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26
그때였다. 티티마가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틀어 옆구리를 방어했다. 검이 서로 부딪히며 튕겼다.
“쳇, 알아차렸나?”
하지만 티티마의 표정을 보니, 자신도 어떻게 막은 건지 모르는 눈치다.
“엥? 이거 뭐임?”
멀리서 보조하던 실란이 씨익 웃었다.
“좋아, 먹혔어! 다음 간다!”
온갖 다양한 전투를 경험해 본 실란이다. 크리스틴의 검의 흐름만 보고도 그녀가 페인트를 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실란이 검사도 아니니 실제로 노리는 부분이 어디인지까지는 알아챌 수 없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크리스틴이 다시 페인트를 걸며 티티마를 노렸다. 타이밍을 맞춰 실란도 신성 주문을 걸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섬광의 축복을!”
페인트에 티티마가 막 속아 넘어가려는 순간, 전신 감각이 예리해지며 상대의 검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걸 육체가 알아챈다. 미처 티티마가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 진짜 공격을 막아 낸다.
타앙!
적절하게 실란이 그 순간만 티티마의 전신 감각을 고도로 증폭시킨 것이다. 물론 그 상태로를 계속 유지하면 그녀의 신경이 감당할 수 없으니 잠깐, 아주 잠깐 페인트가 걸리는 그 순간만을 노린다!
“진짜 프리스트라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보조해 주는 법!”
티티마가 감탄한 얼굴로 실란을 힐끔거렸다.
“오왕…….”
진짜 신기했다. 자신의 몸이 이토록 날렵하게 움직이다니? 이토록 강인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니? 심지어 상대의 속임수조차도 꿰뚫어 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거 굉장해!’
트롤 주술은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이처럼 남을 강화시켜 주는 경우는 티티마도 처음 겪어 본 것이다. 실란이 고함을 질렀다.
“신성력 아낌없이 퍼 줄 테니까 마음껏 싸워!”
“응! 이거 좋아!”
반쯤 희열에 차 티티마는 계속 크리스틴을 공격했다.
아틸카에게 배웠던, 하지만 기량이 모자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던 온갖 체술이 자연스레 풀려나온다. 게다가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도 않는다!
‘굉장해! 굉장해! 굉장해!’
티티마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토록 이해가 가지 않았던 아틸카의 가르침들이 쏙쏙 머리에 박혀 들고 있었다.
전신이 고무로 된 것처럼 탄력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공세에 크리스틴이 결국 어깨를 허용했다. 티티마의 단검이 그녀의 어깨 근육을 깊숙이 베어 갔다.
“크으윽!”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크리스틴이 이를 갈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진다. 과연 실란의 신성력은 엄청나다.
‘성광검 메사이어를 쓰고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라니…….’
크리스틴이 실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쳤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바람을 피우고 싶나요, 실란?”
그녀의 헛소리는 주야장천 들어 왔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새롭다. 실란이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바람? 뭔 바람?’
갑자기 크리스틴이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이 정도는 이겨 낼 수 있어야 당신 곁에 설 자격이 있다는 거군요!”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더니 두 눈 가득 각오를 담아 소리친다.
“강해질게요!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곤 뒤를 돌더니, 그대로 제플린 거리 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
너무 상황이 황당해서 티티마는 후속타도 안 날리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순간, 상대가 도망간다는 느낌조차 안 들었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신경 꺼, 원래 저래…….”
한숨을 푹 쉬며 실란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번 위기는 간신히 넘겼지만, 나중에 또 이런 일이 터질 걸 생각하니 암담했다. 아, 언제쯤 밤잠 편히 자 볼 수 있으려나?
‘어쨌거나,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는 해야지.’
단검을 도로 허리에 차는 티티마를 보며 실란이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티티마. 덕분에 살았어.”
티티마가 실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얼굴 위로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묘하게 동공이 가늘어지더니 그녀가 실란에게 몸을 날렸다.
“실란! 너 좋아!”
고양이처럼 폴짝 뛰더니, 대뜸 실란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간다.
“에엑?”
이건 또 뭔 소리야? 실란이 당황하며 티티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굽힌 채 정말 고양이처럼 계속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너 좋아! 굉장해!”
‘얘, 왜 이래?’
실란은 몰랐지만, 원래 트롤 소녀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을 경우 이렇게 냄새를 묻혀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얘 옆에 있으면 왠지 주술이 잘돼! 이거 좋아!’
실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지만 티티마는 엄연히 여자아이였다. 그것도 작은 천 조각으로 가슴과 하체만 간신히 가린.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또래 소녀가 계속 몸을 비벼 오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저기…….”
하지만 티티마는 실란이 당황하건 말건 여기 비비적, 저기 비비적.
그렇게 열심히 실란을 자신의 ‘사유물’이라 주장한 뒤에야 티티마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됐다! 이제 이거 내 거!’
간신히 당황을 가라앉히며 실란이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빠져나가자.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들 제플린 떠났겠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티티마가 훌쩍 뛰어올랐다. 한걸음에 건물 옥상까지 올라간 그녀가 아래를 향해 손짓했다.
“자, 실란도 올라와.”
기가 막혀 실란이 입술을 내밀었다.
지금 티티마가 올라간 건물의 높이는 무려 3층.
“……야, 내가 무슨 수로 거길 올라가?”
“엥? 못해?”
“사다리의 존재를 무시하지 마! 보통 사람은 자기 허리 높이까지도 못 뛰는 게 원래 정상이야!”
주위에 워낙 제자리 뛰기 10여 미터쯤 우습게 하는 괴수들이 득실거려서 그렇지, 사실은 날개도 없는 것들이 집이며 성벽 폴짝폴짝 뛰어넘는 게 비정상이다.
“그건 알지만, 실란 넌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티티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 그녀의 능력을 몇 배나 오르게 해 준 실란이 보통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실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원래 프리스트란 게 남 좋은 일만 해 주는 직종이거든.”
성직자의 고귀한 자기희생 정신을 쉽게도 평가 절하하며 실란은 한숨을 쉬었다.
의아해하며 티티마는 다시 땅 위로 내려왔다. 잘은 모르겠지만 못한다니 못하는 거겠지, 뭐.
“그럼 들릴래, 업힐래?”
순간 실란은 감동했다.
이 자상한 배려라니! 이제까지 그를 들고 다닌 것들치고 이런 거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입 달린 보따리 취급하며 대뜸 들고 날랐을 뿐이다.
“아, 왠지 눈물 날 것 같다.”
“……?”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알만 굴리고 있는 티티마를 향해 실란이 손을 벌렸다.
“업어 주라.”
보통 소년이라면 자기 또래 소녀에게 업혀 가는 것에 수치를 느낄 법도 했겠다. 하지만 실란은 그 정도로 수치를 느끼기엔 너무 잦은 ‘들림’을 당한 것이다. 이제 와서 업혀 가는 것 정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응!”
티티마가 실란을 업고 다시 몸을 날렸다.
과연 아틸카의 수제자, 실란을 업고도 움직임이 전혀 둔해진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업혀 가는 주제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지라 실란이 다시 신성 주문을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을 보살피사 산양처럼 끝없이 뛰게 하소서!”
분홍빛 성광이 티티마의 전신을 감싸며 놀라운 활력을 가져다준다. 티티마가 환하게 웃었다.
“와아, 역시 이거 신기해.”
폴짝! 폴짝! 폴짝!
실란을 업은 티티마가 개구리처럼 건물을 뛰어넘으며 제플린의 새벽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3
차탄 공국 북부의 콜른 협곡.
제플린으로부터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곳은, 수백 미터 높이의 좌우 절벽이 10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협곡이었다. 차탄 공국 북부부터 크로방스 왕국 동부의 가란 평야까지 연결되며 한때는 크로방스로 향하는 주요 교역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탄 공국이 생기고 따로 정규 도로를 설치하게 되자, 현재는 인적이 완전히 끊겨 가끔 밀수꾼들만이 몰래 드나들 뿐인 불모지가 되어 있었다.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커다란 어금니를 지닌 근육질의 트롤이 아래를 바라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렇게 모여 있으니 실로 장관이로군.”
인적 없는 거친 황야만이 펼쳐져 있던 협곡 어귀에 지금 수천이 넘는 대규모 인파가 모여 있었다. 제플린에서 탈주한 이종족 노예들과 그들을 구출한 안타레스 백국의 정예들이었다.
비록 계절은 한여름이었지만 차탄 공국이 워낙 대륙 북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다. 수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수백 개의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몸을 녹이며 밤새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달랜다. 허름하나마 천막을 치고 임시 거처를 꾸며 체력이 약한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도 있다. 나눠 준 비상식량을 불에 올려놓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 자들도 보인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하나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들뜬 표정들이었다.
어금니를 매만지며 아틸카가 눈을 빛냈다.
‘얼추 셈해 보니, 다들 합류한 듯하군.’
이 콜른 협곡 입구가 바로 ‘안타레스 백국 동족 해방군’이 제플린 탈주 후 합류하기로 정한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일단 진열을 정비한 뒤 협곡을 통해 크로방스 왕국으로 탈출, 거기서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하는 것이 카를이 세운 도주 경로였다.
소규모로 이종족들을 구출할 때야 다이만 던전의 공간 포털 터미널을 이용했지만, 구해야 할 숫자가 수천 단위가 되면 그쪽 경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온갖 몬스터들이 대거 출몰하는 세텔라드 산맥, 그중에서도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을 정도의 험지 중 험지가 바로 다이만 던전이다. 수천 명을 이끌고 갈 수 있을 장소면 그게 험지냐? 관광지지. 당연히 정상적인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틸카가 등 뒤로 손짓을 했다.
“갑시다, 형제들이여.”
백여 명 정도 되는 트롤들이 그의 인도에 따라 절벽 틈새의 소로小路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두 제플린의 연금술사 길드에 붙잡혀 있던 이들이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 어지간한 성벽 대여섯 배에 달하는 장대한 지형이다 보니 내려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트롤들조차도 한참 후에야 아래쪽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
아틸카와 트롤들을 보며 노예 출신 이종족들이 신기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 트롤이다.”
“아, 저들도 있다고 했지, 참.”
인간 밑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겐 트롤의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개중에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며 화들짝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트, 트롤은 몬스터인데!”
“정신 차려요. 인간이 한 말을 아직까지 믿고 있으면 어째요? 트롤이 몬스터면 우리도 여전히 노예게요?”
“어, 그런가…….”
엘프 여인의 타박에 오크 사내가 머리를 긁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며 아틸카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많이 변하긴 했군. 예전 같았으면 저렇게 편들어 주는 이들조차 없었을 텐데.’
아틸카는 구출한 트롤들을 데리고 협곡 한쪽 귀퉁이로 향했다.
다른 종족과 달리 트롤은 워낙 몸이 튼튼해, 굳이 모닥불을 피우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한 공터에 모여 주저앉는 것으로 충분했다.
트롤들을 쉬게 한 뒤 아틸카가 함께 온 트롤을 불렀다.
“이들을 부탁하네, 구루 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