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80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나 흙 멧돼지 부족 킨지르.”
“회색 솔개 부족 하다툼이다.”
여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니야.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입니다.”
그리고 협곡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저의 일족들.”
협곡 위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둘 나타났다. 순간 칼켄이며 러스 등, 이 자리의 모든 오러 유저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저기 저렇게 사람들이 많았었어?”
협곡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하나같이 이니야처럼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 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엘프들이었다. 복장 역시 비슷해 털가죽과 흰 천을 섞어 입고 있다.
저렇게 많은 인원이 숨어 있었는데 오러 유저인 자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다니?
러스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깊은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희미하게 그들의 주위로 미묘한 어둠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시리스의 그것과 왠지 비슷한 느낌이다.
‘정령술로 기척을 감춘 것인가?’
시선을 돌린 이니야가 다시 말했다.
“우리 일족은 세계수의 부활자를 만나기 위해 북쪽의 동토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안타레스의 투사들이여, 우리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3
페틀랜드 북부의 이름 없는 동토.
오랜 세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다. 우뚝 솟은 얼음 기둥 사이로 눈 벽돌을 쌓아 만든 수십 채의 가옥들, 동토의 햇살이 반짝여 마치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처럼 보인다.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엘프들, 스티리아 일족의 보금자리였다.
마을 곳곳에서는 보라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엘프들이 저마다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집을 수선하고 채취한 생선과 해초를 말리거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등, 바쁜 모습이었다.
그 풍경 속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매끈한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드리운 굉장한 미남자였다.
남자가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마을 여기저기를 살폈다. 해초를 다듬던 엘프 여인 하나가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그는 대륙 역사상 최연소로 9서클을 마스터한, 대마법사 레펜하르트였다.
서른 살에 9서클에 입문해 세상을 놀라게 한 레펜하르트는 결국 서른다섯에 마법의 극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근 100년 이래 대륙에 9서클의 종사자가 아닌 ‘마스터’가 나타났던 건 몇 년 전 천수를 누리고 죽은 라스틸 공국의 대마법사 드레자뿐이었다. 그조차도 9서클을 마스터한 것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였으니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이 엄청난 위업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레펜하르트의 행보에 주목했다.
이미 20대 후반에 대마법사가 되었을 때부터 그를 초빙하려는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의 경지를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던전 탐사자로 남았었다.
이제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는 9서클 마스터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어느 나라로 향할지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레펜하르트는 9서클 마스터가 되자마자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세상에 무심해져 은거했다는 설, 너무 젊은 나이에 마스터가 되어 그 부작용으로 사망했다는 설, 그를 두려워한 마법 학파에서 몰래 암살했다는 설 등등.
하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는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오지에 사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9서클을 마스터하고도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보다 높은 경지가 있을 거라 믿으며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그는 한 던전에서 각 이종족들의 전통 문화가 담긴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단순한 묘사에 불구했지만, 그 개념만은 레펜하르트가 상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예전 같았으면 학파에 발표하고 명성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명성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귀찮은 중간 과정 생략하고 바로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세인들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 지 3년, 그는 현재 새로운 정령술 이론을 배우기 위해 스티리아 일족의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본 다른 엘프 여인들도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머?”
“레펜하르트 님이다.”
“추우실 텐데 어쩐 일로 밖에 나오셨어요?”
비록 시기는 여름이라지만 여전히 밤만 되면 얼음이 어는 곳이다. 털가죽 옷을 두툼히 껴입어도 모자랄 판이건만, 그는 간단한 붉은 로브만을 걸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 저는 마법의 힘이 있어 이 정도 추위에는 끄떡없답니다.”
9서클의 생존 주문, 서바이벌을 항시 전신에 걸어 놓고 있는 그는 사막이나 설원에서도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예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매서운 눈보라가 직접 불어닥치지 않는 한 저 주문이 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펜하르트가 웃음을 짓자 엘프 여인들의 새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역력히 떠올랐다. 잘 말린 생선을 내밀며 한 엘프 소녀가 수줍은 듯 몸을 꼬았다.
“저기, 이것 좀 들어 보시겠어요?”
그러자 다른 여인들이 소녀에게 눈을 흘겼다. 자신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것도 드세요, 레펜하르트 님!”
“이건 추우실까 봐 제가 만든 팔 토시인데…….”
말린 생선이며 고기, 털가죽 토시 등을 내밀며 여인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두 팔에 이런저런 물품들이 자꾸 쌓인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큰 모욕, 레펜하르트가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아, 토시는 감사히 쓰겠습니다.”
물건을 받아 들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엘프 여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몇몇 여인들은 팔짱을 끼거나 목을 껴안기까지 했다. 다들 상대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호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매끄러운 흑발에 매서우면서도 세련된 눈매,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지만 겉보기엔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의 미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해서, 미모로 먹고산다는 엘프들이 보기에도 굉장한 것이다.
엘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들어 왔던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저 인간 마법사는 같은 엘프 남성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지적이고 우아했다.
“그럼 고맙게 쓰겠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표한 뒤 레펜하르트가 받아 든 물건들을 무한의 주머니로 담았다. 순식간에 그 많은 물건들이 부피도 얼마 안 되는 작은 주머니 안에 모조리 들어갔다.
“그럼 이만…….”
신기해하는 엘프 여인들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레펜하르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여인들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레펜하르트 님…….”
“인간인데도 어쩜 저리 멋질까?”
“게다가 그 강한 마법의 힘은 또 어떻고?”
걸음을 옮기는 레펜하르트 곁으로 한 엘프 여인이 다가왔다. 허리까지 드리운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스티리아 일족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지닌 차분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인기 좋으시네요, 레펜하르트 님?”
고개를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응? 왜? 질투해, 시리스?”
“흥! 질투는 무슨…….”
하지만 표정이 아주 질투가 철철 넘치는 것이, 레펜하르트를 힐긋거리는 다른 여인들을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알잖아? 나한테는 너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가볍게 뺨에 키스.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시리스의 표정이 눈에 띠게 누그러졌다.
“우웅…….”
애써 양 뺨을 부풀리는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타시드는 지금 뭐 한대?”
“오늘도 대련이죠, 뭐. 타시드야 오러 유저만 보면 못 붙어 봐서 안달이잖아요?”
“하긴…… 부지런하네.”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산책 적당히 했으니 다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마법사 레펜하르트.”
상대를 확인한 레펜하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니야?”
스티리아 엘프들의 수장인 이니야가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다. 타시드와의 대련을 끝낸 모양이었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이니야가 손에 든 서류를 들어 보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와 약속한 것을 끝마쳤어요.”
“그럼 그냥 날 불러도 되었을 것을…….”
“볼일이 있는 자가 상대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고수한 채 이니야가 주변의 엘프 여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한창 몽롱한 표정을 짓던 여인들이 화들짝 놀라 다시 생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인기 좋네요?”
그녀는 일족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이 눈앞의 인간 마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인간 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불쑥 나타나 엘프들의 전통을 알고 싶다고 찾아온 그를, 당연히 스티리아 일족은 경계하며 죽이려 했다. 인간에게 자신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었으니 살려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반격하지 않았다. 대신 텅 빈 설원에 강력한 마법을 선보여, 자신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을 적대시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였다. 단하임 일족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10서클의 경지에 든 레펜하르트의 마법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단 한 방의 마법에 반경 100여 미터의 만년설이 모조리 갈아 만든 빙수가 되어 버렸다.
그 굉장한 파괴력 앞에, 이니야도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스티리아 일족을 몰살시킬 만한 힘이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스티리아 일족도 단하임 일족처럼,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이후 레펜하르트는 스티리아 일족의 오랜 숙적, 북해의 마물 에티알피스를 처리해 자신이 스티리아 엘프들의 친구임을 또 한 번 증명했다.
거대한 범고래의 형상을 한 저 강력한 마물은 오러 유저인 이니야조차도 애를 먹던 놈이었다. 저 마물에게 죽어 간 스티리아 엘프들도 부지기수, 그런 마물을 해치워 주니 모든 엘프들이 경계를 푼 것은 물론 일족의 은인으로 여기며 크게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
문제는 어째 호의가 점점 과해지는 것 같다는 것이지만.
“아니, 일부러 유혹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비난하는 것 같아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하며 뺨을 긁었다.
안 그래도 점점 다른 엘프 남자들의 시선이 따가워져 영 찜찜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일족의 은인이라지만 엘프도 아니고 인간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여성들의 인기를 몽땅 쓸어 담고 있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아가씨는 참 냉랭하단 말이지.’
문득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미녀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 엘 에네밀러스.
그녀는 50년 전 수장이 된 이래 줄곧 홑몸을 고수하며 고고하게 일족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엘프 남자도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언제나 싸늘하고 냉혹한 태도만을 보여 일족 사이에서 붙은 별명이 눈의 여왕이란 말도 들었다.
심지어 모든 엘프 여인들이 애정의 눈빛을 보내는 레펜하르트에게조차도 줄곧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태도를 누그러뜨릴 땐 오러 유저인 타시드와 대련할 때뿐이다. 미남자인 레펜하르트보다 오크인 타시드에게 더 호감을 보이다니…… 뭐, 그래 봤자 싸늘하긴 마찬가지라 한겨울이 초겨울 됐다 정도지만.
‘그야말로 타고난 전사란 이야기겠지?’
어차피 시리스가 아닌 다른 여성에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별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해 준 것도 많은데 이토록 냉랭한 시선만 받고 있으니 영 신경이 쓰이긴 했다.
이니야가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의 일족이지만, 참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 봤자 그저 거죽 속에 뼈와 살이 있을 뿐이거늘.”
나름 외모에 자신 있던 레펜하르트에게 참으로 박한 평가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대꾸했다.
“현명한 이여, 그대는 상대의 외모 이상의 것을 보는 혜안慧眼을 지녔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오.”
“흐응…….”
고개를 끄덕이며 이니야가 서류를 건넸다.
“어쨌건, 이것이 그대가 원한 우리들의 비전이에요.”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서류를 펼쳤다. 그가 이니야에게 바랐던 정령술에 대한 비전, 그것을 엘프어로 적은 것이다.
서류를 가볍게 훑어보며 레펜하르트가 연신 고마워했다.
“단하임 일족의 전승은 대체로 불과 바람의 정령 쪽에 편중되어 있어 모자란 부분이 많았지. 정말 고맙소.”
“어디까지나 약속한 보답일 뿐이에요.”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이제 약속대로 세계수를 부활시켜 줄 수 있나요?”
“이 이론대로 마법을 완성하게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