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76
게다가 마법사는 그냥 패한 것도 아니었다. 권왕의 손에 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 눈에는 저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녹여 버리는 그 모습은 병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들 무기를 버리고 사방팔방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허허헉!”
“사람 살려어어!”
반면 권왕의 무위를 견식한 갈린-안타레스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역시 전설적인 무인이라며 경외 가득한 시선을 레펜하르트에게 보냈다.
“권왕님의 뒤를 따라라!”
“가자! 갈린의 용사들이여!”
이내 훈다르가드의 성문이 뚫리고 갈린-안타레스 연합군이 성내 곳곳으로 쳐들어갔다. 성내 곳곳에서 양측 기사와 병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벌였다. 물론 쓰러지는 쪽은 대부분 체타스 남작군이었다.
‘진짜 끝났군.’
이제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체타스 남작의 목은 갈린 남작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굳이 더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안심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에게 걸어갔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아스레일이 군례를 올렸다.
“다친 데 없으십니까, 백왕님?”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
시리스가 몸을 일으키며 팔다리를 움직여 보였다. 그 비싼 힐링 포션을 물처럼 바른 덕인지 대다수의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전투는 무리지만 거동에는 지장 없어요.”
안도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질문했다.
“그자는요?”
“도망쳐 버렸어.”
“쳇…….”
시리스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이상한 신발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당하진 않았는데…….”
실력이 아니라 장비 때문에 밀렸으니 억울할 법도 하다. 레펜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좋은 건 건졌어. 선물 줄게.”
순간 아스레일은 기겁했다. 레펜하르트가 꺼내 든 것은 발목부터 뎅강 잘린 한 쌍의 발이었다. 잘린 지 얼마 안 됐는지 부츠 위에 묻은 핏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았다.
아니, 시리스 경이 아무리 시체에 익숙한 전사라지만 그래도 여성인데 선물이랍시고 지금 잘린 발목을 내밀고 있는 건가?
아니다, 이건 진짜 아니다.
“저기, 백왕님…….”
불타는 충성심으로 아스레일은 레펜하르트를 만류하려 했다. 수하된 몸으로 존경하는 주군이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꼴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리스가 반색을 하며 잘린 발목을 받아 들었다.
“앗! 이건 그자가 쓰던 아티팩트!”
그러더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정말 제가 이걸 써도 되나요?”
“그럼! 어차피 내 발엔 맞지도 않아.”
호탕하게 대꾸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시리스가 눈망울을 반짝였다. 정말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레일은 입을 쩍 벌렸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실로 거기서 거기였다.
“…….”
사실 두 사람이 딱히 잔인한 성품이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혹독한 스펠라트 사막에서 자랐고 그 후로도 노예로 살아온 시리스였다. 언제나 물품 부족에 시달리며,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시체가 신었건 거지가 신었건 신발은 신발,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거리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도 강력한 아티팩트, 블링크 부츠에 온통 정신이 집중된 탓에 다른 사소한 일―예를 들면 부츠 안에 잘린 발이 들어 있다든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마법사들은 일단 마법에 관련만 되면 어지간한 건 다 무시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실로 괴상하게 보일 뿐이다. 지나가던 갈린 남작가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헐, 잘린 발목을 선물이랍시고 주고 있어.”
“여자도 그거 받고 좋아하고 있어.”
“뭐야, 저 사람들 무서워…….”
적의 일부를 잘라서 여성에게 선물하다니,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답게 취향 한번 살벌하다며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쓸 만한 무구 건졌다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블링크 부츠를 벗긴 뒤 레펜하르트는 제이드의 잘린 발목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시리스에게 손짓했다.
“자, 신어 봐, 시리스.”
“의외로 제 발에도 딱 맞네요?”
“이 블링크 부츠는 어느 정도 사이즈 조절 기능도 있거든. 나처럼 발 크기가 너무 차이 나면 안 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갈린 남작군은 훈다르가드를 계속 점령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첨탑 창문으로 기사 한 명이 잘린 목을 들고 나타났다.
기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승리의 선언을 외쳤다.
“체타스 남작의 목을 베었다! 우리의 승리다!”
☆ ☆ ☆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두 가문의 전쟁은 안타레스 백국의 힘을 업은 갈린 남작가의 압승으로 끝났다.
체타스 남작은 목이 베여 효수되었고 가문의 남자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영지전이었기에 여성과 아이들은 귀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영지 변경으로 쫓겨났다. 전형적인 몰락 귀족이 된 것이다.
체타스 남작령은 계약했던 대로 둘로 나뉘어 갈린 남작가와 안타레스 백국이 차지했다. 백국 남부과 인접한 동쪽 절반, 글로텐 산맥부터 카탄 들판까지의 지역이 새로운 안타레스 백국령이 되었다.
기존의 안타레스 백국은 워낙 작아서, 이름만 백국이지 실은 어지간한 자작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실제로도 원래는 자작령이었고.
반면 체타스 가문 쪽은 비록 작위는 가장 하위의 남작이지만, 전통 귀족 폰테론 후작가의 방계였기에 영지 크기는 어지간한 백작령을 능가했다. 그렇다 보니 절반만으로도 영토가 세 배 이상 늘어났다.
사실 레펜하르트가 마음만 먹었으면 체타스 남작령 전부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를이 만류했다. 급격한 성장은 주변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갈린 남작에게 절반을 양보하는 대신 이종족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레펜하르트가 바라는 것은 정복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였다. 무리하게 땅 욕심 부리는 것보다는 갈린 남작가라는 든든한 우방을 만들어 놓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교역 도시 자루드를 차지해서 실속은 제대로 챙겼으니까.”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레펜하르트는 화려한 금박의 양피지를 펼쳤다. 유벨 2세가 보낸 칙령이었다.
-체타스 남작은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정당한 결투조차 승복지 않은 채 멋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그 간악한 자를 징치한 안타레스 백작의 공을 치하하니, 자루드와 카탄의 동쪽이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임을 크로방스 국왕의 이름으로 인정하노라.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에게 호감이 지대한 유벨 2세가 바로 영지전의 결과를 인정해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이제 법적으로도 새로운 영토는 문제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이 정도면 기틀은 충분히 마련되었겠지.”
양피지를 접으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외부의 일들이 대충 정리가 되었고…… 당분간은 내실을 다지는 데 전념해야겠군.’
대부분의 행정은 카를에게 전담해 버렸지만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은 꽤 많았다.
새로운 영지 통합에 대한 처리 문제도 있고, 아크라이트 가문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해야 한다. 학대받는 이종족들을 구출해 안타레스 백국에 정착시키는 일도 있다.
“그리고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려면 서클도 좀 더 올려야지.”
사방신의 유물을 감추고 있는 고대 결계를 파훼하기 위해선 최소 8서클 이상의 마법이 필요하다. 한번 마나 드레인을 거하게 시전한 덕에 현재 레펜하르트의 몸은 이미 마력 허용량이 꽉 찬 상태였다. 여기서 마나 드레인을 더 걸어 봤자 또 마력이 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일단은 명상을 통해 그릇 자체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종족들을 구출하는 틈틈이 근처 던전들을 털어 은의 시대 유물들도 제법 모아 두었다. 시간을 들여 차분히 마력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창밖을 내다보며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래저래 바쁘구먼. 나도, 안타레스 백국도…….”
제27장 눈의 여왕
1
만물이 싹트는 봄, 황량하던 페틀랜드에도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낸 새싹들이 푸름을 과시하며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다.
글로텐 산맥으로부터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이 광활한 초원은 농경을 하기엔 지나치게 척박한 곳이어서 국가적 규모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접한 크로방스나 바실리 왕국도 이 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페틀랜드와 두 나라 사이엔 글로텐 산맥과 라키드 산맥이라는 험준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차지해 봐야 크게 득 될 것도 없는 땅인데 관리하는 데 드는 수고는 몇십 배, 데스트란드 정도는 아니지만 몬스터의 출몰 역시 잦은 편이니 욕심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유목 민족들의 영역이었다.
말과 양을 키우며 초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소규모 부족 단위로 페틀랜드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가끔 유목 민족들을 통일시켜 비옥한 땅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야심찬 이들이 나오긴 했지만, 전부 중간에 가로막힌 글로텐, 라키드 산맥에 의해 좌절해야 했다. 저 두 산맥은 페틀랜드의 유목민들을 지켜 주는 방패인 동시에, 그들을 이곳에 가두어 두는 담장이었다.
쳐들어올 놈들도 없고, 쳐들어갈 일도 없으니 당연히 뭉쳐야 할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페틀랜드는 부족 간의 작은 분쟁은 있을지언정 거대한 전쟁은 벌어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페틀랜드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페틀랜드 중부, 엎드린 늑대를 닮았다 해 울프마운틴이라 불리는 거대한 돌산을 뒤로한 채 일만의 군세가 집결해 있었다. 페틀랜드 전역에서 모인 유목 민족들로 이루어진 인간의 군세였다.
병력 선두에 선 장수, 유목 민족의 임시 수장으로 선출된 랑고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말머리를 함께 하고 있는 중년 전사, 랑고트와 함께 페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부족의 족장인 펠리페도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과연 우리가 저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지…….”
랑고트도 펠리페도,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페틀랜드의 전사들이었다. 아니, 원래 페틀랜드의 유목민치고 용맹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 가는 유목 민족들은 농경민족에 비해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하다.
하지만 지금 모인 이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앞에 있는 저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한 자들이었으니까.
지금 페틀랜드의 유목민들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들판 저편에 도열한, 수천의 오크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대의 모습이었다.
☆ ☆ ☆
다이어울프에 탄 채 칼켄은 등 뒤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사천 명 정도의 무장한 오크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푸른 곰 부족을 비롯, 대륙의 오지에서 모여든 오크 부족들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탈카타가 이끄는 검투사 출신의 오크 천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레이 오크 하나가 다이어울프를 몰아 칼켄에게 다가왔다. 회색빛 피부에 건장한 육체를 지닌 중년 오크였다.
중년 오크가 오크 군대를 보며 감격의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로 많은 형제들과 함께 전투에 임하는 건 처음이오, 카루가 칼켄.”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카루가 하다툼.”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을 바라보며 칼켄이 동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많은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니, 언제나 오지에서 숨어 살던 그에겐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과연 레펜하르트 형제는 약속을 지켰소.”
맞은편에서 녹색 피부의 거대한 오크 하나가 거대한 배틀보어battle boar를 타고 다가왔다. 일반 멧돼지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마물을 수족처럼 부리는 그는 그린 오크 계열인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 킨지르였다.
킨지르가 오크 군대를 보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군. 산 너머 인간의 군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
예전에는 감히 이렇게 많은 오크들이 모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크들이 모이려 할 때마다 산맥 너머에서 몇 배나 되는 인간의 대군이 몰려와 그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니까. 아무리 강맹한 오크 전사들이라도 마법사를 앞세운 인간들의 공격에는 힘없이 쓰러져야만 했다.
“음, 레펜하르트 형제가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칼켄이 말을 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외교라는 것이오, 카루가 킨지르.”
킨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요?”
“인간들끼리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방식이오.”
하다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호투의 의식을 하면 되잖소?”
“호투의 의식과는 다른 것 같소. 인간은 칼의 노래를 듣지 못하기에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더군. 오크들도 나중에는 저걸 해야 할 거라던데…… 마누라는 좀 이해하는 모양인데 난 영 뭔 소린지 모르겠더만.”
현재 스탈라는 참전하지 않고 안타레스 백국에 남아 있었다. 킨지르와 하다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필요하다, 이거지.”
“그런데 그거 배우면 훌륭한 전사가 못 된다던데?”
“그럼 우리도 무기아비처럼 외교아비란 걸 따로 키울 필요가 있겠군.”
칼켄이 오크 군세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