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57
칼티잔 시에서 한참 떨어진 인적이 없는 으슥한 산속의 공터.
추적자가 없음을 확인한 레펜하르트 일행은 잠시 마차를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타시드가 모닥불을 피우고, 시리스가 커다란 냄비를 불에 올려 보리죽을 끓였다.
“아, 다 됐다.”
시리스가 보리죽을 떠 트롤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지금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둔 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특히 그 시선은 저만치 떨어져 말을 돌보고 있는 러스와 실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을 구해 준 은인이라지만 인간에게 사로잡혀 그토록 당했으니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드세요.”
시리스가 트롤들에게 보리죽을 나눠 주었다. 트롤들이 머뭇거리며 그릇을 받았다. 그래도 엘프인 시리스나 오크인 타시드에게는 경계를 좀 덜 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조심스레 죽을 뜨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츄라프…….”
“웅가르 바토…….”
다른 트롤들도 저마다 그들의 언어로 뭐라고 말을 건넨다. 시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억양과 표정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공용어를 모르는 모양이네?’
원래 다른 이종족들과 달리 트롤들은 인간의 언어를 익힐 기회가 없다. 다른 이종족들은 노예로서 인간 밑에서 사육되며 공용어를 배우지만, 트롤은 말 그대로 피를 뽑기 위한 가축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붙잡혀 있는 기간도 길어 봐야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제대로 말을 배울 기회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이 숨어 사는 처지라도 트롤들은 대부분 공용어를 몰랐다. 엘프나 오크, 드워프들은 아무리 오지에서 자유롭게 산다 해도 노예로 살던 동족들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언어를 접하게 되지만, 트롤은 그렇지 않으니까.
죽을 모두에게 나눠 준 뒤 시리스는 냄비를 들었다. 냄비를 식히던 중 그녀가 문득 공터 저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아틸카와 레펜하르트가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던 것과 다르군? 나는 권왕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소.”
아틸카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마법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크로방스 내전 때라던가 크리스틴과의 결투 등,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본 이가 제법 된다.
하지만 내전 때는 마법의 경지와 마력 수준이 엇갈리다 보니 정상적으로 마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놀란 유벨 진영의 마법사들도, 나중에 레펜하르트가 권왕이란 것을 듣고 나름대로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가 한 짓을 마법이 아니라 무슨 고대의 아티팩트를 썼기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틴과의 전투 때는 다른 면으로 화제가 되었다. 실란과의 가공할 스캔들 때문에 그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안 알려지더라고. 하하.”
레펜하르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 후로도 계속 대놓고 마법을 썼다면 결국 소문이 퍼졌겠지만, 세인들이 마법사와 권사를 얼마나 다르게 인식하는지 깨달은 후부터는 레펜하르트도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오러 유저, 권왕으로만 행세하고 마법은 비밀 병기로 숨겨 두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왕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황금빛 오러로 찬란히 빛났다.
“아직도 내 정체를 못 믿겠는가?”
아틸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오러를 보고도 믿지 않을 수는 없겠지.”
아틸카의 눈동자에서 경계심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자는 분명 권왕이었다. 그리고 이자 곁에는 오러를 다루는 오크와 정령술을 다루는 엘프가 있었다. 또한 저 능숙한 트롤어는 레펜하르트가 그의 종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권왕이란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가 아닌 동등한 지성체로 대한다는 그 소문은 역시 사실이었나?’
적의가 사라진 아틸카의 얼굴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경계를 푸는데? 역시 실적이 최고구먼.’
안타레스 백국이라는 실적이 있으니 굳이 설득에 목을 매지 않아도 자신의 행보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군. 우리의 언어는 어디서 익혔소? 그리고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안 그래도 왜 저 질문 안 하나 했다.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준비한 대답을 던졌다.
“알고 지내던 트롤이 있었다. 다인하프 숲에 사는 바바드 부족의 생존자였지. 들어 본 적 있나?”
물론 전생의 정보를 이용해 끼워 맞춘 말일 뿐이다. 하지만 다인하프 숲에 바바드 부족이 살았던 것, 그리고 그 부족이 인간의 습격을 받아 궤멸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틸카가 듣기엔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방법도 없을 테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좀 찔리지만, 시공 회귀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미친놈 취급 받아 신뢰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과연 아틸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예전에 한번 들른 적이 있소. 어째서 그대가 우릴 이리 잘 아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
확실하게 아틸카의 표정이 호의의 빛으로 바뀌었다.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 나를 믿을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구루 아틸카.”
☆ ☆ ☆
레펜하르트는 천천히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가 바라는 세상.
그가 바라는 미래.
이야기가 길어짐에 따라 아틸카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실로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세상을 떠돌며 동족들을 구해 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수많은 동족들을 구하고, 또 구했다.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트롤들은 몬스터 취급을 받고 있었고, 붙잡히는 족족 잔혹하게 살해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루 아틸카여, 나를 믿고 내 뜻을 도와주겠는가? 안타레스 백국에는 트롤들을 위한 땅 역시 준비되어 있다.”
아틸카는 갈등했다. 저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는 변하지 않는 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될 터였다. 그리고 상대는 신뢰할 수 있는 이로 보였다.
머뭇거리다 아틸카가 입을 열었다.
“대답을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하얀 어금니 사이로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인간이오. 그런데 어째서 동족도 아닌 우리들을 이렇게 염려하는 것이오?”
이해할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스스로 지닌 힘만으로도 평생 안락하게,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왜 굳이 자신들을 위해서, 저런 힘든 길을 걸으려 하는 것인가?
아틸카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왠지 재미있었다. 전생의 아틸카 역시 이와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었다.
향수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테이칸 왕국 남방 군도에 가 본 적이 있나, 아틸카?”
“어, 없소만?”
“그곳의 주민들은 한때 식인의 풍습이 있었다고 하더군. 테이칸 왕국의 한 현자가 그들을 교화하기 전까지, 그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남방 군도의 원시인들은 그 현자에게 따지며 물었다.
식인은 자신들의 오랜 문화이며 전통이라고. 당신이 무엇인데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고 이리 대하느냐고.
“그 현자는 대답했지.”
그대들의 문화, 전통,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친구, 내가 사랑하는 이가 그대들에게 먹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식인을 금했다. 이에 대해 어떤 비난을 해도 좋다. 나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아는 이들, 나의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노예 취급당하는 것이.”
제24장 혁명의 태동胎動
1
그라임 왕국 남부에 위치한 연금술사들의 도시, 알켄부르크.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5층 타워, ‘산타라의 눈물’ 본부에서 한 무리의 연금술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소?”
상석에 앉은 노인이 한심한 듯 물었다. 길드장, 오룬마이드였다. 맞은편의 중년 연금술사가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들은 지금 길드의 남부 지구를 궤멸시킨 범인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칼티잔 시의 소식을 접한 ‘산타라의 눈물’은 처음에는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에게 지부를 습격당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상아어금니를 붙잡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었으니,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진상을 조사하고 나니, 이번 사건은 여태와는 좀 달랐다. 살아남은 카피르 일행 덕에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오룬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상아어금니, 그 저주받을 마물이야 자연재해 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치겠소. 하지만 인간이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길드의 권위를 위해서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중년 연금술사가 서류를 펼치며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의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사하다 보니 범인의 윤곽이 조금씩 잡히긴 했다. 카피르 일행 덕분에 범인에 대한 인상착의도 손에 넣었다. 범인이 거느리고 있던 오크와 엘프 역시 주요 증거 중 하나였다.
억울하게 말려든 카피르 일행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의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차마 성질을 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기 친 디플 본인은 이미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화를 풀고 조사에 협조해 주었다.
모든 정황을 조합하니 한 사람이 결정적인 용의자로 떠올랐다. 요 근래 대륙을 떠도는 소문의 주인공,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자,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권왕 레펜하르트의 황금빛 오러는 그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러나 남부 지부를 습격한 범인은 결코 오러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 마룬드의 증언에 따르면 능숙하게 마법을 구사했다고 합니다.”
분명 인상착의가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범인으로 확정하기엔 정황이 영 맞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연금술사가 발언을 이었다.
“그리고 날짜도 맞지 않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레펜하르트가 화재가 일어났던 그 시기에 백왕성을 비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고작해야 보름이 채 되지 않았다.
대륙 동부에 위치한 안타레스 백국에서 대륙 서쪽 끝인 할라인 왕국은 일반적인 여행자가 도보로 여행하면 두 달이 넘게 걸리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빠른 말로 쉴 새 없이 달려도 족히 한 달은 걸린다. 도저히 보름 만에 왕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룬마이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역을 쓴 것이 아닐까?”
“글쎄요, 대역 좀 세웠다고 못 알아볼 만큼 흔한 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인상이 아니라 근상筋狀(근육의 형상)이겠지만…… 하여튼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대역 좀 세웠다고 착각할 만큼 평범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분명 레펜하르트가 의심스럽기는 한데, 대놓고 항의를 할 만큼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일단 잡아와서 고문하며 실토를 시키겠지만…… 상대는 명성 높은 권왕이자 일국의 지배자입니다. 증거도 없는데 함부로 범인 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난처한 듯 다른 연금술사 하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바깥에는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길드의 권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의자를 범인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연금술사들이 이리저리 조사하며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세인들은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했다고 믿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종족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미 소문이 퍼졌기에 저 이야기 역시 꽤나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오룬마이드가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제길, 골치 아프군. 정황으로 보나 평소 행적으로 보나 분명 그 작자인 것 같은데…….”
☆ ☆ ☆
같은 시각,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레펜하르트는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문득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연금술사 놈들은 속이 타겠군.’
그가 안타레스 백국으로 돌아온 지도 슬슬 두 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연금술사들은 여태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산했던 대로였다.
이러려고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애매하게 드러냈다. 자신이 행한 일이라 소문이 퍼지되, 정작 당사자들은 뭐라 할 수 없도록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