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63
“경비병! 경비벼어엉!”
그것이 버키프 남작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쫓아온 불꽃의 거인이 남작에게 돌진해 폭발한 것이다. 벽이 흔들리며 불길이 치솟아 연회장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귀족들이 빠져나간 연회장 안에는 엘프 하녀들만이 남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감히 노예 주제에 귀족들을 젖히고 먼저 도망칠 수 없다 보니 뒤에 남겨진 것이었다. 이제 입구가 불타고 있으니 달아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다들 한 자리에 모여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저 백금발의 엘프 소녀를 바라보았다.
엘프 소녀가 발코니에서 몸을 날렸다. 새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2층에서 뛰어내려 엘프 하녀들에게로 향했다. 하녀들의 표정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부디 자비를…….”
분명 상대가 같은 엘프란 걸 알면서도 하녀들은 그저 살려 달라 빌고만 있었다. 도저히 무시무시한 힘을 보인 저 백금발의 소녀와 미천한 자신들이 동족이라는 걸 인식할 수가 없었다.
엘프 소녀가 서글픈 미소를 띠우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시리스라고 해요.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왔어요.”
어째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온화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에요.”
예상 밖으로 상냥한 음성에 하녀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엘프 여인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노예가 아니라니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자랐고 노예로 살아온 이들에게 저 소리는, ‘당신은 이제 엘프가 아니에요.’란 소리처럼 들렸다. 뭔 짓을 하건 자신들이 엘프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인 것이다.
“하아…….”
시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들에게 자유의 개념을 가르치려면 하루 이틀로 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경비병들이 달려오기 전, 어서 이들을 이끌고 빠져나가야 했다.
나직한 영창과 함께 시리스가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알 하르드 디판 제이한, 대지여, 내 뜻에 따라 그 몸을 허물라! 테라 브레이크!”
우르릉!
3서클 암석 붕괴 주문이 발동하며 연회장 벽 일부를 무너트렸다. 두꺼운 벽이 뚫리며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생성됐다. 통로를 만든 뒤 시리스가 엘프 하녀들을 독촉했다.
“일단 가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마저 이야기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리스의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시리스는 연회장 밖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별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른손을 들며 시리스가 소리를 질렀다.
“이그나시스!”
펑!
불꽃의 거인이 소환되며 시리스 옆에 섰다. 이그나시스가 팔짱을 낀 채 이글거리는 미소를 띠우며 엘프 하녀들을 내려다보았다.
“히, 히익!”
“히이이익!”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하녀들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시리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호호호, 일단은 좀 시키는 대로 해 주실래요?”
“네!”
“뭐든지 시켜 주세요!”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이들이라 명령조로 나서자 오히려 순순히 움직인다. 시리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 ☆ ☆
버키프 남작 저택 외곽의 낮은 구릉.
시리스가 이끄는 엘프 하녀들이 구릉을 따라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명이 쉰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쫓았다. 버키프 남작가의 병력이었다.
“쫓아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남작님을 살해한 자다!”
다들 살기등등한 얼굴로 엘프들을 쫓고 있었다. 버키프 남작의 원수도 원수지만, 저 엘프 하녀들은 전부 인근 귀족들에게서 대여한 노예들이다. 놓쳤다가는 그 보상금으로 버키프 남작가가 몰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의 밥줄도 끊길 터, 남의 일이 아니다 보니 다들 죽어라 추적에 나서고 있었다.
점점 거리가 좁아진다. 엘프 하녀들은 대부분 체력이 그리 좋지 않기에 아무래도 발이 느렸다. 가까워지는 엘프 여인들의 등을 보며 이들의 우두머리인 시레드 경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뛰어 봐야 벼룩이고 도망쳐 봐야 엘프지!”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길 옆에서 붉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덩치,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써 도저히 신원을 알 수가 없는 사내였다. 사내가 추적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굵은 외침을 터트렸다.
“월 오브 파이어!”
화르르륵!
거대한 불길의 벽이 추적자들과 엘프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다들 당황하며 걸음을 멈추고 붉은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엘프 도둑놈의 동료인가?”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여기서 더는 갈 수 없다.”
그는 시리스의 원호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마법으로 빛의 굴절률을 왜곡시켜 그 큰 덩치를 평범해 보이게 바꾼 것이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전신이 일그러져 어색했겠지만, 품이 큰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으니 꽤나 자연스러웠다.
당황한 시레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마법사다! 마법 쓸 틈을 주지 말고 해치워!”
선두에 선 기사 세 명이 빠르게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했다. 바로 거리를 좁히며 검을 찔러 가는 모습이, 이들이 상당히 경험 많은 전사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세 줄기 칼날이 막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찔러 가는 그 순간.
“합!”
짧은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크게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걷어 내 버렸다. 칼날이 엉뚱한 데로 쓸려 가며 기사들이 일제히 왼쪽으로 자빠졌다.
“어?”
“으익!”
우당탕!
기사 세 명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볼품없이 포개져 나뒹굴었다. 보고 있던 시레드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뭐야? 저 기술은?’
보통 기술이 아니었다. 그냥 공격을 쳐 낸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기사들의 검격을 흘리며 상대의 힘을 이용해 내동댕이친 것이다.
“마, 마권사였나? 하지만 마권사가 어찌 저런 고도의 기술을…….”
평생 무술을 수련해 온 시레드 자신도, 도저히 저런 흉내를 낼 자신이 없었다.
쓰러진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흠, 힘의 흐름은 이제 좀 느껴지네.”
테스론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그도 진지하게 무술을 대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그라운드 레슬링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평소 수행을 할 때도 기술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가벼운 주먹질, 발길질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심사숙고하며 내질렀다.
오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틈날 때마다 러스며 타시드를 상대해 숙련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오러의 흐름을 느끼고, 그것을 제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또다시 테스론에게 그렇게 비참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쓰러진 기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일렉트로닉 스턴!”
파지지직!
전격이 쏘아져 쓰러진 기사들을 강타했다. 그렇게 기사들을 기절시킨 뒤 레펜하르트가 다른 놈들을 노려보았다.
‘저것들도 마저 처리해야지?’
시레드가 고함을 질렀다.
“상대는 마권사다! 전원 돌격해 사방에서 공격하라!”
마법사와 달리 마권사는 광범위 마법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장의 상식, 그래서 크게 퍼져서 공격을 시킨 것이었다. 기사며 병사들이 포위진을 펼치고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달려온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감을 펼쳤다.
‘흡!’
감각권이 반경 30미터를 모조리 뒤덮는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가 생생히 느껴진다. 여기까지는 원래도 할 수 있었던 경지.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간격과 호흡마저 느껴진다.
진정한 무인은 스피드나 파워보다는 오히려 간격과 호흡을 중시하는 법, 진지하게 무술을 대하기 시작한 레펜하르트는 이제야 저 무리武理를 깨닫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빛이여, 내 손에 임하라, 파멸을 부르는 섬광이 되어라.”
기감을 통해 파악한 적들의 간격과 호흡, 위치를 파악한다. 그 ‘정보’를 이용해 마법사다운 연산력으로 저들의 공간 좌표를 측정한다.
‘타겟팅!’
무인으로서의 통찰력으로 저들의 전후 움직임을 예측해 수많은 동선을 그린다. 마법사로서 쉰 개의 동선이 겹쳐지는 교차점을 일일이 뇌리에 각인시킨다.
‘마킹!’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펼쳤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리며 시동어를 외쳤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이널 디시전!”
콰아아아아앙!
사방으로 수십 줄기의 섬광이 뻗어 갔다. 섬광이 달려드는 모든 기사와 병사들의 전신에 꽂히며 일제히 폭발했다. 들판 가득 폭발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흐드러지게 불꽃을 수놓았다.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섬광에 적중당해 비명을 지르며 날려 갔다.
“으아아아악!”
날려 가며 시레드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기가 차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마법이…….”
한 방에 적들을 싹 침몰시킨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떨어진 버키프 남작의 저택이 보였다. 연회장에 붙은 불이 번졌는지 밤하늘 위로 화광이 비치고 있었다.
가주를 잃고 빌린 엘프 노예들까지 도둑맞았으니 더 이상 버키프 남작가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막대한 빚을 진 채 작위를 잃고 비참하게 몰락할 일만 남았겠지. 엘프 노예를 쓰는 귀족들은 대륙에 얼마든지 있는데 저들만 저런 꼴이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꽤나 억울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모두가 죄를 짓는다 해서, 자신만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렀다 해서 그것이 억울해할 일은 아니지.”
레펜하르트가 발길을 돌렸다. 이미 엘프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시리스가 약속한 대로 집결 장소로 잘 이끌고 있겠지.
시리스 외에도 대륙 곳곳에서 그의 동료들이 이종족들을 구하고 있었다.
드워프, 트롤, 오크, 엘프.
자유가 없는 자들, 자유를 잃은 자들, 자유를 잊은 자들, 자유를 모르는 자들…….
운명 속에서 학대받던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억울해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시리스와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저들의 눈물이 이 세상에 얼마나 스며들어 있었는지를.”
☆ ☆ ☆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거대한 순백의 공간.
강력한 고대의 권능으로 형성된 이 유사 공간 속에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너무도 깨끗하고 반듯하며 한 치의 흠집조차 없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순백의 신전, 그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홀에 지금 열세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인 이들은 전원 새하얀 로브를 입고 가슴에 은빛 성표를 달고 있었다. 인류를 수호하는 은의 현자, 그중에서도 최상위인 은의 수호자들이었다.
중후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수호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소.”
젊어 보이는 금발의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권왕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미꾸라지라 할 순 없지요. 안 그런가요, 수호자 쉬툴란?”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바꿨다.
“뱀장어 한 마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소.”
“…….”
금발의 사내가 황당해하며 수호자 쉬툴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양반이 웃기려고 저러나? 하지만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는 것이, 전혀 그럴 의도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은의 현자가 가진 진정한 힘을 생각해 보면 오러 유저를 뱀장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