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01
옷자락을 털며 시리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이 정도로 다칠 만큼 약하진 않아요.”
‘까칠하긴.’
이니야는 입을 삐죽였다. 역시 저 꼬맹이 마음에 안 들어!
그때 경매장 후문 저편에서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똑! 똑!
동시에 굳건히 잠겨 있던 후문의 자물쇠가 열리며 가냘파 보이는 엘프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이니야와 시리스, 그리고 다른 엘프 노예들을 바라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아르니라고 합니다. 약속했던 대로 여러분을 안내하기 위해 왔어요…….”
그녀의 목에는 노예임을 증명하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엘븐하임에서 사육되는 노예가 아니라, 정식으로 외부에 팔린 노예라는 증거.
그녀는 이니야나 시리스처럼 안타레스 백국에서 제플린으로 잠입한 것이 아닌, 원래부터 이곳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엘프였던 것이다.
☆ ☆ ☆
제플린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작업을 하던 카를이 가장 골치 아팠던 부분은 바로 경매장 외부의 이종족 노예들이었다.
노예 경매장에 모여 있는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데리고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외부로 팔려 각자 주인을 가진 노예들은 영 손쓰기가 쉽지 않았다.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선,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자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나선다는 전제 조건이 필수였다. 아무리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들이 강력하다 해도 제플린의 노예 숫자는 너무나 많고, 그들 모두를 강제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여러 사전 작업으로 내부 호응을 유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경매장 내부, 비슷한 처지가 많이 모여 있으며 확실한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노예들에 한해서라면.
하지만 이미 팔려 버린 노예들에게까지 그들의 삶을 자각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소수의 엘프 노예들을 구출할 때, 그녀들은 모두 또 다른 주인을 만났다는 심정으로 시리스를 따랐지 딱히 자유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정도의 대규모 해방 작전을 꾀하려면 적어도 그 노예들 개개인이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는 최소한의 자각은 가지고 있어 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두 달 사전 작업을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 부분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레펜하르트 님이 미리 사전 작업을 해 두셨더군요?”
“응? 내가 뭘 했는데?”
감탄 섞인 카를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를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 노예들 교육시키는 방법, 레펜하르트 님이 유행시킨 것 아니었습니까? 시볼트 회주 말로는 그렇다던데…….”
“아, 그거?”
그제야 레펜하르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몇 년 전, 차탄 공국을 방문했을 때 시리스를 구하면서 이런저런 엘프 노예들도 함께 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노리고 그들을 교육시키라며 은근슬쩍 시볼트에게 압력을 넣기도 했다.
과연 레펜하르트 예상대로, 노예일 뿐인 이들을 교육시켜 놓으니 다들 머리가 트여 부려먹을 수 있는 용도가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상인 입장에서 회계사를 고용하는 것은 많은 봉급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노예가 대신할 수 있으면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노예가 이런저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 훨씬 인건비 절감에 도움이 된다.
이래저래 행보가 바쁘다 보니 레펜하르트는 반쯤 잊고 있었지만, 그 이후 차탄 공국, 특히 제플린 내에서는 노예들을 교육시켜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 꽤 유행처럼 퍼져 있었다. 지금 카를이 짚은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뒷조사를 해 보니 기대 이상으로 제플린 내의 이종족 노예들의 호응도가 높더군요. 이미 저희들끼리 몰래 만나 가며 뭔가 변화가 생기길 기대하는 움직임이 제법 있습니다. 물론 그들끼리만 들고 일어난다고 해 봐야 미래가 없어 아직까지는 모여서 서로 하소연하는 정도 수준인 듯하지만요.”
덕분에 그들 역시 봉기가 일어나면 충분히 호응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카를의 말이었다. 이미 비밀리에 서신이 오가고 있으며, 뜻을 함께하는 오크며 엘프, 드워프 노예들이 상당히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걸로 제플린의 분산된 노예들을 구출하는 것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부분도 해결할 수 있었고요.”
저 노예들이 자발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에 호응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구출할 수 있는 노예의 숫자가 늘었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덕분에 제플린 내부에 믿을 만한 다수의 아군이 생겼지요.”
안타레스 백국에서 제플린 내부로 병력을 잠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이 최정예라고는 해도, 무기도 갑옷도 없이 중무장한 병사들을 상대할 정도로 강한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내부의 샛길을 안내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파악해 주며, 또한 탈출한 이들의 무장을 책임져 줄 외부의 인력으로 이들만큼 좋은 이들도 없지요.”
☆ ☆ ☆
아르니는 원래 제플린의 이름난 상단에서 살아가던 엘프 노예 중 하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단순한 하녀로 저택에서 봉사하며 주인이 원하면 침실로 끌려들어 가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론 주인이 원하면 침실로 가야 한다는 점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업무 자체는 단순한 하녀가 아니었다.
요 근래 제플린에 불어온 기이한 유행, 노예를 교육시켜 쓸모 있게 만든다는 그 유행 덕에 그녀는 지금 라타룬 상단의 하급 경리이며 동시에 창고 물품 관리자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경리 일을 제대로 하려면 단순히 숫자만 잘 계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니 만큼 전반적인 기초 교양은 모두 익힐 필요가 있다.
덕분에 아르니는 엘프이면서도 인간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삶을 살아가며 조금씩 의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인간이 느끼는 일은 그녀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왜 그녀는 노예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노예인 자신과 인간인 저들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처음에는 그것은 아주 작은 의문이었다. 일에 지쳐 피로 속에 침상에 몸을 뉘일 때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실로 작디작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
그 의문이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른 것은 크로방스 내전의 소문이었다.
마치 신화나 전설 속의 엘프처럼 살아가는 동족의 이야기.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인간을 상대로 당당히 맞서는 이들의 소문은 아르니의 의문을 점점 더 키워 나갔다. 그녀는 무심코 다른 엘프 노예에게 자신의 의문을 흘렸다.
왜 그녀는 노예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노예인 자신과 인간인 저들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놀랍게도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르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문을 흘렸던 다른 엘프 노예, 그녀 역시 아르니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또한 아르니는 또 다른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제플린 내에 그녀처럼 의문을 가지는 노예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가끔 몰래 서로 만나며 친분을 쌓고 있었다는 것을.
아르니가 대화한 엘프 노예는, 그녀처럼 다른 상단에서 교육을 받고 물품 관리에 종사하던 이였다. 딱히 우연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근 제플린 시내에 번진 저 ‘노예 교육열’은 꽤 유행이 과열되어, 어지간한 노예들은 대충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제플린 내에서는 이제 교육을 받지 않은 노예들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다.
제대로 교육받아, 현실에 의문을 품은 노예들.
그들은 틈나는 대로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 엘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오크도 있었다. 뭐, 모임을 가진다고 딱히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의문을 품을 만큼 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얼마나 꽉 짜여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저 망상 속에서 존재하지 않을 희망을 꿈꾸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
그럼에도 그들은 모임을 유지했다. 적어도 같은 처지와 만남으로써 심적인 위안은 얻을 수 있기에.
그런 그들에게 변화가 온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은밀하게 그들에게 접근한 한 엘프, 안타레스 백국의 엘프라 자신을 소개한 렐하드란 인물에 의해서.
“이쪽이에요!”
골목을 달리며 아르니는 빠르게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짧은 다리를 바삐 놀리며 어둠을 가른다.
아르니가 가리킨 곳은 그녀가 속한 상단의 창고, 자신이 관리하는 무기 창고였다. 드워프들이 모이자 아르니는 빠르게 자물쇠를 따고 창고를 열었다. 수많은 무기들이 가득 진열된 창고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이 희희낙락하며 무기며 갑옷들을 집어 들었다.
“호오, 이거 인간치곤 꽤 잘 벼린 검이로군.”
“이 장검도 꽤 괜찮은데?”
“하지만 갑옷은 사이즈가 안 맞아.”
“팔다리 부위는 버리고 어깨랑 가슴 부위만 쓰면 되잖소.”
드워프들이 허겁지겁 무장을 갖췄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었지만 무기는 전원에게 주어질 만큼 충분히 많았다. 애초에 아르니가 이 날을 위해 일부러 숫자를 맞췄으니까.
‘무기는 제대로 전달했어! 이제 다음은…….’
아르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지금쯤 다른 곳에서도 무기 창고가 열리고 있을 터였다. 연락을 취한 다른 노예들도 그녀처럼 엘프며 오크, 드워프들을 이끌고 있을 테니까.
“후후, 검을 드니 오랜만에 피가 끓는구먼.”
중무장을 한 드워프 사내가 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빛냈다. 조금 전까지 노예 신세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활발한 태도였다. 평소 드워프를 본 적이 없던 아르니로서는 놀라울 정도였다. 자신은 지금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드워프들이 무장을 끝내자 거리로 나섰다. 아르니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제플린 곳곳에서는 붉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사이로 수많은 노예들이 자유를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뿐이었다. 제플린 시내에 이토록 많은 노예들이 있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아르니를 향해 드워프 사내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자, 우리도 갑시다, 엘프 처자.”
“네!”
아르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공포가 공존한 채,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아르니는 열심히 그들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소란스러운 밤거리를 작은 소녀가 창문 너머로 힐끔 내다본다. 뒤에서 어미 된 아낙이 굳은 얼굴로 소녀를 만류하며 창문을 굳게 닫는다.
“엄마, 무슨 일이야?”
“어서 방으로 들어가렴!”
제플린 시내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왕궁에서 불기둥이 솟구칠 때만 해도 시민들은 호기심은 가질지언정, 두려움이나 공포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어둠이 깔린 제플린 곳곳에서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달리고 있다. 모두가 노예로 학대받던 종족들이었다. 수백의 오크, 엘프, 드워프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제플린 외곽을 향해 달려간다.
저들이 딱히 고함을 지르거나 호통을 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발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작게 읊조리는 혼잣말이 수백이 모인다면 그것은 충분히 거대한 굉음이 될 수 있다.
저벅저벅저벅.
웅웅웅웅웅.
소란 속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노예들의 집단.
어둠 속의 그 광경은 제플린 시민에게는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상인들은 일제히 문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호위 병력을 내세워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 했다. 힘없는 일반 시민들은 그저 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문외한이라도 이 상황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대탈주!
노예로 살아가던 이종족들이 일제히 봉기한 것이다!
“좋아,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어.”
로브를 뒤집어쓴 채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왕궁 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한 상인 저택의 지붕, 제플린에선 상당히 높은 건물이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횃불의 강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생에서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해 수동적으로 자유를 얻은 전생의 오크, 엘프, 드워프, 트롤 들.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자신의 손과 발로 밑바닥에서 일어나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굳은 이들이라도 이제는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하하핫!”
그렇게 뿌듯하게 제플린 시내를 내려다보던 레펜하르트의 귀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란의 목소리, 그것도 원거리에서 음성을 전달하는 보이스 주문으로 전달되는 음성이었다.
“이봐요오~ 레펜 씨?”
레펜하르트는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실란과 러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큰 소리를 못 지르니 보이스 주문을 쓴 모양이다.
실란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니, 왜 합류하러 잘 가다 말고 거기 올라가서 낄낄대는 건데요?”
지금 그들은 예정대로 다른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제플린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폴짝폴짝 남의 집 지붕에 올라가더니 괜히 밤하늘 내려다보며 폼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본인이야 어떨지 모르겠다만 따라가던 실란 입장에서는 대단히 생뚱맞은 광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붕 아래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응? 아, 그냥 습관인지라…….”
“대체 뭘 어떻게 살아야 야밤에 남의 집 지붕 올라가서 낄낄대는 습관이 붙는 건데요?”
“…….”
하여튼, 잠시 감상에 좀 빠져 보려니까 바로 초 치고 들어온다. 인상을 구기며 레펜하르트는 지붕에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문득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저 멀리, 불길이 번져 가는 차탄 왕궁의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기대했던 대로 악마들이 제대로 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정도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저쪽 상황 진정되긴 힘들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