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96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사전 작업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요.”
단순히 주군의 명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더 이상 이종족의 고통을 두고 볼 수가 없는 처지다. 이미 드워프들은 그에게 있어 남이 아니며, 다른 이종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차탄 공국, 그리고 제플린은 대륙 전역에 깊게 뿌리내린 노예 제도의 핵심이나 다름없으니,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안타레스 백국의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짬을 내서 차탄 공국의 이종족 노예들을 구하기 위한 밑 작업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차갑게 웃으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뿌리 깊은 나무를 쓰러뜨리려면, 뿌리부터 말려 죽여야 하는 법이지요.”
제30장 자유의 신호탄
1
인구 이십만의 대륙 최대 상업 도시 제플린.
온갖 행상과 상단이 오가는 제플린의 북문을 세 사람이 지나고 있었다. 후드를 머리까지 드리운 거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크고 작은 이들이었다.
자고로 벌건 대낮에 얼굴 가리고 다니는 놈들은 반드시 뒤가 구린 놈인 법이다. 하지만 제플린 북문의 경비대는 굳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분증 검사조차 없었다. 돈이면 장땡인 나라의 수도 경비대답게, 1인당 은화 다섯 닢으로 깔끔하게 통과가 되었던 것이다.
북문을 통과한 뒤 힐끔 뒤를 보며 러스가 혀를 찼다.
“아니, 이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자들일 텐데…….”
그러자 뒤를 따르는 작은 체구의 소년, 실란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이 나라는 돈이면 다 된다고.”
앞장 선 거구의 남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안 들키고 잘 통과했으니 된 것 아냐?”
슬슬 레펜하르트는 물론이고, 실란과 러스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혹여나 그들을 알아볼 이가 있을까 싶어 다들 얼굴을 가린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신분을 감추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였다.
물론 남들 다 얼굴 드러내는데 그들만 감추고 있으면 오히려 더 눈에 뜨이겠지만…….
“……저는 더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해서 반대한 것인데, 별로 수상할 것도 없었군요…….”
인파 속에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바라보던 러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드로 머리를 덮은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 인파 속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뒤 구린 놈들이 많은 건지, 어차피 인파의 절반은 후드나 덥수룩한 수염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신분증 대신 뇌물로 북문을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아니, 저러고도 경비대에서 안 잘리나?”
실란이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게 원래 이런 나라라니까요?”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저번 제플린 방문 때 워낙 못 볼 꼴 많이 봐서 그런지 이 정도는 이제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차탄 공국을 처음 방문한 러스만 컬처 쇼크를 못 이기고 여전히 기막혀하고 있을 뿐이다.
거리를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러스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저들 대부분은 범죄자 출신 용병들이거나 밀수꾼들이다. 진짜 중요한 상업 지구 쪽은 이렇게 얼굴 가리고 못 들어가지.”
빈부 격차가 심한 곳답게, 제플린은 같은 성내에서도 치안이 심각하게 차이 나는 것이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이 들어온 북문 지구는 제플린에서도 슬럼으로 취급되어 싸구려 창녀촌이나 술집, 가난한 행상들이 들락거리는 지역이었다. 반면 서문 쪽의 상업 지구는 돈 많은 상인들의 저택이나 상회가 위치한 곳.
“거긴 오히려 다른 나라의 성문보다도 더 엄중하게 경계를 하지. 당연히 뇌물 따윈 통하지도 않고.”
부유한 자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켜 주지만, 가난한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이것이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로서 흥하는 제플린의 실태였다.
“어차피 우리는 그쪽은 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후드를 살짝 걷어 올려 해의 위치를 본 뒤,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잘 잠입했으니 이제 해가 지길 기다리면 되겠군.”
세 사람은 그렇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목적지인 북문 지구의 여관, ‘샌드 더스트’로 향하는 것이었다. 북문 지구의 여관 대부분이 그렇듯 샌드 더스트도 허름하고 숙박비 싸며 신분 따위 조사 안 하는, 범죄자를 위한 완벽한 숙박 장소였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레펜하르트 일행에게 대단히 적합한 곳이다.
걸음을 옮기며 실란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잠입해 있다고 했죠? 다들 무사할까요?”
인간인 실란과 러스, 레펜하르트는 지금 제플린에 들어왔지만, 이종족들은 이미 카를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제플린 곳곳에 침투한 후다.
실란 뒤를 따르던 러스가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직까지 제플린이 불바다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다들 무사한 것 같지?”
☆ ☆ ☆
제플린에서도 유서 깊고 대륙 전역에서도 가장 융성한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 그곳에서 지금 새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연기 사이로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왔다.
“또! 또 태웠어! 도대체 네년은 할 줄 아는 게 뭐니!”
흑연의 근원지는 엘븐하임의 드넓은 주방, 그중에서도 빵 굽는 오븐이었다. 그곳에서 한때 밀가루 반죽이었던 것이 새까만 숯이 되어 ‘나는 더 이상 사람 먹을 물건이 아니오.’라고 강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븐 앞에서 한 엘프 여인이 굴욕으로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다. 보랏빛 머리칼에 순백의 피부, 날씬한 몸매에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인이었다.
엘븐하임의 교관이자 엘프 노예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중년의 인간 여인, 클라라가 혀를 찼다.
“젠장, 엘프치고 특이하게 가슴이 커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년인데, 도대체 왜 저리 실수가 잦은 거야?”
저 가슴 큰 엘프 계집이 엘븐하임에 들어온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지나가는 행상에게 거의 후려치다시피 해 사들였다는데, 특유의 몸매 덕에 희소가치가 있어 경매주 라르크도 꽤나 흐뭇해했던 계집이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상품으로 팔기 위해 노예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도대체가 이 엘프 계집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리를 시키면 숯으로 만들고 빨래를 시키면 걸레로 만들고 바느질을 시키면 바늘을 부러뜨리고 마사지를 시키면 멍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 하니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밤일 교육은 아직 입문도 못 시켰다.
“네년 팔에 달린 건 손이 아니라 앞발이냐? 정말 정신 안 차릴래?”
“…….”
버럭버럭 화를 내는 클라라를 보며 새끼 교관이 슬그머니 물었다.
“징벌방으로 넣을까요?”
징벌방은 말을 듣지 않는 엘프들을 ‘정신교육’시키기 위한 곳이다. 참고로 저 ‘정신교육’의 골자는 바로 ‘매에는 장사 없다.’였다.
“으음…….”
클라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징벌방은 반항적인 엘프들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엘프 교관으로 뼈가 굵은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보랓빛 머리의 엘프는 절대 반항해서 저렇게 실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정말 살림 쪽에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는 것이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닌 이상, 징벌방으로 넣어 봐야 별로 나아질 것도 없다. 괜히 재수 없으면 흉터 생겨서 상품 가치만 떨어지지.
“흥, 그냥 밥이나 굶겨. 배 곯아 보면 정신 좀 차리겠지.”
씩씩대며 클라라가 발길을 돌렸다. 새끼 교관이 엘프 여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따라와라, 323번!”
323번이라 불린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이 힘없이 뒤를 따른다. 엘프 여인을 숙소에 집어넣고 철창을 잠갔다. 323번이 말없이 자신의 침상으로 향했다. 마주한 침상, 그곳에서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비슷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 역시, 323번 못지않게 손재주가 서툴러 며칠째 혼이 나는 처지인 것이다.
새끼 교관이 혀를 찼다.
“저년도 그렇고 324번도 그렇고, 그날 팔려 온 것들은 이상하게 서툴단 말이야.”
툴툴대며 교관은 다시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쪼그려 앉아 있던 324번,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시무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고 강인한 눈빛이 은색 눈동자 위를 맴돈다.
그녀가 맞은편을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교육도 훌륭히 실패했네요, 이니야 씨.”
이니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네요, 시리스 양.”
시리스와 이니야가 이곳, 엘븐하임에 잠입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다른 엘프 노예들을 안쪽에서 이끌기 위해 노예인 척 팔려 들어온 것이다. 물론 여성의 몸으로 노예로 팔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꽤 위험한 일이긴 하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초반엔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오러 유저인 이니야와 시리스의 정령술이라면, 맨손으로도 자기 몸 건사하기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레펜하르트도 결국 시리스의 굳은 의지 앞에 계획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문제였던 것은 엘프 여성 노예라면 당연히 밤일에 대한 교육도 받게 될 것이라는 건데, 이건 시리스가 해결했다.
그녀는 엘븐하임에서 유년기를 보낸 바가 있다. 엘븐하임의 노예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빠삭하단 소리다. 처음부터 기초적인 노예 교육을 계속 서툴게 일관한다면, 밤일을 가르치거나 하기 전에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걱정했던 건, 이니야 씨가 과연 안 들키고 ‘서툰 척’을 할 수 있을까 였는데…… 생각보다 잘하시는군요.”
단순히 서툰 척으로 교육을 미룰 수 있을 만큼 엘븐하임 교관들의 눈썰미는 만만치 않다. 저들은 몇십 년을 엘프 노예를 교육시켜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것이다. 반항기를 보이는지 아닌지쯤은 바로 알아채 버린다.
“저야 이미 이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아 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안 들키는지를 알지만…… 이니야 씨가 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이니야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진다. 문득 시리스가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음, 정말 ‘서툰 척’한 것 맞죠? 이니야 씨? 정말 ‘서툰’ 게 아니라?”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더 굳었다. 시리스가 침상에 몸을 기대더니 설마 하는 어조로 말했다.
“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멋진 요리도 한 분인데 설마 그럴 리가…….”
이니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년, 눈치 깠어!’
잽싸게 이니야가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슬슬 날짜가 되었네요. 오늘이죠?”
시리스도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뒤 창살이 쳐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조용히 뇌까렸다.
“네, 오늘이에요.”
그러자 숙소의 다른 엘프 여인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엘프 여인들이 시리스와 이니야에게 다가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정말 안타레스 백국에서 우리를 구해 주는 건가요?”
“이렇게 노예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이니야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곧 구원받을 겁니다.”
비록 요 근래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몇십 년간 스티리아 일족을 이끈 수장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엔 확실히 수장다운 권위가 있다.
엘프 여인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기쁜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대감 부푼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시리스는 새삼 감탄했다.
이제껏 그녀가 구했던 동족들과는 전혀 다르다. 안타레스 백국에 도착해서도 노예가 아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들과는 전혀 다르다.
똑같이 노예로 살아가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이미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대단하네. 정말 카를 씨 말대로잖아?’
☆ ☆ ☆
카를은 설명했다.
“현재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은 너무도 체제에 적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레펜하르트 일행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경매장을 무너트리고 족쇄를 부순 뒤 ‘자, 이제 그대들은 자유다!’라고 외친다 해서 노예들이 바로 호응해 주지는 않는다는 걸.
내부로 잠입해 노예들을 봉기시키기 위해선, 일단 그들이 현재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유에 대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워프들 경우에는 내부 호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락 단위여야 노예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드워프의 특성상, 저들은 비교적 문화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 역시 많이 남아 있지요. 드워프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원래 자유민이어야 하며, 비록 현재 노예의 처지이긴 하지만 언젠가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습니다.”
연금술사 길드에 잡혀 있는 트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사로잡힌 상태이니 당연히 노예라는 자각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역시 오크와 엘프입니다.”
차탄 공국의 노예상들은 노예 매매의 스페셜리스트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노예가 아닌 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도가 튼 작자들이란 소리다. 그들의 조교 방식과 정신교육은, 설사 이종족이 아닌 자유롭게 살던 인간이라도 자신이 원래 노예였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 가혹하다.
“오크 검투사들은 그래도 전사의 긍지가 있어 타시드 경의 말에 따랐지요. 그리고 야성이 보존된 만큼 분노할 줄도 압니다. 하지만 농업용 오크나 엘프들은 많이 달라요.”
그들은 스스로가 노예임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람은 무릇 환경에 지배되는 법이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그들이 노예라 주장하고 있으니 감히 노예가 아닌 자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사전 작업을 좀 해 뒀습니다.”
그 방식은, 레펜하르트나 시리스 입장에서는 조금 어이없는 것이었다. 시리스가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동화책요?”
“그래요, 시리스 양. 동화책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그 동화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