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28
“아, 쟤 티티마라고 하는데요. 크리스틴한테 잡혔을 때 저 구해 준 애예요. 몰라요, 러스 경? 아틸카 씨의 후계자라던데?”
러스가 눈을 껌뻑거렸다.
“으음, 전에 아틸카 공 만났을 때 옆에 작은 트롤 하나 있는 것은 봤었는데…… 솔직히 모르겠다. 트롤들은 아직 통 구별이 안 가서.”
“오러 유저씩이나 되면서 그 정도 눈썰미도 없어요?”
“구별 못 한다는 건 아냐. 구별은 가. 단지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것뿐이지.”
드워프와는 다른 의미로, 트롤들은 인간의 눈으로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드워프처럼 서로 비슷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달라서 구별이 힘든 것이다.
모든 트롤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의 문신과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다. 구루쯤 되면 그 정도가 더하다.
“다른 줄은 알겠는데, 너무 복잡해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형이상학적인 그림 두 개를 걸어 놓으면 누구나 쉽게 구별은 한다. 하지만 따로 한 개씩 걸어 놓고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보면 어지간히 익숙하지 않은 경우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티티마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러스에게 다가왔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사이러스 님. 아틸카님의 파구루, 티티마라고 합니다……만 저, 자기소개한 것 벌써 이걸로 세 번째인데요?”
“……미안하다.”
어색해하며 러스가 뒷목을 벅벅 긁었다. 그때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러스, 실란. 지금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모두 합류했으니 슬슬 다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레펜하르트가 홀로 인파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러스와 실란이 머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출한 이종족 노예들의 인솔은 시리스며 마켈린, 타시드 등 각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맡고 있었지만 인간인 러스와 실란에게도 임무는 있었다. 이 수많은 인파를 먹일 식량과 이동하며 쓸 피복류 등을 실은 수십 대의 우마차를 관리,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아, 알아요. 안 그래도 준비하려고 했다고요.”
“바로 움직일 겁니다, 형님.”
러스와 실란이 허겁지겁 우마차가 줄지어 선 쪽으로 향했다. 그 우마차 대열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럼, 슬슬 거래를 끝마치러 가야겠군.”
☆ ☆ ☆
제플린으로부터 탈주한 이종족 노예의 숫자는 가히 수천을 넘어 일만에 육박하고 있다. 여기에 안타레스 백국의 병력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더욱 늘어난다.
이 정도 숫자라면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단순히 구출했다고 끝이 아니다. 이들을 무사히 안타레스 백국까지 데리고 가는 동안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대량의 물품을 준비한 30대 중반의 인간 사내, 타오반 상회의 회주 시볼트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대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 과업도 불가능했을 터, 모든 종족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시볼트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저 상인으로서 행동했을 뿐입니다.”
레펜하르트에게 서류를 내밀며 그가 말을 이었다.
“모든 물품을 전달했습니다. 자, 여기 사인을.”
물품 목록은 이미 수하들을 시켜 확인을 끝낸 후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깃털 펫을 꺼내 시원한 필치로 사인을 마쳤다.
사인을 교환한 뒤 각자 서류를 품에 넣는 걸로 거래가 끝났다. 돌아가려는 시볼트를 보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의뢰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용케도 이 거래를 승낙하셨더군요.”
물품을 싣고 온 타오반 상회의 다른 멤버들은 아직도 저 이종족 인파를 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 거래를 행하는 것은 사실 차탄 공국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다. 시볼트가 회주로서 인망이 깊고 수하들에 대한 대우도 훌륭했기에 다들 따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걱정마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수하들을 보며 시볼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저도 고민을 좀 하기는 했습니다.”
레펜하르트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작전의 개요를 알리고 필요한 물품 조달을 의뢰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시볼트는 사흘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안타레스 백국이 제플린을 도모한다는 것은 전쟁이나 다름없는 큰 사건이었다.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상회에 이득이 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볼트가 안정을 추구하는 중소 상인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거절했겠지.
하지만 그는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대상인을 꿈꾸는 자였다.
대상인이 되려면, 돈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도 민감해야 하는 법이고 권력자와의 관계 역시 돈독해야 한다.
그리고 타오반 상회가 이토록 성장한 것에는 역시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가 제일 크다.
“백왕님은 저희 상회 최대의 고객, 위험이 크다지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끈이 아니지요.”
원래 시볼트는 이종족 노예 제도를 딱히 반대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무심했달까? 그냥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 그런가 보다 하고 남들처럼 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노예 제도를 반대하면 레펜하르트라는 유수의 권력자와 수많은 오러 유저, 그리고 안타레스 백국이라는 나라 하나를 등에 업을 수 있다.
반면, 찬성하게 되면 그냥 차탄 공국의 흔한 상인의 하나로 남을 뿐인 것이다.
“솔직히 백왕님이 틀린 말 하시는 것 같지도 않았고요.”
안타레스 백국을 세운 이후, 레펜하르트는 주 거래처로 계속 타오반 상회를 이용했다. 그래서 안타레스 백국과의 거래를 통해 시볼트도 수많은 자유로운 이종족들을 보아 왔다.
딱히 레펜하르트의 이종족 해방 사상에 감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틀린 말을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이런 저런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사실 시볼트는 레펜하르트라는 인물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레펜하르트는 신용할 만한 거래 상대였고 남을 배신할 이가 아니었다. 사실 장사를 할 때 신뢰와 금액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다.
“문제는 과연 백왕님께서 성공하시느냐였는데…….”
시볼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보기엔 도무지 백왕님께서 실패할 것 같지가 않더군요.”
작전 자체야 시볼트도 모르니 그게 치밀한지 아닌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레펜하르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 어떤 굉장한 용자들이 모여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재어 보니, 레펜하르트가 제플린 공략을 도모한다면 현재 차탄 공국으로는 도저히 그를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백왕님의 저 제플린 해방 작전이 현실성이 없었다면 저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정보 들고 차탄 왕국으로 달려가 보상금 타 먹었을 지도 모르지요.”
“그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정보를 알린 거였소만?”
“하긴, 그건 그렇군요.”
시볼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상인에게 있어 거래 상대의 신용은 필수 요소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저렇게 행동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저는 백왕님을 믿고 판돈을 걸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지요.”
“그거 다행이군요.”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그는 시볼트가 단순히 백국과의 거래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정도로 큰 이득을 보았다고 할 리는 없으니까.
이 난리를 미리 알고 있던 시볼트는 백국이 원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한편, 다른 쪽으로도 바삐 움직였다.
제플린의 각 노예상인들에게 엄청난 숫자의 노예를 구입하기로 선 계약을 한 것이다. 거래 대금을 환어음을 통한 후불제로 처리하고, 거래가 깨질 경우 대륙 각국에 흩어져 있는 노예상들의 토지를 담보로 맡았다. 타오반 상회의 가용 액수를 넘어서는 액수였기에 만약 레펜하르트가 실패하기라도 했다면 바로 타오반 상회는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볼트는 레펜하르트를 믿었다. 크로방스 대흉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의 믿음은 훌륭히 보상받았다.
이제 시볼트에게 지불할 노예가 없으니 제플린의 노예상들은 토지로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덕분에 타오반 상회는 한 방에 대륙 전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상회가 되어 버렸다.
“뭐, 상인의 도리에는 어긋나는 방법이지만, 어차피 제플린의 노예상들은 항시 하던 짓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수법에 자신들이 당했으니 자업자득이지요.”
레펜하르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하지만 이 일로 더 이상 차탄 공국에 머무르기는 힘드실 텐데 달리 생각해둔 것은 있소?”
시볼트가 차분히 대답했다.
“안 그래도 슬슬 이쪽 상회를 정리하고 차탄을 떠날 생각입니다.”
어차피 차탄의 상단 대부분은 국경을 넘나드는 무국적 집단에 가깝다. 타오반 상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플린에 타오반 본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플린이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 도시이기 때문일 뿐, 시볼트가 무슨 차탄 공국에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그는 차탄이 아닌 라스틸 공국 출신이기도 했고.
넙죽 허리를 숙이며 시볼트가 정중히 말을 건넸다.
“앞으로는 크로방스 왕국에 자리를 잡을까 합니다. 백왕님께서 많이 보살펴 주시길 기대하고 있지요.”
크로방스의 현 국왕, 유벨 2세가 안타레스의 백왕을 얼마나 총애하는지는 대륙의 상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총애라기보다는 신뢰하는 동료에 가깝겠지만.
레펜하르트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돕겠소.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득일 테니.”
상대의 대답에 시볼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자고로 돈이란 벌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는 더 힘든 법,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호가 된 그인 만큼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강한 뒷배경은 필수다. 그런 면에서 안타레스 백국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배경이었다.
뭐, 이러다가 안타레스 백국 날아가면 타오반 상회도 같이 날아가겠지만…….
‘이 정도 판돈을 건 도박인데 그 정도 리스크야 당연히 감수해야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볼트의 수하들이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상황을 점검한 뒤 시볼트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도 꾸준한 거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왕님. 저희 타오반 상회는 언제나 신뢰와 친절로 고객님께 봉사합니다.”
참으로 철저한 상인의 모습이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오.”
떠나가는 시볼트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토록 자신을 신뢰해 주니 참 고맙기도 하고, 또 그만큼 가슴이 무겁기도 했다.
이러다 그와 안타레스 백국에게 무슨 일 생기면 시볼트며 저들의 운명도 좋게 흐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쩌면 마왕의 주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화형이라도 당할지도 모르지.
‘아니, 이번엔 그래도 마왕 소리는 안 듣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으려나?’
어쨌건 새삼 자신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올라가 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아, 진짜 저들도 제대로 보답받고 잘살게 해 주어야 할 텐데…….”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막사 쪽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콜른 협곡 너머 황야에서 기마 3기가 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말을 몰고 있는 것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세 명의 오크, 정찰을 위해 협곡 너머로 향했던 탈카타와 검투사 출신 오크들이었다.
“백왕님!”
허겁지겁 말을 달린 탈카타가 굴러떨어지듯 말에서 내려 레펜하르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이 들었음에도 결코 노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 용맹한 오크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탈카타의 얼굴에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슨 일인가, 탈카타?”
부복한 채 탈카타가 정신없이 소리쳤다.
“인간의 군대입니다! 제플린에서 추격대를 보낸 것 같습니다!”
4
지평선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대지가 지진이라도 난 듯 연신 요동을 친다.
수천의 군세가 콜른 협곡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뒤늦게 움직인 제플린의 정규군과 그들을 이끄는 차탄의 왕궁 기사단, 그리고 제플린 나이츠들이었다.
도시 방어 따윈 생각도 안 했는지 아예 전력을 전부 끌고 나온 것이다. 차탄 공국의 귀족층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명백히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제플린의 군세 너머로 서서히 커다란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가파른 좌우 절벽, 그 사이로 검고 깊은 대지의 틈이 입을 벌린다. 아직 아침이라 절벽 위쪽은 여전히 밤안개가 끼어 흐릿하다. 그 아래 모여 있는 수천 명의 이종족 무리가 점차 시야에 들어온다.
군대의 선두에 선 커다란 흑마를 탄 붉은 갑옷의 기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차탄 최강의 검사로 칭송받는 오러 유저, 클라트 경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진군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히히힝!
클라트 경은 말을 멈춰 세웠다. 흑마가 투레질을 하며 바닥을 벅벅 긁었다.
곁에 있던 부관이 협곡 어귀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흥, 멀리 도망가지도 못할 놈들이 무슨 이런 어이없는 짓을…….”
하지만 클라트 경은 부관처럼 속 편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노예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침착해 보이는군.”
저들도 눈이 있는데 제플린의 군대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도망친 노예들이 인간의 군대를 만났으니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날뛰어야 정상일 터다. 그런데 의외로 다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