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5
세상 모든 것에 희망을 잃은 눈빛으로, 그녀는 레펜하르트의 뒤를 따랐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곧바로 엘븐하임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마치 쫓기듯 허겁지겁 뛰어나온 것이라 실란이 왜 이리 서두르느냐고 투덜댈 정도였다.
경매장 문을 나와 거리로 나서자 그제야 좀 정신이 든다. 레펜하르트는 숨을 골랐다.
“후우…….”
티는 안 냈지만, 그는 사실 시리스를 본 순간 대단히 분노한 상태였다. 상처 입고 피 흘리는 그녀를 본 순간 머리끝까지 피가 올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사실 순간적으로 주먹이 10센티미터 정도 움직이기도 했다. 거기서 30센티미터만 더 움직였어도 그 노예상은 머리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아 간신히 냉정을 되찾아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대학살을 일으킬 뻔했다.
그래도 밖에 나와 찬 공기를 쐬니 꽤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허겁지겁 데려온 탓에 그녀는 피투성이에 허름한 차림 그대로였다.
“실란, 치유술 좀 부탁해.”
“이미 하고 있어요.”
실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다 나은 시리스가 한결 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깐 의아해하다가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지금은 추위를 느끼겠구나.’
엘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더위와 추위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숲 속의 요정으로 살며 정령술에 통달했을 때의 이야기지 노예로 살아온 시리스에겐 아직 그런 재주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코트를 벗어 주었다.
“춥겠구나. 미안하다, 일단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속으로 시리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주인께서 감격스럽게도 노예에게 입던 옷을 건네주셨으니 응당 감동으로 몸을 떨며 거절해야 하나? 뭘 기대하는지는 뻔히 알겠는데, 그 기분 맞춰 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노예다운 행동은 해 주겠다. 하지만 마음마저 노예로 살진 않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그녀는 대뜸 손을 뻗어 코트를 받아 걸쳤다. 노예답게 시키는 대로 바로 행해 버린 것이다.
‘이 추위에 폼 좀 내려나 본데, 어디 계속 내 보시지?’
그런데 어째, 간단한 모직 상의만 입고도 이 덩치 좋은 새 주인은 전혀 추운 티를 내지 않았다. 강물이 꽁꽁 얼 정도로 강추위이건만 봄바람이라도 되는 양 한풍을 서슴없이 맞고 있는 것이다. 표정을 보니 그저 시리스가 춥지 않게 된 것이 마냥 좋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안 추운가?’
허세라고 하기엔 정말 피부에 소름 하나 안 돋아 있다. 시리스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 레펜하르트가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일단 옷부터 사러 가자.”
셋은 상업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한풍이 부니 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사실 추위로 걸음이 빨라진 것은 실란과 시리스고, 레펜하르트는 그냥 평소처럼 걸었다. 다리 길이 차이가 있으니 셋의 보행 속도가 비슷해졌다.
걸음을 옮기며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저기, 아직 이름이 없지?”
“네.”
세 번이나 반품되며 이름을 받은 적도 한 번 있기야 하지만, 이미 기억에서 지워 버린 후였다.
“음, 저기…… 시리스라는 이름 어때?”
“제 이름은 시리스군요. 알겠습니다.”
시리스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이라 레펜하르트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괜찮아? 마음에 들어?”
“……?”
시리스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노예에게 이름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인가? 안 들면 바꿔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 이름은 시리스. 기억했습니다.”
여전히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는 전전긍긍했다. 저게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한 소린가? 아, 전생이나 현생이나 여자 마음 이해하기 힘든 것은 여전하구나!
하여튼 별 반대가 없으니 그는 ‘전생’에서처럼 그녀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럼 넌 이제부터 시리스 발렌시아다.”
전생의 그녀는, 이 순간 굉장히 감격해했다. 노예에게 성을 주는 주인 따윈 세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리스는 마냥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노예에게 성은 필요 없습니다. 혹시 주인님의 성입니까?”
“아니, 네가 가져야 할 성이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잠깐 호기심이 일었지만 시리스는 바로 의문을 지웠다. 어차피 이놈도 분명 며칠 지난 다음 신경질 벅벅 내면서 자신을 반품할 것이다. 상관없는 인간에게 관심을 할애할 이유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자신과 실란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난 레펜하르트. 얘는 실란이고 필라넨스의 성직자다.”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븐하임 경매장의 주인, 라쿠스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행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금고 속의 금화를 세는 일이었다. 엘프 노예 사업은 투자비가 엄청나게 들어가긴 하지만 그만큼 얻는 이득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궤도에 오르고 나면 망할 일은 절대 없다.
‘세상 남자들이 모두 고자가 되거나 성자가 되지 않는 한은 말이지.’
300년이란 전통 속에 14대 후계자로 경매장 주인이 된 라쿠스는 그래서 인생이 행복했다. 초기에 경매장을 세운 조상님들이야 고생깨나 했다고 들었지만, 편하게 사업을 물려받은 그는 고생 따위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각 교단에서 펼쳐도 세상 남자들은 결코 성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사업도 영원토록 번창하리라!
그렇게 한창 라쿠스가 신을 낼 때였다. 시종 중 하나가 귀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 금화 세는 일도 중단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접대실에는 이미 화려한 복장의 뚱뚱한 청년이 인상을 쓰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쿠스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테리크 님. 어서 오십시오.”
공국 2위의 대상회, 롤페인 상회의 후계자이자 엘븐하임 경매장 최대의 고객이기도 한 그가 왔으니 지금 금화 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깍듯한 라쿠스의 인사에 테리크가 표정을 풀었다.
“잘 지내셨소, 라쿠스.”
“석 달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요새 하시는 일은 잘 되시는지요?”
“타오반이란 새 상회가 생겨서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별문제는 없소.”
타오반은 요 근래 새롭게 두각을 나타나는 상회였다. 주로 곡물을 전문으로 다루는지라 롤페인 상회와 자꾸 사소한 다툼이 생기곤 했다. 기본적으로 안 다루는 것이 없긴 하지만 롤페인 상회의 주력은 곡물과 소금이다. 영역이 겹치니 이놈들이 자꾸 그의 상권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압박을 가하고 있던 참이지.”
자고로 거슬리는 것들은 돈으로 누르는 것이 정석인 법, 라쿠스가 바로 알아듣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야 테리크님의 수완이라면 어련히 잘 하시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렇게 두 사람은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교환했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자 라쿠스가 바로 본론으로 돌아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번에 공들여 키우던 엘프 암컷이 하나 있어서요. 안 그래도 선보여 드리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테리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이번엔 됐소. 따로 사고 싶은 게 있어 왔으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뚱뚱한 청년이 라쿠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 얼마 전에 베레트가 반품한 슬레이어가 하나 있다면서?”
라쿠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기껏 슬레이어로 키웠는데 세 번이나 반품당한 대실패작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본전도 못 건지고 싸게 팔지 않았던가? 그 보고 들으면서 참 속이 쓰렸다.
“148번 말입니까?”
“댁들이 붙인 번호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잖소? 하여튼 그거. 그거 내주시오.”
찬장에서 술병이라도 가져오라는 식의 태도로 테리크가 손가락질을 했다. 평소라면 만세를 불렀을 일이겠지만…….
“아, 저, 그게.”
난처해하는 라쿠스를 보며 테리크가 의아해했다.
“응? 문제라도 있소?”
“그게, 148번은 이미 팔려 버렸습니다만.”
“에엥?”
“그것도 막 방금 팔렸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테리크는 황당해했다. 원래 슬레이어는 워낙 고가라 쉽게 팔리지 않는다. 1년에 세 마리 팔면 대박이라 할 정도였다. 뭐, 엘프들이야 워낙 유통기한(?)이 기니까 결국 다 팔 수야 있지만.
‘그런데 그것이 벌써 팔렸다고? 이런 공교로운 일이?’
“설마 베레트가 내 심중을 눈치채고 다시 사 간 건가?”
“아뇨, 베레트 님이 아니라…….”
라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처음 보는 청년이었습니다.”
“잉?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환어음 결제할 때 서명을 했을 것 아니오?”
“그게, 전부 현금으로 계산해서요.”
“허, 슬레이어를 현금으로 구매할 정도로 돈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아무리 돈이 넘치는 그라도 금화 몇백 닢을 현금으로 가지고 다니진 않는다. 어차피 신용 높은 롤페인 상회의 환어음으로 모두 결제가 가능하니 굳이 무거운 짐 지고 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슬레이어를 구매할 정도로 잘 사는 이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다.
“그 슬레이어는 워낙 결함품이라 그냥 헐값에 넘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에잉…….”
현찰로 계산했다는 걸로 보아 뜨내기 모험가가 운 좋게 대박을 터트려 평소의 로망을 이룬 모양이다. 아마도 싸다는 소리에 덜컥 넘어갔겠지.
“그럼 그 사간 놈 인상착의를 알려 주시오.”
테리크는 반품 엘프를 다시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베레트를 놀릴 목적이었지만, 이미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더니 욕심이 덜컥 생겼다. 언제나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던 테리크였다.
‘적당히 웃돈 주면 고마워하면서 넘기겠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테리크의 요구에 라쿠스가 잠시 주저했다. 원래 고객의 신상명세는 알리지 않는 것이 상인의 법도다. 자칫하면 엘븐하임의 신용도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븐하임이 아무리 유서 깊은 경매장이라도 롤페인 상회와 비견할 수는 없다.
‘뜨내기 같았으니까 큰 문제는 안 생기겠지.’
“찾기는 쉬울 겁니다. 워낙 덩치가 큰 청년이었으니.”
결심한 라쿠스가 레펜하르트의 외모를 천천히 묘사했다.
☆ ☆ ☆
제플린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의류점을 찾은 레펜하르트는 바로 주인을 닦달해 돈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시리스가 입을 만한 건 몽땅 가져오라며 으름장을 놨다. 돈 냄새를 맡은 의류점 주인이 희희낙락하며 각종 값비싼 여성용 의복들을 연신 가져왔다.
“어때? 마음에 드는 거 있니?”
레펜하르트가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물론 시리스는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아니, 네 마음에 들어야지 내 마음에 들어 봤자…….”
“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난처해하는 레펜하르트에게 시리스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노예로 살던 그녀에게 화려한 옷을 사 주고 감사를 받고 싶은 모양인데, 솔직히 가소로웠다.
‘비싼 옷이라도 사주면 감동할 줄 알았나 보지?’
노예인 그녀에게 이런 비싼 옷을 사 주는 것에 대해선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엘프 노예를 산 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경우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애초에 예쁜 엘프들을 사다가 인형처럼 입혀 놓고, 눈요기를 한 뒤 벗기려는 놈들은 세상에 쌔고 쌨다.
얼음 같은 그녀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바로 마음을 열 리 없지.’
자신에게 있어 시리스는 몇십 년간 사랑해 온 연인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는 오늘 처음 본 생판 남인 것이다.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서운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어쨌거나 옷을 사긴 사야 한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직접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무슨 색을 좋아했더라?’
레펜하르트는 전생의 그녀의 취향을 떠올리며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옷을 하나하나 골랐다. 남자는 보통 연인이라도 여자의 옷 취향에 대해서는 그저 좋아하는 색상 정도나 알면 다행이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 보니 그냥은 생각이 안 나 무려 인공 주마등까지 써 가며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덩치 큰 사내놈이 여자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감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도야 좋았지만 남이 보기엔 참 변태스러운 광경이었다. 실란은 낯부끄럽다고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아, 대충 좀 골라요.”
저게 어떻게 보이냐면, 노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자기 취향으로만 꾸미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왜 옷 하나하나를 고를 때마다 저리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연인에게 옷을 사 주는 거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향을 고려하는 성실한 모습이겠지만(그리고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입힐 상대가 엘프 노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