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33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 ☆ ☆
라로스가 물러가자 알현실에는 레펜하르트와 카를만 남게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카를을 돌아보며 물었다.
“흐음, 저 정도면 크로방스 왕국은 믿을 만한 동맹이라고 봐도 되겠지?”
“예. 대부분의 크로방스 귀족들은 안타레스 백국에 호의적입니다.”
내전 때의 일로 인해 이종족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 크로방스 귀족들은 계속 안타레스의 소문을 듣고 지내며 점점 더 생각을 바꿔 갔다.
눈으로 보이는 변화.
그리고 뒤에서 피나게 노력했던 안타레스 백국―정확히는 카를―의 로비와 여론 조작.
그 덕분에 예전에는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했던 이들이, 조금 지나자 그럴 법도 하다고 말을 바꿨고, 지금 와서는 실로 선구자라며 칭송하는 자까지도 나타났다.
뭐, 칭송까진 아니더라도 레펜하르트를 적대하고 싶어 하는 이는 확실히 없었다.
많은 귀족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있던 갈린 남작이 그의 도움으로 유력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다 보니 영지 내 노예들을 해방시켜 안타레스 백국으로 보내 레펜하르트와 친분을 돈독히 하려는 자들도 제법 생겨났다. 저 당대의 권왕과 교분을 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는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 본인도 일부러 그런 뉘앙스를 열심히 풍겼다.)
아직 크로방스의 국법이 이종족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기에 겉보기로는 그냥 노예를 무상으로 제공한 것처럼 꾸미긴 했지만 적어도 레펜하르트의 사상 자체는 이해하고 행하는 행동이었다.
적어도 예전처럼, 레펜하르트가 ‘이들은 내 노예가 아니라 동맹이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에이, 아까워서 안 팔려고 그러죠? 웃돈 줄 테니 노예 파세요.’라고 마이동풍 놀이를 하는 수준은 지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왕이 우리 편이잖습니까? 유벨 녀석, 장가가고 싶어서라도 철통같이 백왕님을 지지할 겁니다. 배신할 리가 없죠.”
말하다 말고 문득 카를이 키득거렸다.
“생각해 보니 불쌍하군요, 유벨도. 이긴 그 녀석은 아직도 사랑하는 이와 당당히 결합할 수 없는데 패배한 저는 속 편하게 틸라와 사귀고 있으니.”
놀리는 카를의 어조에 레펜하르트도 농조로 말을 받았다.
“에이, 자네도 아직 결혼은 못 하지 않나? 장인이 허락을 안 한다며?”
카를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드워프 고집이 명불허전이긴 하더군요.”
그리고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3년이면 됩니다. 3년 안에 그분이 허락하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만만한 카를의 얼굴에 레펜하르트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카를은 제플린 공략법을 짤 때의 그 책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인간이 대체 무슨 뒷공작을 벌이려고 저런 표정이다냐?
“……되도록 인도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허락하게 만들길 바라네.”
“에이, 틸라 양의 아버님인데 저도 그렇게 악랄한 방법은 별로 안 씁니다.”
별로 안 쓴단 소리는, 어쩌다가 쓸 수도 있단 소리 아닌가? 레펜하르트는 황당해하며 카를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시선을 뗐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잘하겠지.’
“음, 어쨌건 차탄 공국은 됐고…… 다른 나라의 반응은 어떤가?”
농조를 거두며 카를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잘 처리되었습니다.”
2
대륙 북서부를 지배하는 그라임 왕국의 수도, 템페라드.
왕성 델 그라임의 그랜드 홀에서 40대의 장년 사내가 왕좌에 앉아 신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현 그라임 왕국의 국왕, 하이드 엘 그라임 2세였다.
왕좌 좌우로 도열한 신하들, 그 앞에 한 중년 귀족이 부복하고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로 갔던 페론 자작이었다.
“신臣 페론, 폐하의 은혜에 힘입어 무사히 명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왕좌에 앉은 채 하이드 2세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페론 자작.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은 어떻던가?”
권왕 레펜하르트의 제플린 습격 전쟁은 차탄 공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 역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플린 습격전이 단순한 침략 전쟁이었다면 그건 차탄과 안타레스, 양국 간의 문제니 그냥 상황이나 좀 경계 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이종족 노예 제도에 반기를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해도 대륙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피해 규모가 적고 증거가 없다 뿐이지, 그동안 안타레스 백국에 이종족 노예들을 탈취당한 것은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인 입장이다. 제플린의 참변이 언제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라임 왕국은 물론이고 할라인, 바실리, 테이칸 왕국 등의 대국이 저마다 안타레스 백국에 사절을 보내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라스틸 공국 등 대국들 사이의 소규모 국가들도 정세를 파악하려 한껏 백국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각국의 요구 사항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차탄 공국처럼 적대적인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권왕의 무도함과 국가 간의 도리를 어긴 그 전쟁에 대해 비난을 성토했다. 대륙의 질서를 위해 훔쳐 간 노예들을 차탄 공국에 돌려주고 이종족 노예 제도를 부활시켜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레펜하르트를 알현했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페론 자작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평판과 달리 안타레스의 백왕은 말이 통하는 자더군요.”
안타레스 백국은 다른 나라의 사절들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각국의 요구 역시 성심껏 듣는 자세를 보였다. 차탄 공국의 사절을 문전박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태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차탄 공국을 도모한 것은 어디까지나 백국의 국민들, 그 가족과 친지 들이 제플린에서 너무도 고통받고 살았기에 행한 일일 뿐이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륙 각국의 노예 탈주 행위에 대해서는 백국과 전혀 무관하며,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내정 간섭이니 수용할 수 없으나, 각국의 우려 역시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안타레스 백국은 향후 더 이상 이런 사태는 벌이지 않겠다. 안타레스 백국은 침략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대륙의 질서를 존중한다. 차탄 공국 외 다른 나라에 안타레스 백국이 발을 디디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뭐, 잘 보면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는 대답이긴 했다. 요약하자면, 차탄 공국 습격한 일은 전혀 반성하지 않지만 다른 나라의 입장은 존중하겠다 정도?
하지만 이 정도면 다른 왕국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적대 관계는 차탄 공국 하나에 국한하고, 다른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안타레스 백국이 힘없는 나라도 아니고, 군사력만 따지면 다른 왕국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런 나라가 저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국가 간 관계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자세를 취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안타레스 백국이 준비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들여보내라!”
페론 자작이 손뼉을 쳤다. 홀 안으로 왕실 시종이 커다란 궤짝 몇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하이드 2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것은 무언가?”
“권왕 레펜하르트가 폐하께 보내는 예물이옵니다.”
페론 자작이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궤짝을 열고 물러섰다. 궤짝마다 화려한 옷감과 고급스러운 가죽 물품들, 그리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도자기며 미스릴제 무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신하들이 놀라 중얼거렸다.
“허어, 대단한 보물들이로다.”
마치 달빛으로 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운 빛을 자랑하는 옷감들은 그 유명한 할라인산 비단을 크게 능가해, 귀족인 그들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죽 제품들도 대단히 고급스러웠고 특히나 도자기들은 처음 보는 예술적인 무늬를 뽐내고 있어 실로 보기 드문 명장의 작품으로 보였다. 미스릴제 무기야 이미 그 가치가 정평이 난 것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금은보화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페론 자작이 궤짝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록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물의를 일으킨 점, 이웃된 이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우정의 증표로 보내는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흡족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런 물건들을 구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을 들였어야 할 터, 역시 천하의 권왕이라도 폐하의 위명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도열해 있던 다른 신하도 입을 열었다.
“과연 주먹패 출신답군. 기분대로 일 터트렸다가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야.”
아무래도 다들, 레펜하르트가 뒷생각 없이 저질렀다가 혼이 나자 몸을 사리고 있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물론 상식적인 평범한 국왕이라면 어찌 일국의 행사를 그렇게 가벼이 할 수 있겠냐마는…….
“원래 그런 무문 아닌가, 그곳은.”
“짐 언브레이커블이면 그럴 만도 하지.”
“그 작자들 무식한 게 뭐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식 전설은 레펜하르트의 진의를 감추는 데 지대한 공을 하고 있었다.
늙은 신하 한 명이 하이드 2세에게 발언했다.
“과연 명성다운 무식한 행보이나, 앞으로 단단히 확답을 받았으니 더 이상의 분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저대로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그자가 적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 양국의 문제이니 굳이 우리 왕국이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좁은 소견이옵니다, 폐하.”
페론 자작도 동의의 뜻을 보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차탄 공국의 일이 아닙니까? 차탄을 위해 그라임의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이드 2세는 심각한 얼굴로 신하들과, 눈앞에 놓은 예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하들 대부분, 이 정도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들 안타레스 백국이 겁을 먹고 알아서 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으음…….”
솔직히 하이드 2세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눈앞에 쌓인 보물들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그랬다. 평소라면 그 역시 별생각 없이 이대로 일을 덮어두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라임의 국왕인 동시에, 은의 현자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골치 아프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 은의 현자 쪽에서 길길이 날뛸 것 같은데.’
은의 현자에서는 이미 레펜하르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살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이드 2세 역시 그 일원으로서, 그 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일국의 왕이라 해도 타국과의 전쟁을 독단적인 기분만으로 질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명분이라도 있어야지 뭘 좀 하겠는데 전쟁을 하기엔 안타레스 백국이 너무 처신을 잘해 버렸다. 당장 하이드 2세 본인조차도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신하들에게 은의 현자에 대해 밝힐 수도 없고…….
‘에잉,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면 은의 현자들도 이해해 주겠지.’
결국 하이드 2세도 신하들의 뜻에 동의해 버렸다.
“알겠다. 그럼 그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지.”
☆ ☆ ☆
“이걸로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라임 왕실에서 벌어진 저 상황은, 비단 저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이며 테이칸, 할라인 등 사절을 보낸 모든 왕국에 같은 성명과 같은 예물이 보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그라임 왕국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타레스 백국의 행위가 국가 간의 도리에 어긋나긴 했지만, 이후 대륙의 질서를 존중하고 성의를 보였으니 이대로 넘어가겠다.
“그렇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예전, 전생 때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대놓고 전 대륙에 노예 해방 선언을 선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바보짓이었지.’
올바른 이상을 앞세워 세상의 이해를 바란 것까지는 좋지만, 사실 저거 ‘세상아, 나랑 싸우자!’라고 외치는 거나 다름없다. 당연히 경각심을 느낀 각 왕국이 호전적인 반응을 보일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때는 나 혼자 제플린을 싹 쓸어버렸으니 더더욱 그랬고.’
고작 한 명의 마법사가 인구 이십만의 대도시를 개박살 내고 인적 없는 폐허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걸 보고도 경각심을 못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인류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예 탈출을 도모했다. 군사를 일으키고 전술, 전략을 이용해 상식적인 선에서 거사를 치렀다.
덕분에 인간들의 반응도 전생 때처럼 격하지 않았다.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에 대해서도 굉장하다는 반응은 보일지언정, 전생 때의 뉴클리어 버스트 사건처럼 대륙의 공포가 되지는 않았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과, 바위를 아예 증발시켜 버리는 것은 받아들이는 감각이 크게 차이난다.
바위를 둘로 쪼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놀라운 위업이지만 바위가 아예 소멸해 버리면 그건 그냥 불가능,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러의 힘으로 콜른 협곡을 무너트린 것은 같은 오러 유저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뉴클리어 버스트로 산 자체가 사라져 평지가 된다면, 그것은 마법사조차도 이해 못 할 끔찍한 기적인 것이다.
‘뭐, 그때는 나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으니 별수 없었지만.’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다 보니 정치적인 감각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워낙 뛰어난 재능 탓에 일반 인간들의 생각 같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켈린 등의 수하들도 인간이 아니다 보니 인간의 반응을 예상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