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34
하지만 지금은 카를이 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에 자라 온 환경을 바탕으로, 카를은 능숙하게 대륙 각국에 로비를 해 갔다. 사건 자체를 차탄 공국과 안타레스-크로방스 연합 간의 세력 대결 구도로 여론을 몰아가며 은근슬쩍 노예 제도 반대에 대한 반감을 감추는데, 그 솜씨가 실로 감탄이 나올 만큼 교묘하고 세련된 것이었다.
“지도층이라고 해도 꽤 단순한 면이 있어서요, 이 정도 성의를 보이면 아무래도 적대하는 분위기가 나오기 힘들지요. 뭐, 각국에 보낼 예물 준비하느라 고생을 좀 하긴 했습니다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재정은 꽤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제플린 전역에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이고, 또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물품들을 구입하느라 예산 대부분을 소모한 상태다.
“다행히 우리에겐 금은보화 말고도 충분히 먹히는 물건들이 있었으니까요.”
각 왕국에 예물로 보낸 물품들은 모두 각 종족의 특산물들이었다. 엘프의 엘븐 실크며 오크의 가죽 세공 제품, 드워프의 무기와 트롤의 도자기는 백국 내에서야 흔한 것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희귀한 물건들이다.
물론 명색이 일국의 왕에게 보낼 예물이니, 이종족들이 평소에 쓰는 일반적인 물품을 보낼 수는 없다. 당연히 각 종족 내에서도 제법 귀한 취급 받는 고급품들만 골라 보냈다.
“덕분에 물량 확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금은보화로 채우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혔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거둔 효과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지요.”
레펜하르트가 흡족해하며 카를을 치하했다.
“고생했소, 카를. 그대의 공이 실로 크오.”
그리고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왠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좀 찝찝하긴 하군.”
분명 안타레스 백국은 각 왕국에 약속을 했다. 더 이상 안타레스 백국이 ‘침략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추후 세력이 더 커지고 대륙 전체에 노예 해방 전쟁의 기치를 올릴 때쯤이면 더 이상 안타레스는 ‘백국’이 아닐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말장난이다. 당당히 세상에 나서던 레펜하르트로서는 꺼림칙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카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만 가지고 살아가려면 절대적인 힘이 필요하지요. 백왕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시려면, 이 정도 타협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상의 룰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의 룰에 맞춰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는 것.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실소를 흘렸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더군.”
“네?”
“아, 타협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손을 내저으며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목소리를 흘렸다.
“절대적인 힘이 있어도, 이상만 가지고는 살 수 없더라고.”
카를이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게.”
레펜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지금,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이상을 꿈꾸는 동지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오직 마켈린과 시리스에게만 털어놓았던 그의 전생前生.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조차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내내 레펜하르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가끔은 속 시원하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는 전생에 대해 이야기한들 레펜하르트를 미친놈 취급할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이니까. 오히려 그로 인해, 그동안 보이던 이해 못 할 행보가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믿어 주지 않을까 봐서였지만 지금은…….
‘내가 한 번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겨우 얻은 신뢰였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흔들 수 있는 저 사실을 동지들에게 알리는 것은 역시 쉽게 정할 일이 아니다.
‘마켈린도 그냥 알리지 않는 쪽이 더 나을 거라 하긴 했고.’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문 채 그렇게 상념에 잠겼다.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그를 보며 카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뭔가, 제가 모르는 이야기인가 보군요.”
“으음? 아, 그냥 개인적인 비밀이라…….”
카를이 피식 웃었다.
“아, 개인적인 것치고는 너무 ‘깊어’ 보이는 ‘그 비밀’ 말입니까?”
레펜하르트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백왕님께서 꽤나 비밀을 지니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칼켄 공이나 러스 경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당장 제플린의 마법사들 발 묶어 놓은 수법부터가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만? 백왕님께서는 그냥 아는 마법사분으로부터 얻어 들은 지식이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그 정도의 지식량은 한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으음, 그건…….”
말문이 막혀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카를이 손을 저었다.
“캐묻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소?”
“사실 좋은 책사라면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밤잠을 편히 잘 수 있는 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카를이 빙긋 웃었다.
“신하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왕은 인간미는 있어 보일지 몰라도 왕으로서는 실격일 테니까요. 백왕께서 품으신 뜻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며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레펜하르트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고마운 말이로군. 앞으로도 명심하겠소.”
“그저 수하된 이로서의 작은 조언일 뿐입니다.”
카를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레펜하르트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가 내 편인 게 정말 다행이군.’
사실, 카를을 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도움이 될 거라곤 채 생각하지 못했다. 전생 때의 레펜하르트는 마법사답게 정치력이나 외교의 힘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눈앞의 강자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뒤에서 보좌한 카르사스 대왕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죽이기 미안해서 살렸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생의 카를은 크로방스 왕국 역사상 이름 높은 현군이며 인류 연합군을 뭉치게 만든 구심점 중 하나였다. 지도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개인의 무력만으로 황제가 된 레펜하르트와는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재목인 것이다.
‘어쩐지 전생 때 사이도 안 좋은 나라들끼리 잘도 뭉쳐서 덤벼들더라니…… 이런 작자가 뒤에서 수를 썼으니 인류 연합군이 그토록 똘똘 뭉칠 수 있었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군. 카를, 그대도 인간인데 다른 종족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데 거부감은 없소?”
카를이 헛웃음을 흘렸다.
“틸라 양과 사귀는 시점에서 거부감 느끼는 것도 웃기는 소리긴 합니다만?”
“그것도 그러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저도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이렇지만 한동안 고민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별로 고민할 것이 없더군요.”
차분한 목소리로 카를이 말을 이었다.
“제가 페르난도 가문의 후계자일 때는 영지민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때 타 영지의 인간들은 제게는 ‘다른 종족’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왕위를 꿈꾸며 ‘다른 종족’이었던 타 영지민 역시 ‘크로방스의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꿨지요.”
문득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백왕님 때문에 그 꿈은 접어야 했지만…… 대신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 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염 가득한 젊은 재상의 입가에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찬가지더군요. 이종족이라 여겼던 이들이 제 속에서 ‘사람’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 이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 ☆
안타레스 백국의 공식 입장에 대해, 대륙 대부분의 나라들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현 황제, 레어폴 프라임 바슈탈론 1세.
올해 예순이 넘은 이 노황제는 지금 대단히 분노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모두 불살라라!”
황궁 뒤에 마련된 거대한 연무장, 그곳에서 커다란 모닥불이 불길의 혀를 날름댄다. 그 속에 타고 있는 것은 안타레스 백국으로부터 온 예물들이었다.
화르르륵…….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를 자랑하는 엘븐 실크며 오크리시 레더 제품들이 매캐한 연기를 하늘 높이 피워 올렸다. 이미 트롤의 도자기는 전부 깨트려 사금파리로 만들었고 드워프제 무기는 녹여 버렸다.
“흥! 이따위 재물로 눈 가리고 아웅을 하려 하다니!”
노기를 감추지 않은 채 황제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 옆에선 신하들이 입가를 가린 채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그래, 정녕 안타레스 백국은 태도를 굽히지 않겠다더냐?”
백국에 사절로 다녀온 신하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그들은 세이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죄악의 길을 걷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타국과 달리, 레어폴 1세는 안타레스 백국의 답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족을 다시 노예로 환원하지 않으면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하겠다며 강경하게 나갔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입장을 공고히 굳혔다.
또 다른 신하 하나가 발언했다.
“세이어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은 그분의 얼을 따라 창조되어 만물의 지배자로 지음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을 무시함은 곧 제국에 대한 모욕이니,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실로 옳은 말이로다!”
황제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세이어로부터 칭제를 허락받은 나라답게 국교 역시 세이어 교단이다. 다른 교단을 인정하는 타국과 달리 안타레스 백국의 저 이종족 자유인 제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세이어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이니까.
“정벌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세이어의 가르침으로 저들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폐하!”
신하 중 일부가 안타레스 백국의 정벌을 주장했다. 비교적 생각이 단순하고 성정이 격한 이들, 대체로 무인이 중심이 된 주전파主戰派였다.
하지만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폐하.”
어느 정도 현실 감각이 있는 문관들이었다.
무장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그러니 무장들은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전쟁부터 부르짖는다.
하지만 문관들은 전쟁이 시작되면 오히려 지닌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폐하의 분노는 실로 합당하옵니다. 허나 안타레스 백국과 제국 사이의 거리는 너무도 멉니다. 크로방스 왕국이 안타레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정벌군을 일으키려면 크로방스 역시 적대하거나 바실리 왕국을 경유해야 합니다. 타국과의 관계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신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크로방스야 그렇다 치고, 바실리 왕국을 경유하는 것 역시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은 차탄 공국이나 라스틸 공국처럼 제국의 입김하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거기다 대고 ‘안타레스 백국을 벌하기 위해 그대의 나라를 지나가겠소!’라며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제정신 박힌 나라라면 타국의 군대가 자국 땅을 밟는 것을 인정할 리가 없으니까.
“타국의 입장 역시 제국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다는 눈치이옵니다.”
바슈탈론 제국과 달리 다른 나라들은 다들 ‘일단 넘어가자’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차탄 공국이 너무 해 먹긴 했지.’
대륙 제일의 상업 국가, 차탄.
바슈탈론 제국의 비호를 업은 차탄 공국은 그동안 대륙 각국과 중계 무역을 하며 큰 이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이득만큼 욕도 먹었다.
자국의 부를 야금야금 좀먹는 차탄 공국의 행위에 분노치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저 공국의 뒤에 있는 바슈탈론 제국 때문에 대놓고 적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터지니 다들 속으로 고소해한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이 예뻐서라기보다는, 차탄 공국이 미워서 다들 이대로 레펜하르트의 행위를 인정해 버렸다.
특히나 테이칸 왕국 같은 경우는 아예 공개적으로 안타레스 백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다며 답례 예물마저 보낼 정도였다.
테이칸 왕국의 수치, 소아 성애자 오러 유저 란타스 경 때문이었다. 시체를 찢어 죽여도 모자랄 저 전설적인 변태를, 차탄 공국은 체포에 협조하긴커녕 오히려 망명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니 이후 양국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테이칸 왕국민 대부분이 차탄 공국이라고 하면 이를 갈 정도였다.
그런 차탄 공국을 안타레스 백국이 시원하게 엿 먹여 버렸으니, 대놓고 칭찬이야 못 하지만 테이칸 측에서 꽤나 기꺼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게다가 저 란타스 경이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카를의 로비는 이런 사소한 곳까지 꼼꼼히 닿아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테이칸 왕국의 민심은 확실히 안타레스 백국에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다른 교단의 반응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대륙 전역에 세이어 교단이 가장 융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인간이 믿는 신은 오직 세이어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사방을 가호하는 네 수신獸神.
신룡神龍 바메트. 천호天虎 파르가. 불멸의 사타르. 얼어붙은 티아논.
이 사방신四方神을 제외하고라도 여덟 교단이 대륙 각국에서 교리를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