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1
역시 무인답게 강자를 보니 자극이 되신 모양이군! 에드워드 경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스테반의 얼굴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젊은이가 벌써 오러를 각성했다는 사실이.
“내가, 저런 놈에게 뒤떨어질 리가 없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미천한 혈통이 가능했다면 자신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아냐, 불가능할 리가 없어.”
스테반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세상은 결코 저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는 세상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젊은 오러 능력자의 존재 따윈 있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말을 모는 스테반의 표정이 점점 더 음험해지고 있었다.
☆ ☆ ☆
산길을 걸으며 레펜하르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신 허리춤의 백 팩을 만지는 모습이 아주 신 나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 우리 시리스 만날 일만 남았다!’
돈도 두둑하게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후딱 차탄 공국으로 달려가 사랑하는 님과 재회하는 것뿐이다. 신이 안 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발걸음도 가볍게 레펜하르트가 길을 가는 중이었다. 뒤에서 도도도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바로 누구인지 눈치챘다.
‘이거, 실란이잖아? 얘가 왜 쟤들 안 따라가고 이쪽으로 오지?’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약속한 보상을 받으려면 저쪽을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토드도 지금 못 타는 말 억지로 몰면서 졸졸 알티온 후작가를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닌가?
호기심이 생겨 잠깐 기다리니 아니나 다를까, 곧 길 저편에서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금안의 미소년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뛰어온 실란이 레펜하르트 앞에서 멈추더니 헉헉 숨을 골랐다.
분명해졌다. 그냥 행로가 같은 게 아니라 분명 그를 따라온 것이다.
“뭐냐?”
겨우 숨을 고른 실란이 빙그레 웃더니 대답했다.
“혹시 아세요? 신관들 중에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여신의 은혜를 펼치고 신도를 보살피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지, 순례자잖아?”
레펜하르트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혈기 넘치는 젊은 신관들이 종종 하는 짓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꽤나 죽어 나가고 말이지.’
“저도 원래 이번 일을 마치면 교단에 복귀하지 않고 바로 순례자의 길을 걷기로 했거든요.”
실란이 가슴을 펴고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제가 본 가장 강한 당신과 함께 다니고 싶어서요.”
레펜하르트는 물끄러미 이 예쁘장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느껴온 것이지만 이놈 눈빛 꽤나 요상하다. 뭐, 그냥 별 생각 없이 보면야 강한 무인을 동경하는 10대 소년의 눈초리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좀 다른 것 같고.
뭐랄까, 제라드나 토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왠지 이놈도 다른 의미로 몸밖에 안 보는 부류인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이다.
‘아니, 무슨 저주라도 받았나. 내 주위엔 왜 이런 놈들뿐이야?’
아, 어서 시리스를 만나고 싶다. 사랑스러운 우리 시리스.
어쨌거나 굳이 동행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막 거절을 하려던 찰라, 문득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만, 이 녀석 성직자잖아?’
성직자.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 기적으로써 사람들을 보살피고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을 이끌며 올바른 삶을 유도하는 목회자이자 인도자.
뭐, 대충 정의하자면 저런 것이겠지만 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는 신의 가르침 따위는 별로 믿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성직자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최고급 약통.
병도 상처도 대충 갖다 비비면 싹 낫는 최상급 붕대.
‘생각해 보니 우리 시리스, 데리고 다니다 보면 어디 다치거나 아플 일이 생길 지도 모르잖아? 챙겨 줄 놈 하나 있어서 나쁠 것 없겠는데?’
예전엔 마법이 경지에 이르러 힐링 계열까지 익혔으니 레펜하르트가 직접 치료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있으니 치유 약물과 병행해 비슷한 효과를 낼 수야 있겠다만, 그건 너무 단가가 비싸고.
‘약통 들고 다녀서 손해 볼 건 전혀 없지?’
별 생각 없었는데, 막상 눈앞의 이 소년이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는지 깨닫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레펜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어서 실란이 살짝 경계 어린 눈빛을 보인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짓을 했다.
“마음대로 해라. 따라오든지 말든지.”
승낙한 뒤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실란이 좋아라 옆에 달라붙더니 이것저것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복근을 선명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냥 윗몸일으키기만 해선 힘들더라고요 역시 상복근, 중복근, 하복근을 따로 부하를 줘야 제대로 식스 팩이 윤곽이 생기는 걸까요?”
“몰라, 내가 아는 건 죽도록 맞고 죽도록 바위 드는 것뿐이야.”
걸어오는 말을 대충대충 주워 넘기며 그는 이 골수 근육 마니아 미소년 성직자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자, 어서 가야지. 차탄 공국으로.
‘시리스, 내가 간다!’
“그러고 보니 연금술사 중 누군가가 근육 증강에 특효인 시약을 연금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름을 프로틴이라고 붙였다든가?”
“아, 관심 없다니까?”
구시렁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겨울 석양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제4장 엘븐하임
1
거대한 대리석으로 된 저택, 규모만도 3층 높이에 수많은 별실들이 딸린 그 화려한 저택의 한 침실에서 청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젠장! 아직도 이년 태도가 그대로잖아!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야?”
청년 앞에 무릎 꿇은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쩔쩔매며 변명을 해 댔다.
“죄송합니다, 베레트 도련님! 저도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사내가 이를 갈며 옆을 돌아보았다. 침실 한구석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미모의 엘프 소녀가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청년, 베레트가 보름 전 구매한 슬레이어였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들을 가지고 놀아 본 베레트였지만 슬레이어만큼은 손에 넣지 못했다. 안 그래도 엘프 노예는 다른 노예들에 비해 눈 돌아갈 만큼 비싼데, 슬레이어는 그 엘프 노예들 중에서도 엄청난 고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차탄 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단 카론의 후계자인 베레트였지만 그래도 슬레이어를 구입하는 것은 정말 크게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때마침 슬레이어치곤 이상할 정도로 싼, 평범한 엘프 노예 수준의 매물이 나온 것이다. 너무 싸기에 좀 수상하게 여겨서 물어봤더니, 성격이 너무 까탈스러워서 잘 팔리지 않은 엘프였단다.
그래도 슬레이어답게 전투력도 확실하고 성노로 쓰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여서 그냥 속는 셈 치고 구입했다. 까탈스러운 성격 정도는 직접 교육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엘프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베레트였기에 별 걱정을 하진 않았다. 성격이 까칠해 봤자 노예 아닌가? 명령에만 충실히 복종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막상 사 와 보니, 왜 그리 싼지 바로 이해가 가 버렸다. 이 엘프 소녀는, 기가 세도 너무 셌다.
“아, 저 재수 없는 눈깔…….”
이름도 붙이지 않은 저 슬레이어 소녀를 노려보며 베레트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발가벗은 전신을 얇은 홑이불로 감싼 채 차가운 눈으로 청년을 직시하고 있었다. 무심하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은은한 경멸을 담은 눈초리였다. 그래서 지금도 성질이 뻗쳐서 확 강간해 버리려다 흥이 식은 베레트였다.
이 엘프 소녀가 딱히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놓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엘프 주제에 마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도도한 표정이라니? 엘프라면 당연히 주인께 충성하고 애교를 부리며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비싼 돈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수하를 시켜 ‘교육’도 시도해 보았다. 밥도 굶기고 즉신 두들겨 패기도 했다. 보통 이 정도 하면 어지간히 말 안 듣던 노예라도 금방 꼬리를 내리며 노예다운 모습을 되찾곤 한다.
하지만 이 소녀에겐 교육이 영 효과가 없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사흘을 내리 굶으면서도 도도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뭐, 이대로 시간을 두고 구슬려 천천히 마음을 열게 한다는 선택지도 있기야 하겠다만, 베레트는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연애를 하지 뭐하러 노예를 비싼 돈 주고 사냐?
베레트가 열불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놈의 눈깔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엘프 소녀가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타고난 눈입니다.”
말투는 무심하지만 누가 들어 봐도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엘프 주제에 이년은 도대체 왜 이리 건방진 거야?”
“타고난 성격입니다.”
노예 주제에 주인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데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해 댄다. 울화통이 터져 베레트는 엘프 소녀를 후려갈겼다.
퍼억!
소녀의 가녀린 몸이 고급 양탄자 위를 뒹군다. 하지만 비명은 없다. 입안이 터졌는지 핏물이 흘렀지만, 슥 닦을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베레트를 노려볼 뿐.
“아으…….”
얼굴이 시뻘게진 베레트를 곁에 있던 두 명의 엘프 노예들이 열심히 말렸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저 아이가 너무 어리석어 주인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주인님. 저런 불량품 엘프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저희를 사랑해 주세요.”
둘 다 얇은 천으로 비부만 간신히 가린 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애교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는, ‘바람직한’ 엘프다운 모습을 보이는 두 노예의 태도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후우…….”
베레트가 씩씩대다가 소리를 질렀다.
“집사!”
문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중년인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왔다.
“예, 도련님!”
“저거 반품해 버려. 젠장, 싼 맛에 샀더니 완전 불량품이잖아?”
원래 슬레이어는 가격에 비해서 사실 실질적으로 큰 쓸모는 없다. 성적 노리개의 용도라면 그냥 보통 엘프 노예를 사면 된다. 호위 용도라면 검투사 출신의 오크 투사들을 거두면 된다. 주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미모의 여검사라는 마초적 망상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집사가 쓰러진 엘프 소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내심 안도했다.
‘반품하라 하시는 걸 보면 덮치진 않았나 보군. 다행이다, 돈 굳었네.’
처녀성을 잃은 슬레이어는 반품 불가다. 애초에 남자들의 멍청한 로망 때문에 태어난 직종(?)이다 보니 처녀가 아니면 팔리지도 않는 것이다. 노예상들은 특히나 엘프들의 처녀성에 민감하다. 몰래 덮치고 슬쩍 반품하려는 얌체 손님들이 많다 보니 다들 그쪽 감별안은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서 열이 뻗친 베레트도 결국 이 엘프 소녀를 건드리질 못했다. 아무리 싸게 샀다곤 해도 슬레이어치고 싸단 소리지, 거액인 것은 틀림없었으니까.
“역시 돈 좀 더 보태서라도 제대로 된 걸 사야겠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고개를 숙인 뒤 집사가 엘프 소녀에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너라.”
여전히 냉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이지만, 소녀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집사를 따라갔다.
“…….”
그렇게 차탄 공국 내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에서 148번이라 불리던 이 엘프 소녀는 세 번째 반품을 당하게 되었다.
☆ ☆ ☆
회색빛 도시, 수많은 마차들이 짐을 싣고 오가고 그 사이로 행상들이 어지러이 걸음을 옮긴다. 빽빽하게 세워진 석조 건물들은 모두 1층에 상점을 열고 각종 물건들을 판다. 자신의 상점이 없는 이들도 가판대를 설치하고 호객 행위에 열심이다. 다리, 광장, 거리 할 것 없이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 요란한 거리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두꺼운 코트를 걸친 덩치 좋은 청년, 레펜하르트와 새하얀 법복 차림에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소녀, 사실은 소년인 실란이었다.
“정말 혼잡한 곳이네요.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업 도시라더니…….”
실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들 추위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표정이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거리 전체가 활기로 가득 찼다.
그들은 지금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에 도착해 있었다.
차탄 공국은 세 왕국, 그라임과 크로방스, 바실리 왕국의 접점에서 무역으로 탄생한 나라다. 3개국 교역으로 큰돈을 번 차탄 상회의 주인이 그라임 왕국으로부터 대공의 칭호를 받고 이 땅을 구입, 공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그런 만큼 차탄 공국은 상인들에게 특히나 많은 특혜가 있었다. 등록된 상인에겐 세금도 적게 걷고 영지 통과세도 면제된다. 상업을 국가의 기틀로 내세운 차탄 공국의 수도, 제플린은 상인들에게 있어 꿈의 도시였다. 대륙을 떠도는 행상들의 대부분의 꿈이 바로 이 도시에 자신의 상회를 차리는 것일 정도였다.
“쉽게 말해 돈독 오른 동네란 소리지.”
시큰둥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었다. 하탄 산맥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열흘 정도가 걸렸다. 그 혼자였다면 사흘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실란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짐마차 하나를 얻어 타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걸렸을 것이다.
‘이곳에 시리스가 있다.’
마음이 급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실란이 허겁지겁 뒤따르며 소리쳤다.
“아유, 천천히 좀 가요!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속도를 늦췄다.
비록 실란 때문에 좀 늦어지긴 했어도 그가 있어 득 된 것이 더 많았다. 귀족도 아닌 레펜하르트가 바실리 왕국의 국경을 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용병 길드 같은 곳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확실한 신분이 없으니 국경 경비대가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몰래 밀입국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실란의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