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85
희망이 미래가 되어 어두운 앞길을 밝히네.
트롤 구루가 뽑힌 심장을 임산부들에게 들고 갔다.
임산부들 앞에 서서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니, 심장이 터지며 핏물이 임산부들의 부푼 배를 차례로 적셨다. 피의 축복을 받은 임산부들이 저마다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이것이 트롤들의 ‘탄생의 의식’이었다.
트롤은 너무도 강력한 재생력 때문에 정상적으로 잉태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재생력은 성인이 되고서야 생겨나는 것, 그래서 어미의 재생력을 태아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트롤 주술사가 자신의 심장을 바쳐 태아에 축복을 내리면 그의 주술력이 열 달간 아이를 보호해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다.
고대의 원시적인 트롤들은 마치 사마귀처럼, 잉태한 어미가 아비를 잡아먹으며 그 힘으로 태아를 보호했다. 그러나 주술의 힘을 얻은 후로는 이렇게 아비의 희생 없이도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고대에는 한 배에 일고여덟씩 임신하던 것이 지금은 인간처럼 한둘씩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차이점도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주술사가 죽으면 곤란하지 않나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계속 지켜봐.”
잠시 후, 허공에 솟구친 혈액이 다시 아틸카의 구멍 난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심장이 뽑힌 아틸카의 가슴에서 피와 살이 솟아 나왔다. 솟은 피와 살이 서로 엉키며 심장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뇌까렸다.
“맙소사, 트롤의 재생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진정한 구루만이 가능한 일이지.”
강력한 재생력을 가져 팔다리가 잘려도 재생하는 트롤이라지만 섬세한 내장 기관의 재생은 아무래도 힘들다. 하지만 주술의 힘을 이용하면 손상된 내장 기관까지도 어느 정도 재생이 가능하며, 진정한 구루의 경지에 오른 트롤은 심장이 뽑혀도 이렇듯 살아날 수 있었다.
아틸카 정도 경지라면 설사 목이 베이고 뇌가 파괴되어도 재생이 가능했다. 그 정도 되는 구루의 생명을 앗는 방법은 모든 주술력을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전신을 불살라 재로 만드는 법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술의 극에 달한 구루는 자연으로 회귀해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 위대한 영이 되어 재 속에서 부활할 수 있다지만 그런 경지는 아틸카로서도 아득한 수준이다.
‘그래서 전생의 테스론은 아예 스파이럴 가드로 아틸카를 산산이 갈아 버렸었지.’
아픈 기억이 떠올라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애써 상념을 접으며 그는 계속 의식을 지켜보았다.
이니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까, 깜짝 놀랐어요…….”
“그럴 겁니다. 꼭 인신 공양처럼 보여서, 다른 종족들은 상당히 트롤에 대해 오해를 하기도 하지요.”
이윽고 아틸카가 눈을 떴다.
그가 제단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건재함을 과시하는 아틸카를 보며 트롤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가 양손을 펼치며 유리 팔찌를 서로 부딪쳤다. 맑은 소리를 내며 그가 선언했다.
“탄생의 의식이 무사히 거해졌도다! 이로써 또다시 미래가 펼쳐졌으니 모두 축복하도록 하라!”
☆ ☆ ☆
의식이 끝나자 모인 트롤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제단을 걸어 내려오며 아틸카가 레펜하르트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와 주셨군요, 권왕이여.”
“탄생의 의식을 참관하는 영광을 어찌 놓치겠는가?”
진심 어린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권왕께선 진정으로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군요. 처음 보는 인간이라면 기겁하며 야만적이라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레펜하르트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전생 때 한번 그랬었다. 기껏 친구로 삼은 아틸카가 심장이 뽑히는 걸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당장 양손에 뇌격과 불꽃을 머금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쳐 대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아틸카가 되살아나 오해를 풀었지만, 그때 놀랐던 기분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하하, 뭐, 이래저래 들은 것이 있어서…….”
시리스가 아틸카를 보며 핀잔을 던졌다.
“아유, 깜짝 놀랐잖아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든가.”
“어? 미리 설명 안 해 주셨습니까?”
아틸카가 눈을 껌뻑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길 바랐지.”
하지만 어째 눈치를 보니, 자기도 기겁했으니 남들도 당해 봐야 한다는 심보 같기도 했다.
아틸카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레펜하르트가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이니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틸카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새로 이주해 오셨다는…….”
이니야가 엘프의 예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틸카도 트롤의 예법대로, 양손을 모아 합장하며 답했다.
“대자연의 뜻을 따르는 자, 구루 아틸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이니야가 품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냈다. 제법 커다란 상자였다. 그것을 내밀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이웃이 되었으니 친하게 지내야겠지요. 그래서 가벼운 선물을 준비해 왔답니다.”
아틸카가 살짝 놀란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제껏 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안타레스 백국에 모였지만 인사는 해도 딱히 서로 간에 선물을 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인간의 풍습이지 그들의 풍습이 아닌 것이다. 이종족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는 대단히 큰 호의를 보이는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선물받아 기분 나쁠 이유는 절대 없다.
아틸카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광택이 도는 새하얀 천이 상자 가득 들어 있었다. 현재 이니야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재질, 바로 스티리아 일족이 자랑하는 스노우 엘븐 실크였다.
아틸카가 감탄을 터트렸다.
“허어, 이런 귀한 것을…….”
흙을 빚어 대부분의 물품을 마련하는 트롤들에겐 천이 제일 귀한 물건이었다. 뭐, 워낙 재생력이 높다 보니 의복이라 봤자 비부만 가리는 정도로 충분해 크게 천 쓸 일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쓸 일이 있긴 한 것이다. 가죽이야 짐승을 죽여 얻는 치 떨리는 야만적인 물품일 뿐이고.
그냥 천도 아닌, 귀한 엘븐 실크를 받은 아틸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눈에 띠게 호감을 보이는 아틸카를 보며 이니야는 속으로 씩 웃었다.
‘됐다!’
이 트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깊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자고로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노리라 하지 않았던가? 벌써부터 착실히 주변 인물 공략에 들어가고 있는 이니야였다.
아틸카와 이니야가 사이좋아 보이니 레펜하르트도 흐뭇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리스만 홀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저 여자, 점점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 참, 내가 왜 이러지?’
아틸카도 10년 넘게 세상을 떠돈 자, 결코 눈치가 없지 않다.
‘호오?’
바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이니야 사이에 떠도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확히는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있고, 그냥 두 여자 사이에서만 감돌고 있었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틸카가 슬쩍 레펜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틸카도 2미터의 장신이라 충분히 어깨동무가 되었다.
그 상태로 아틸카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권왕이여.”
“왜 그러나, 아틸카?”
“제가 트롤들 사이에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아틸카가 조용히 곡조를 뽑았다.
해와 달은 함께 뜰 수 없으니
낮이 가야 밤이 오는도다.
얼음과 불이 함께하면 재앙이 닥치니
현명한 자여
상생과 상극은 한 끗 차이임을 알라.
“아시겠습니까, 권왕이시여?”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뻑였다.
‘미안,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하긴 이 양반, 예전부터 뭐 좀 물어볼라치면 만날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곤 했다. 괜히 레펜하르트가 마켈린하고만 주로 상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틸카도 현명하긴 한데, 좀 현명함이 지나치다 보니 일반인(?)인 레펜하르트로서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대답이 많았던 것이다.
하여튼, 뭔가 충고를 한 것 같기는 하다. 뭔 소리냐고 되물어 봐야 또 뜬구름 대답만 돌아올 것이 빤한지라 레펜하르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유념하도록 하지.”
시찰도 끝났고 의식도 보았으니 레펜하르트는 백왕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리스와 이니야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마을 밖에 묶어 둔 말들에게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틸카가 히죽 웃었다.
“좋을 때다~.”
2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오늘도 레펜하르트는 업무에 열심이었다. 한창 그가 이종족들의 생활에 대한 보고서들을 처리하고 최종 결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신가요, 레펜하르트 님?”
곧이어 문이 열리며 커다란 쟁반을 든 엘프 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니야.”
안타레스 백국에 합류한 이래, 이니야는 틈만 나면 레펜하르트를 찾아오곤 했다. 그나마 스티리아 일족이 엘븐 포레스트에 정착하는 초반엔 그래도 사흘에 한 번 정도였는데, 요새는 아예 거의 백왕성에 거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도 자주 찾아오다 보니 이젠 레펜하르트도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또 어쩐 일로?”
방실방실 웃으며 이니야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그녀가 요리를 차렸다. 향긋한 소스를 뿌려 구운, 스티리아 엘프들의 특제 요리법으로 만든 농어구이였다.
살아왔던 환경 덕분에 단하임 일족이 고기 요리에 능하듯, 스티리아 일족은 생선 요리에 능했다. 신선한 과실과 맑은 이슬만 먹고 살았다는 엘프 조상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겠지만, 오지에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엘프의 식습관도 상당히 변화를 겪은 것이다.
“너무 일만 하시면 몸 축난답니다. 식사라도 거르실까 싶어 조촐하나마 음식을 좀 들고 왔어요.”
요리를 차린 뒤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팔을 잡아끌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레펜하르트가 어색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 예…….”
사실은 식사 같은 거 거른 적 없다. 밥때 되면 시리스가 세 끼 꼬박꼬박 챙겨 주는데 굶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물론 전생 때야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식욕을 잃어 가끔 끼니를 거르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이 무식한 육체는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에 닥친다 해도 결코 식욕을 잃는 일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업무 보면서 같이 먹음 먹었지, 식욕 없다고 상 물리는 일 따윈 지금의 그에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쨌거나 기껏 가져온 요리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마침 식사 때가 다 되기도 해서 레펜하르트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농어구이를 입에 넣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이니야가 은근히 물었다.
“입에 맞으시나요?”
레펜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합니다. 특히 소스의 배합이 절묘하군요.”
이니야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호감도 올려 보려고 일부러 요리 들고 왔는데,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 꽤 먹힌 것 같았다.
이 농어구이, 사실 이니야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평생 검만 휘둘러 온 그녀가 요리 따위 할 일이 언제 있었겠는가? 당연히 일족의 여인 시켜서 요리한 걸 자기가 만든 것인 양 들고 왔을 뿐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지. 그녀가 슬쩍 곁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들 속담에, 예쁜 여자와는 3년 동안 행복하지만 요리 잘하는 여자와는 30년 동안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은근슬쩍 노골적인 화제를 꺼내 드는 이니야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속담도 있긴 하지요.”
딱히 그가 둔해서라기보다는, 눈치채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계속 포크질을 하며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아, 참. 타리야 양에게도 잘 먹었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헉!’
그렇다. 레펜하르트는 이미 전생 때에도 스티리아 일족에게 음식 많이 얻어먹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이 소스 맛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저들 중 제일가는 요리사 엘프, 타리야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무심코 나온 레펜하르트의 발언에 이니야가 뜨끔해하며 딴청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