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02
만족스러워하며 레펜하르트는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탓에 그는 미처 보지 못했다.
자신이 시선을 돌린 직후, 차탄 왕궁이 안개에 뒤덮이며 불길이 급속도로 꺼져 가는 광경을.
제31장 공국의 역습
1
“게트란 필 라타!”
우렁찬 악마어를 토하며 세피아탄이 입을 벌린다. 거대한 불기둥이 열기를 뿌려 대며 대지 위로 길게 파괴의 흔적을 남긴다. 불기둥이 스치고 갈 때마다 땅이 파헤쳐지고 수목이 불타오르며 돌이 녹아 흘러내린다.
화르르륵!
붉게 달구어진 차탄 왕성 곳곳은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휘날리는 재와 검은 연기, 이글거리는 불길이 자아내는 열기 속에서 클라트 경은 정신없이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2대대, 황금궁을 지켜라! 4대대는 내궁의 왕족들을 보호하도록!”
차탄의 유일한 기사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이미 클라트 경은 출현한 악마 중 하나, 붉은 피부의 피엔드를 다시 이계로 되돌린 후였다. 하지만 악마의 숫자는 셋이고 그의 몸은 하나, 그가 피엔드를 상대하는 틈에 다른 두 악마는 이미 왕궁 곳곳으로 흩어져 광포하게 날뛰는 중이었다.
“크아아아!”
“크라라!”
악마들이 포효를 터트릴 때마다 검은 마력이 분출되어 건물을 부수고 피의 강을 자아낸다. 악마 자체의 파괴력도 어마어마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악마들이 소환하는 또 다른 소형 악마들이었다. 소형 악마들이 몇백 개체나 출몰해 왕궁 여기저기를 미친개처럼 치달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소환이 아니라 악마의 신체 일부나 권능을 분리해 창조하는 분신이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별 의미 없는 구별이다.
‘제길, 제플린 나이츠가 왕궁을 비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모종의 임무를 받아 전원 왕궁을 비운 상태, 아쉬워하며 클라트는 소형 악마들을 상대하는 근위 기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차탄 기사단! 홀로 상대할 생각은 버려라! 왕실 근위대와 함께 3인이 조를 짜 하나를 상대하라!”
말이 소형이지, 저 소환된 악마들의 덩치도 어지간한 성인 장정을 능가한다. 아무리 마법기로 전신을 무장한 차탄의 마법 기사라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벅찬 괴물들인 것이다. 여럿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네, 단장님!”
“알겠습니다!”
클라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차탄 기사들이 바로 왕실 근위대와 힘을 합쳐 소형 악마들의 진군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클라트는 혀를 찼다.
“……명예 안 따지는 우리나라 기사들 습성이 이럴 땐 또 도움이 되는군.”
다른 나라의 기사라면 여럿이서 하나를 핍박하라는 이런 명령을 내릴 경우, 수치를 느끼며 움직임이 둔해졌을 것이다. 일대일 결투는 기사도의 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평소에도 기사답지 않게 살아온 차탄 기사단은 이렇듯 조 짜서 한꺼번에 덤비라는 명령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니, 눈치를 보니까 ‘진작 이렇게 하시지.’라는 표정도 간혹 보였다.
지금 상황에선 참 바람직한 광경이지만, 그래도 뼛속까지 기사인 클라트 경이 보기엔 참 입맛이 쓰다.
‘으이그, 저 기사 같지도 않은 놈들…… 그래도 다행히 더 이상 밀리지는 않겠군.’
주변 상황을 파악한 뒤 클라트는 다시 눈앞의 악마, 세피아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으…….”
자신이 소환해 낸 시종마들의 진군이 가로막히자 세피아탄이 분노의 울음을 흘리며 재차 불기둥을 토해 냈다. 잽싸게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한 클라트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압!”
검을 머리 위로 길게 들어 올린 뒤 오러를 실어 길게 내리친다.
“블러디 레인!”
수십 줄기의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비처럼 쏟아져 세피아탄의 전신을 두들겨댔다. 세피아탄도 대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 보았지만, 워낙 공세의 숫자가 많다보니 여기저기 작은 찰과상이 연달아 생겨났다.
하지만 제대로 공격을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라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크으, 역시 저 악마의 육체가 너무 단단해. 좀 더 강력한 일격이 필요한데…….’
블러디 레인은 분명 뛰어난 필살기지만 세피아탄 같이 강력한 하나의 개체보다는 다수의 병력에 보다 유용한 기술이었다. 파괴력이 모자란 것이다.
아까 해치운 피엔드는 스피드 타입의 악마인지라 광범위 공격이 가능한 블러디 레인으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피아탄은 거구의 파워 타입 악마, 블러디 레인을 아무 갈겨 봤자 피륙의 상처만 줄 뿐 치명타를 먹일 수가 없다.
‘하지만 블러디 레인 말고 더 강력한 기술도 없고…….’
같은 오러 유저라도 익힌 검술에 따라 오러 운용법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는 법, 클라트가 익힌 검술은 단순 무식한 일격보다는 정밀하고 세련된 연격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스타일도 좀 더 경지에 오르면 연격을 일점에 집중해 파괴력을 보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오르지 못했다.
“델 카라타 마카!”
전신에서 푸른 마혈을 흘리면서 세피아탄이 다시 공세를 가해 왔다. 거대한 대검이 불길을 머금고 허공을 갈랐다. 열기가 파도처럼 밀려와 사방을 달구어 댔다.
공격을 피하며 클라트는 연달아 블러디 레인을 날렸다. 붉은 오러가 화살처럼 계속 세피아탄의 사지를 두들겨 댔다.
그때마다 세피아탄이 신음과 함께 피를 흘렸지만, 그럼에도 움직임이나 파괴력은 전혀 줄지 않는다.
세피아탄을 상대하며 클라트는 힐끔 등 뒤의 상황을 살폈다. 절로 이가 갈렸다.
“한 놈은 어떻게 막는다 쳐도 다른 한 놈이 문제군.”
클라트가 세피아탄의 움직임을 막는 동안에도 나머지 한 악마, 푸른 뇌전의 젠타렐은 마음껏 왕궁을 유린하고 있었다. 여전히 왕궁 여기저기서 푸른 전격이 번뜩이며 불길이 치솟고 비명이 아우성친다.
‘환장하겠군. 어서 저쪽도 처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세피아탄을 해치우지 않는 한, 이 자리를 뜰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클라트가 초조함으로 입술을 깨물 때였다.
갑자기 새하얀 안개가 왕궁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음?”
안개가 화염 가득한 차탄 왕궁 전체를 휘감아 간다. 동시에 이글거리던 불길의 위세가 눈에 띠게 줄어든다. 오러 유저의 감각으로 클라트는 이 안개가 강력한 마력을 담은 마법의 안개임을 눈치챘다.
‘마법사 하질 공인가? 아니, 그 양반도 자리 비웠댔는데?’
차탄 왕궁 마법사 하질은 8서클 초입의 대마법사로 많은 제자들을 부리며 차탄 왕실의 마법 전력을 담당하고 있었다. 사실 평소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출현한 세 악마가 강력하다 한들 차탄 왕궁이 이토록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계의 상위 악마에게는 오러 유저보다 고위 마법사가 더욱 잘 상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 하질 역시 제플린 나이츠처럼 모종의 일로 자신의 수제자들을 대동하고 왕실을 비웠다는 점이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왕궁 마법사와 제플린 나이츠가 모두 자리를 비우다니, 대체 뭔 일이기에…….’
혹시나 하질이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 클라트 경은 마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순 놀랐다.
‘응? 하질 공이 아니잖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마력의 중심지, 백양궁의 석탑에 서 있는 것은 클라트가 알고 있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늙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젊은, 아직 앳되어 보이기까지 한 어린 여인이었다.
“흘러라, 뒤덮어라, 나는 힘의 사역자, 그릇된 것을 누르는 권능의 그릇을 부어 평온을 부르는 자…….”
아무리 높게 쳐줘도 20대 중반을 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마법 영창을 잇고 있었다. 동시에 여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안개가 되어 불붙은 건물들을 휘감아 가며 화기를 억누른다.
“허어!”
클라트는 감탄하며 입을 쩍 벌렸다.
마법 자체는 6서클 후반 수준이었지만 범위가 엄청났다. 저 마력의 안개는 차탄 왕궁 전역을 거의 대부분 뒤덮고 있었다. 저 정도의 광범위 주문은 마법사 하질이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저렇게 어린 여인이 저런 어마어마한 주문을? 설마 대마법사인가?”
하지만 아직 그가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탁! 탁! 탁!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안개 저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놀라운 속도로 좁아진다. 안개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기감만으로도 상대의 움직임이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러 유저였다.
“크르?”
또 다른 강자의 기척을 느끼며 세피아탄이 고개를 돌렸다. 클라트와 세피아탄의 시선이 똑같이 한 점을 응시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싯누런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든, 젊디젊은 청년이었다.
“흐읍!”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나타난 청년이 짧은 기합을 터트리며 그대로 세피아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피아탄도 아까부터 경각심을 끌어 올린 터, 바로 대검을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대검이 청년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스파이럴 블레이드!”
청년의 오러가 눈부시게 빛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숫제 거대한 드릴처럼 변한 청년이 검이 그대로 세피아탄의 대검을 부수며 악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비늘이 깨지고 파편이 튀며 푸른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세피아탄이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놀라운 위력이었다. 클라트가 그동안 죽어라 후려갈겼던 수십 번의 공격, 그보다 저 이름 모를 청년의 일격이 더욱 큰 상처를 주었다.
“누, 누구지? 저자는? 저런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자가 있었나?”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최근 크로방스 내전으로 명성을 떨친 안타레스 백국의 오러 유저, 사이러스였다.
하지만 저 흑발의 청년은 사이러스와 인상착의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머리색도 그렇고, 그냥저냥 잘생긴 편에 속하는 사이러스에 비해 저 청년의 미모는 실로 경국지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보통은 미녀나 독점하는 저 호칭이 남자에게 붙으려면 어지간한 미모로는 힘들다. 사이러스의 외모가 저 수준이었다면 소문 속에 그 얼굴에 대한 부분이 없을 리가 없지.
“타앗!”
흑발의 청년이 연달아 블레이드 오러를 회전시켜 휘두르며 세피아탄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이라 클라트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막 정신을 차리고 협력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때였다.
“차탄의 왕궁 기사단장, 클라트 경이시지요?”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금 전 마법의 안개를 펼쳤던 그 여마법사가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클라트의 감각으로 못 알아차릴 리 없거늘, 지금 눈앞의 광경이 너무 놀라워 잠시 정신을 놓은 모양이다.
“그, 그대는?”
“델피아 마탑 출신의 필레나라고 합니다. 공왕님의 초청에 따라 여기 왔습니다.”
“아…… 도움에 감사하오. 차탄 기사단장 클라트라 하오.”
더듬거리며 클라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이 아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정식으로 인사치 못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오, 마법사 필레나.”
인사를 건네자마자 클라트는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 했다. 그때 필레나가 그를 만류했다.
“저 악마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클라트 경은 내궁의 악마를 처리해 주세요. 제가 비록 급한 불은 껐다지만 아직도 피해가 크니까요.”
“아, 하지만…….”
잠시 클라트는 세피아탄과 내궁 안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사답게, 그는 자신의 상대를 남에게 미루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단장답게, 그는 지금 상황이 기사의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님을 인정했다.
“미안하게 됐군, 그럼 부탁하겠소.”
굳은 얼굴로 목례한 뒤 클라트는 검을 들고 내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과연 오러 유저답게 일단 땅을 박차자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뛰어넘어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필레나가 클라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었다.
‘사실, 이 경우에는 두 오러 유저가 힘을 합쳐 악마 하나를 해치운 다음 바로 다음 놈을 해치우는 것이 더 상황을 빨리 종료시킬 수 있는 길이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필레나가 그를 내궁으로 보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이 보아서는 안 될 부분이니까요.”
필레나는 안개 속, 흐릿하게 비쳐지는 거대한 악마의 실루엣을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를 상대로 광검을 쥔 채 빠르게 움직이는 인간의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비친다.
필레나가 소리를 질렀다.
“테스론! 가방 던질까?”
안개 속에서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이대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하지만 이왕이면 예행연습은 될 거 아냐?”
이어진 필레나의 질문에 청년이 웃음을 흘렸다.
“하핫, 그건 그렇군. 좋아! 던져!”
“응! 테스론!”
필레나가 로브 안쪽을 뒤지더니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네모난 가죽 가방, 그것에 들더니 필레나가 마법을 이용해 안개 속으로 멀리 던졌다.
“받아! 테스론!”
짙은 안개 속으로 네모난 케이스가 휘익 날아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기괴한 금속음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우웅, 위잉, 철컹철컹!
세피아탄의 그림자를 비추는 백색 안개, 그 위로 우람한 거인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거인을 앞에 두고 당황한 악마의 목소리가 안개 너머로 들려왔다.
“크, 크렐?”
거인의 그림자를 통해, 느긋한 청년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역시 뭐든지 연습을 해둬야 몸에 익는 법이지.”
거인의 그림자가 세피아탄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그림자가 겹쳐질 때마다 안개가 붉게 물들며 악마의 형태가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신음과 포효가 연달아 들리며 수풀이 흔들리고 굉음이 흐른다.
쾅! 쾅! 우직! 우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