하나가 괴성을 지르자 그의 주위에서 수십의 구울들이 바닥을 부수고 솟아 나왔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구울들이 일제히 손톱을 세워 달려들었다. 기사들이 절로 비명 섞인 신음을 흘렸다.
“괴, 괴물들!”
“오! 신이시여!”
실란이 이를 악물며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 그릇된 존재에게 빛의 철퇴를 가하소서!”
의외로 실란은 담이 셌다. 아니, 코앞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찔러 오는데도 눈 하나 깜박 않고 기도문을 끝마칠 수 있을 정도면 담이 세다 정도가 아니긴 하다.
콰아앙!
분홍색 빛의 망치가 허공에 생성되어 달려오는 구울 하나를 박살 내 버렸다. 색상이 참 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성 주문답게 위력은 좋았다. 그렇게 한 놈을 처리한 뒤 실란은 잽싸게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으아으아으아으~.”
기사들은 다른 구울들과 맞붙어 허우적대고 있었다. 저들의 실력이라면 이 정도 구울은 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도, 그저 방패로 공격을 막기만 하며 계속 후퇴한다. 아주 제대로 패닉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정신줄 놨어? 나도 아직 멀쩡한데? 이그, 근육이 아깝다.’
다들 덩치는 좋은 주제에 정신은 참 심약하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저들은 소중한 방패, 깨지게 내버려 둘 순 없다. 실란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여신께 기원했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허락하소서!”
기력과 용기를 주는 정신계 신성 주문이 기사들에게 시전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사들은 계속 머뭇거리고 있었다. 워낙 공포가 커 이 정도로는 먹히질 않는 것이다.
실란이 이를 악물며 다시금 기도했다.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푸짐하게 허락하소서!”
뭔가 기도문이 요상해졌지만 어차피 신성 주문은 기도하는 신관의 신앙심으로 그 위력이 판가름 나는 법, 신관의 어휘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제야 기사들이 맹렬히 반격을 해 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좀 과하게 신성력을 퍼부었는지 다들 광전사가 되어 버렸다. 눈이 벌게져서 침을 질질 흘리며 구울을 후려갈기는 모습이 어째 환각제 과잉 중독 수준이랄까? 여신께서 ‘푸짐하게’의 의미를 꽤 과대 해석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상황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용기를 얻은 에드워드 경이 앞장서서 구울들을 쳐부수며 소리를 질렀다.
“용맹한 알티온의 기사들아! 저 사악한 마물에게 우리의 용기를 보여 주어라!”
에드워드 경은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악마에게 돌진해 갔다. 베이터가 포효하며 네 팔을 연신 휘둘러 댄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과연 경험 많은 기사답게 공격을 피하며 또는 방패로 막아 가며 악마를 붙잡고 있었다.
“세피로 디 크로텔, 대지여, 그 손을 뻗어 그대에게서 비롯된 것을 거두라! 아이언 스틸!”
기회가 생긴 토드가 잽싸게 4서클 주문, 아이언 스틸을 외웠다. 금속의 중량을 증가시켜 강제로 무장 해제를 시키는 이 마법이 악마가 든 무기에 적중했다. 베이터들은 다들 강한 마법 저항력을 지녀 마법이 잘 통하지 않으니, 대신 들고 있는 무기를 노린 것이었다.
탕! 타탕!
베이터들이 무기를 놓치며 일순 당황한다. 그 틈을 타 통로 반대편에서 싸우고 있던 렐시아가 악마의 등 뒤로 돌아갔다.
휘릭!
기합 소리조차 없이 그녀의 롱 소드가 베이터의 날갯죽지를 깊게 벴다. 베이터가 분노하며 몸을 돌려 후려갈겼다.
“꺄아악!”
렐시아의 여린 몸이 벽 저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 소중한 주인님이 악마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도움이…… 되었나요, 주인님……?’
“잘했다, 렐시아!”
기회를 잡은 스테반이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검격을 뿌렸다.
“타앗!”
칼날이 단숨에 베이터의 네 팔뚝을 찔러 가더니 이내 궤적을 바꿔 좌우 사선 베기로 바뀌었다. 악마의 가슴팍에 X자 상처가 깊게 파이며 마혈이 솟구쳤다. 상대의 균형을 흩트리고 치명적 일격을 넣는 슈팅 크로스. 스테반에게 ‘단호의 기사’란 칭호를 부여해 준 알티온 가문의 비검이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베이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진다. 인간이 저런 악마를 쓰러뜨리다니! 기사들이 경탄하며 외쳤다.
“오오!”
“역시 스테반 공자님!”
“과연 단호의 기사!”
하지만 착지하는 스테반의 표정을 결코 밝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는,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또 다른 악마가 다가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이 더러운 마물들!”
소리치며 그는 다시 악마에게 돌진했다. 피와 비명이 사방에 퍼져 갔다.
☆ ☆ ☆
악몽은 끝이 없었다. 스테반의 분투에 용기를 얻은 에드워드 경과 다른 기사들이 베이터 하나를 더 처치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나타난 또 다른 악마에 의해 그들의 용기는 바로 꺾여 버렸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타그렐, 베이터보다도 고위급인 거대한 악마였다. 크기만도 2.5미터에 바위조차 부수는 괴력과 칼날이 들어가지 않는 금속질의 육체를 지닌 마물, 그것이 양팔에 이계의 불꽃을 머금은 채 기사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화르르르.
불타는 흉악한 살의가 전신을 옥죄어 온다. 기사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실란이 다시 한 번 신성력으로 그들에게 용맹을 부여했지만, 이번에는 먹히질 않았다. 원래 마약도 자주 하면 약발 떨어지듯 신성 주문도 자주 쓰면 효과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위대한 기사, 클로드 경마저 쓰러진 곳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각오하지 않았더냐? 너희들이 그러고도 용맹한 알티온의 기사란 말이냐!”
노한 주군의 호통 소리에 기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타그렐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용기가 솟아났다기보다는,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크오오오!”
분노한 타그렐이 기사들에게 불꽃을 퍼붓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붉은 피부의 악마가 손발에 불꽃을 머금고 달려온다. 검을 휘둘러도 저 두꺼운 가죽을 찢을 수가 없다. 주먹을 휘두르면 방패를 들어 막아도 방패 채 날아가며 박살 나 버린다.
토드의 마법도 소용없었다. 그는 수준 높은 마법사였지만 타그렐의 마법 저항력이 너무 높았다. 어떤 마법을 써도 저 악마의 항마력장을 뚫을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결국 비명을 지르며 기사 하나가 벽에 처박혀 버렸다. 머리가 통째로 처박히고, 갑옷 사이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오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즉사였다.
이번엔 실란도 공포에 질렸다.
“으아아…….”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다른 기사 하나가 타그렐의 뒤를 노리다가 불길에 휩싸여 타 죽어 버린다. 타그렐이 내려친 주먹에 기사의 머리가 몸속으로 파묻히며 피분수를 쏟는다.
끔찍했다. 진정 지옥의 광경이었다.
“으에으에으에에…….”
토드는 구석에서 다른 오크 노예들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앉아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 벌벌 떠는 것이 그야말로 현실도피 상태였다. 유적 탐사 경험이 많은 그였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마물은 만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법에 긍지를 가진 마법사였기에, 자신의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나니 보통 사람보다도 더 빨리 패닉에 빠져버린다.
“제길, 제길, 제기랄!”
피를 흘리며 스테반은 연거푸 욕설을 내뱉었다. 어느새 세 명의 기사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다. 제일 먼저 달려든 에드워드 경은 주먹질 한 방에 날아가 저만치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이런 큰 피해를 보았는데도, 눈앞의 저 악마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소중한 부하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의 자존심을 미치도록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알티온의 이름을 잇는 자…….”
스테반은 검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얼굴 가득 각오가 떠올랐다.
“단호의 칭호를 얻은 자다!”
스테반의 신형이 놀라운 속도로 타그렐에게 쇄도해 갔다. 전신의 탄력을 모두 실어 단 한 점 찌르기에 집중하는 알티온 가문 최강의 비검, 슈팅 스트라이크가 섬광처럼 타그렐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퍼억!
타그렐은 ‘단호하게’ 날아드는 스테반을 후려갈겨 버렸다. 미스릴을 섞어 만든 값비싼 갑옷이 박살이 나며 스테반이 처량하게도 휭휭 날아갔다. 벽에 퉁 부딪히고 바닥에 퉁 부딪히더니 그대로 침묵.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실란이 속으로 악을 썼다.
‘아니, 저 양반은 왜 대뜸 저런 큰 기술을 쓰는 거야!?’
자고로 무술이란 건 공방 속에서 상대를 견제해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그걸 싹 무시하고 대뜸 몸부터 날리면 어쩌라고? 어딜 어떻게 노리고 오는지 뻔히 다 보이잖아!
“크르르…….”
화염의 숨결을 내뱉으며 타그렐이 고개를 돌린다. 귀찮은 기사들을 다 처리했으니 남은 이들, 토드와 실란 그리고 오크 노예들을 마저 처분하려는 것이다.
“피,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빛으로 사악한 존재를 멸하소서!”
공포에 질린 채 실란이 애써 신성력을 끌어 올린다. 분홍색 성광이 타그렐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하지만, 몸에 휘감은 불꽃이 이내 성광을 집어삼키고 더더욱 타오른다.
“크아아!”
악마의 포효가 귀청을 찢는다. 두 다리가 덜덜 떨린다. 머릿속이 텅 빈다. 실란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등에 벽이 닿았다.
“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