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32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 행정부는 용케도 이 모든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새롭게 들인 부하들 덕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베이드입니다, 카를 재상님.”
“들어오시오.”
집무실 문이 열리며 50대 중년인 한 명이 한 무더기 서류를 들고 방 안에 들어섰다.
“각 종족 동맹들에게서 올라온 추가 보고 정리입니다.”
“어디 봅시다.”
서류를 간략히 검토한 뒤 카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처리했군. 수고했소. 다른 이들에게도 치하한다고 전해 주시오, 베이드.”
베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받은 은혜가 그토록 큰데 어찌 이 정도로 칭찬을 바라겠습니까?”
현재 카를은 휘하에 기존의 엘프 비서 말고도 서른 명 정도의 ‘제대로 된’ 행정관을 두고 있었다. 모두 크로방스 왕국 남부, 체타스 남작령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갈린 남작과 손잡고 일으킨 영지전에 의해 완전히 몰락해 버린 체타스 남작가.
크로방스 왕국의 유력 귀족으로 넓은 영지와 교역 도시 자루드를 다스리고 있던 체타스 남작가는 그만큼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의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작가가 몰락하며 일제히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그때 카를은 그들 중 인재를 추려 안타레스 백국의 관료 지위를 주고 고용했다. 혈통제 사회 대부분이 그렇듯 실력이 있음에도 뒷배가 없어 하찮은 일만 하는 이들의 숫자가 꽤 되었다.
능력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던 이들이 일국의 행정 중추에 앉게 되었으니, 다들 감격하여 충심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눈앞의 중년인, 베이드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재상님.”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뒤 베이드가 다시 밖으로 향했다. 카를도 계속 업무에 열중했다.
마지막 한 장을 검토하고 최종 사인을 한 뒤 기지개를 켠다.
“아으, 간신히 끝났군. 이제 운동 좀 할 수 있으려나?”
한차례의 서류 폭풍이 지나가고 겨우 막간의 휴식 시간이 다가왔다. 카를이 숨을 돌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때 또다시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저기, 재상님.”
카를의 전속 비서, 플로라였다. 원래는 레펜하르트의 비서였지만 대부분의 행정 업무가 카를에게로 옮겨진 지금은 재상의 전속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플로라?”
“백왕님께서 부르십니다. 크로방스 왕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는군요.”
“……조금의 쉴 틈도 안 주는군.”
카를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라가 재빨리 다가와 외투를 건넸다. 고상한 무늬를 수놓은 정례복이었다. 사절단을 만나야 하니 격식에 맞는 의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복을 걸치며 카를이 물었다.
“누가 인솔하고 있다던가?”
“라로스 백작이라고 하던데요.”
“윽? 라로스 백작?”
순간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 양반, 나랑 구면인데…….”
라로스 백작은 카를이 카르사스이던 시절, 페르난도 가문을 몇 번이나 찾은 크로방스의 고위 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 온 잘 아는 인물이란 소리다.
기운 없는 음성을 흘리며 카를이 뺨을 긁었다.
“이거 들키지 않으려나?”
한때 레펜하르트가 그에게 걸어 주었던 인상 왜곡 마법은 현재 풀려 있는 상태였다.
마법은 신성 주문과 달리 마력 없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화려한 금발이던 수염과 머리는 염색약으로 검게 물들여 놓았지만 이목구비나 눈동자 등은 다시 카르사스이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리 유벨 2세가 레펜하르트를 총애한다지만, 왕위 찬탈을 노린 반역자를 살려 두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절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으음…….”
그냥 만나지 말고 레펜하르트에게 전부 맡길까 고민하는 카를의 모습에 플로라가 실소를 흘렸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재상님.”
사실 현재 카를에게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일단 덥수룩한 수염만으로 얼굴 대부분이 충분히 가려진다. 게다가 그동안 틸라 취향 맞추느라 과하게 근육을 키운 덕택에 체구는 물론이고 인상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아무리 외모 변환 마법이 풀렸다지만, 현재 카를을 보고 왕년의 날렵하던 미남 기사 카르사스를 떠올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재상님 어머님이 살아 돌아오셔도 과연 알아볼지 아닐지 의문인 판인데요?”
“으음, 그런가?”
여전한 부분이 있다면 눈 정도? 바다처럼 푸르고 청명한 눈동자만이 그가 카르사스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뭐, 걱정 없겠군.”
이야기 중에는 눈빛만 보고도 ‘아니! 당신은!’ 하면서 변장한 사람 척척 알아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이야기다.
눈빛만 봐도 사람을 알아봐? 그게 가능하면 복면강도는 왜 생겼겠는가? 부모나 연인 정도 되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지인 정도면 어림없는 소리지.
카를이 안심하며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그럼 알현실로 가겠다. 집무실 뒷정리 좀 부탁해, 플로라.”
“네, 재상님.”
☆ ☆ ☆
안타레스 백왕성, 알현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정갈하게 꾸며진 그 방에서 거구의 근육질 사내와, 그보다 더 거구의 근육질 사내 두 명이 삐쩍 마른 50대 중년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타레스의 재상 카를과 백왕 레펜하르트였다.
“크로방스의 라로스가 안타레스의 군주를 뵙습니다.”
빛바랜 금발 머리를 숙이며 라로스 백작은 레펜하르트에게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같은 백작위를 지니고 있다지만 그와 레펜하르트는 결코 동격이 아니다. 차탄이나 라스틸 공국의 공왕에게 같은 공작위를 지녔다고 맞먹으려는 이는 없다. 당연히 일국의 왕을 대하는 예법을 갖추는 것이 예의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비주얼부터가 저절로 무릎을 꿇게 만들지만.
팔뚝이 자기 허벅지보다 더 굵은 사람이 눈앞에 둘이나 있는데도 건방을 떨려면 어지간히 생각이 짧지 않고는 힘든 일인 것이다.
‘백왕님이야 원래 유명하지만 대체 저 재상은 뭐 하던 양반이지? 대체 행정 일 하는데 저런 몸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카를을 힐끔거리며 라로스가 딴생각을 할 때였다.
레펜하르트가 일어서라며 손짓을 했다.
“안타레스에 잘 왔네, 라로스 백작. 폐하께서는 안녕하신가?”
흠칫 라로스가 정신을 차리고 품속에서 국왕의 편지를 꺼냈다.
“예,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지만 젊으신 터라 건강이 상하진 않으셨습니다. 여기 서찰을…….”
서신을 받아 들고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읽어갔다.
시종관의 잔소리가 격했는지 서신이 온통 국왕다운 품위와 고상, 우아함으로 포장되어 있긴 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차탄 공국 꼴 보기 싫었는데 참 잘했음.
앞으로도 차탄 공국 엿 먹일 일 생기면 연락 바람.
열심히 도와주겠음.
라로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첨언했다.
“폐하께서는 백왕님의 이번 행보에 크게 만족하고 계십니다.”
역사적으로 크로방스 왕국과 차탄 공국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크로방스 왕국과 상업이 주인 차탄 공국, 쉽게 말해 두 나라의 관계는 1차 생산자인 농민과 물건 떼어 가는 2차 도매상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매상이 양심적이라면 그 무엇보다 좋은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차탄 공국이 비양심으로 무장한 것은 온 대륙이 다 안다. 중간에서 온갖 폭리 취하는 저 나라를 크로방스 왕국이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 정권에 들어서는 완전히 적대 관계로까지 되어 있었다.
유벨 2세와 왕위를 두고 다투다 패한 카르사스 공자 일파는 현재 차탄 공국에 망명한 상태였다.
유벨 2세뿐 아니라 새로이 권력을 잡은 모든 신흥 귀족들에게 저 망명 귀족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크로방스 왕국은 그동안 몇 번이나 차탄 공국에 서신을 보냈고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분노를 곱씹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플린 해방 작전을 위해 안타레스 백국에서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반대하는 크로방스의 귀족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저 간악한 차탄 공국에 엿을 먹일 수 있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듯 보이는 레펜하르트의 행보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미 크로방스 왕국은 이종족을 자유인처럼 대하는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 번 허용한 것인데 두 번 못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서찰을 모두 읽은 뒤 레펜하르트가 말을 건넸다.
“폐하께 안타레스 백국이 호의에 감사한다고 전해 드리게.”
“예, 백왕님.”
“아, 차탄 공국 쪽 반응은 어떤가?”
“당연히 길길이 날뛰고 있지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라로스가 미소를 띠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사태에 대한 차탄 공국의 분노는 실로 엄청났다.
수도 제플린을 침범당한 데다가 왕궁이 농락당했고 막대한 재물을 빼앗겼으며 그 와중에 상당한 피해도 입었다. 실로 국치國恥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극도로 흥분하며 차탄의 공왕, 나틴 2세는 바로 성명을 발표했다.
일국의 왕인 주제에 야만스러운 무뢰배나 도적처럼 제플린을 습격한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비난, 그리고 그를 묵인할 뿐 아니라 탈취한 노예들을 안타레스 백국까지 이송할 수 있게 길을 내어 준 크로방스 왕국에 대한 성토였다.
당장 빼앗아 간 노예들을 내놓고, 피해 액수를 보상하며,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노라며 엄포를 놓았다.
“물론 가뿐히 무시했습니다만.”
라로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크로방스 왕국도 상당히 대처에 걱정을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틴 2세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긴 했지만, 사실 지금 차탄 공국은 감히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권왕 레펜하르트와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이 벌인 일로 인해 차탄 공국이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수천에 달하는 제플린의 노예들을 빼앗았으며 일국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무수한 병력을 학살했다.
이것만으로도 차탄 공국의 피해액은 천문학적인 숫자, 하지만 가장 심각한 피해는 역시 콜른 협곡 사건이었다. 일국의 지형 자체를 바꿔 버린 그 위업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차탄 공국의 최강 전력, 제플린 나이츠가 모조리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기사단이라면 설사 주력이 전멸했다 한들 어떻게든 재기할 구석이 있다. 이름 있는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은퇴나 죽음을 대비해 종자를 두어 후계를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리고 제플린 나이츠 역시 만일을 대비해 자신의 후계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제플린 나이츠가 마검사 집단이라는 점이었다.
제플린 나이츠의 후계자들도 다른 기사단처럼 충실히 기술과 역량을 키운다. 하지만 그것은 마도구를 다루는 기술과 역량이다. 그런데 현재 제플린 나이츠는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무너진 콜른 협곡, 그 절벽 아래 깔려 죽었다.
단순히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보기 드문 아티팩트, 혹은 그에 맞먹는 최고위 마갑과 마검으로 무장한 제플린 나이츠였다. 그들의 모든 무구가 수천만 톤의 돌산 아래 묻혀 버린 것이다.
인간 후계자는 키우면 되지만 사용하던 마도구는 다시 만들기 어렵다. 아무리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다 하더라도 제플린 나이츠가 쓰던 수준의 마갑과 마검을 다시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원래 제플린 나이츠의 마도구를 다시 되찾으려니, 산 하나를 통째로 파내야 할 지경이다. 어느 쪽이건, 10~20년 단위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상업으로 이름 높던 차탄의 경제 역시 크게 흔들렸다.
노예 매매는 차탄의 경제를 책임지는 주 품목 중 하나, 공국을 버티던 다리 하나가 분질러지니 그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자고로 경제란 모든 면에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법이다. 무수한 노예상들이 망해 버리니 그와 거래하고 있던 다른 상인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며 무너져 갔다.
막대한 액수의 환어음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 버리고 그로 인해 망한 상인들이 대거 차탄을 떠나 버렸다. 상업의 나라로 명성 높았던 차탄 공국에는 실로 막대한 타격이었다.
차탄 공국이 이 정도로 무너질 만큼 허약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국력이 크게 깎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대흉년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전통의 대국 크로방스와, 이미 강력한 군사력을 증명한 신흥 세력 안타레스는 현재 차탄 공국으로는 상대하기 벅차다.
“오히려 일부 호전적인 귀족 중엔 차탄 공국이 쳐들어와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폐하께서도 은근히 그런 눈치이신 듯하고요.”
원래 사절로 오는 이들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각국의 정세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확언을 하지 않는다. 그런 라로스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유벨 2세가 전쟁에 뜻이 있음이 확실하단 소리다.
라로스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안타레스의 그 강력한 전사들을 전장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레펜하르트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것이오.”
환하게 웃으며 라로스가 고개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