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68
이내, 방문을 열고 은발 머리의 소녀가 사뿐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오랜만이에요, 테스론 경.”
“어서 오십시오, 수호자 세렐라인. 오늘은 어쩐 일로…….”
질문을 이으려던 테스론의 말문이 순간 막혔다. 세렐라인의 뒤로 한 청년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낯익은 청년이었다. 화려한 금발에 잘생긴 외모, 온화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의 저 사내는 테스론도 잘 아는 이였다.
‘제이드?’
입 밖에 절로 튀어나오려던 이름을 테스론은 간신히 삼켰다. 지금 그가 제이드를 알아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
세렐라인이 제이드를 보며 테스론을 소개했다.
“새로운 동지입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현자 레스틴, 속명 테스론 경입니다.”
제이드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현자 제스, 속명 제이드 아크라이트라 합니다. 위명은 이미 들었습니다, 테스론 경. 권왕 레펜하르트를 상대로 박빙의 승부를 펼치셨다고 하더군요?”
전생의 친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상대하려니 참 기분이 묘하다. 테스론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테스론입니다. 태양탑의 미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이드 아크라이트는 현 시대에서도 꽤 유명인이다. 특히 마법사에게는. 얼굴은 몰라도 그의 이름 정도는 아는 척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이후 필레나도 자기소개를 했다. 세렐라인이 방 밖으로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동지가 한 명 더 있어요. 들어와, RX-13.”
금발 벽안의 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이드와 맞먹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지닌, 잘생긴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를 본 순간 너무 놀라 테스론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알렉스?”
제이드 만큼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전생 때 할라인 왕국의 왕자로서 오러와 마법, 신성력을 모두 갖추어 세상으로부터 용사라 불렸던 이, 마왕 레펜하르트와의 최후의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알렉스 폰 할라인이 아닌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알렉스가 지금 시대에?’
전생의 사투 당시 알렉스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성녀 엘린과 마찬가지로, 지금 시기라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존재인 것이다!
“…….”
있을 수 없는 존재를 본 테스론은 경악해 말문을 잃었다. 다행히 세렐라인은 그의 실수를 달리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알렉스가 아니라 알, 엑스예요.”
제이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첨언했다.
“어차피 은의 현자 내에서도 알렉스라고 부르잖습니까? 그거, 발음 어렵다니까요?”
“하긴, 그런가요?”
세렐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테스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에 굉장히 놀란 얼굴이다.
“왜 그러시죠, 테스론 경?”
아차 싶어 테스론이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역시 마왕의 두뇌, 금방 핑곗거리가 떠올랐다.
“아, 아닙니다. 그냥 조금 놀라서요. 저 청년 몸에 오러와 신성력, 마력이 모두 느껴져서…….”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하긴 테스론 경도 오러와 마력을 함께 지니고 계시니.”
“하지만 마법과 신성력은 반발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전생 때는 못 느낀 것이지만, 생각해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알렉스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테스론이 물었다.
“이론상 오러와 마력, 오러와 신성력은 함께 지닐 수 있어도 마력과 신성력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네, 그래서 고대에서는 그 세 힘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를 연구한 듯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연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지요. 그것이 재활성화 완전변이체Reinvocated Xenogenesis, RX 시리즈입니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금발 벽안 청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아이가 RX 시리즈의 열세 번째 탄생작. RX-13(알엑스-써틴)이지요.”
“으음…….”
애써 놀란 가슴을 달래며 테스론은 알렉스, 그러니까 RX-13을 바라보았다.
분명 전생의 알렉스와 똑같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니 확연히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외모는 같아도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 알렉스는 그가 아는 쾌활하고 정의감 넘치는 용맹한 청년이 아니었다. 마치 인형처럼,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럼 당시의 알렉스와는 다른 존재인 건가? 가만, 그럼 은의 현자는 일국의 왕자까지 멋대로 바꿔 버린 거였어? 이 작자들 진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세렐라인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제이드 공의 명성이야 이미 아실 터. 저 아이 또한 큰 전력이 되어 줄 겁니다. 이제 다시 권왕을 노릴 수 있겠지요?”
테스론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전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왕을 해치우는 데 큰 힘이 될 기물이죠.”
“기물? 아티팩트인가요? 필요하다면 비슷한 물품을 제가 찾아볼 수 있는데.”
“아뇨. 이건 꼭 찾아야 합니다.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말할 게 없다 쪽에 가깝다. 테스론도 왜 이토록 간절히 사방신의 유물부터 찾아야 한다고 느끼는지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인에게 직감은, 때로는 어떤 정보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세렐라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투를 하는 것은 테스론 경이니까요. 그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요? 그자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상관없습니다.”
의외로 흔쾌한 반응이었다.
그녀도 현장과 탁상, 실무자와 관리자의 차이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실무자의 의견에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겉보기엔 어리지만, 세렐라인은 벌써 80년 가까이 살아온 이였으니까.
제이드도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했다.
“손발도 맞춰 보지 않고 바로 그자에게 덤비는 것도 좀 불안하지 않습니까? 던전 탐사라면 호흡을 맞추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권왕 레펜하르트에게 호되게 당했던 제이드였다. 아직도 가끔, 그때 당한 기억이 악몽이 되어 꿈에 나타나곤 한다.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 기물이란 게 어디 있습니까? 던전인가요?”
“그 던전의 위치는? 기물의 정체에 대해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세렐라인과 제이드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테스론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쪽의 대수해大樹海, 플룬탄pluntan.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그 열대 우림 깊숙한 화산지에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이란 던전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세렐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장소군요.”
아무리 정보력이 좋은 은의 현자라지만 대륙의 던전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들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현세의 인간들을 훔쳐보며 얻은 것, 무슨 각 대륙 던전 지도 같은 것을 보유한 게 아니란 소리다.
새로운 던전이 미지의 영역이기는 세상 사람들이나 은의 현자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은의 현자는 도중에 정보며 기물을 가로채 그토록 많은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녹아내린 늪이라…… 고문서에 나온 명칭인가 보죠?”
대부분의 던전 정보는 어딘가의 고문서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세렐라인은 당연히 테스론도 그럴 거라 여겼다. 뭐, 진실은 전생의 마왕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할 수야 없지.
오해도록 놔둔 채 테스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이 바로 제 목표입니다.”
12권
제40장 녹아내린 늪molten morass
1
대수해大樹海, 플룬탄pluntan.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이 거대한 열대 우림은 대륙을 종단하는 대하大河, 쥬란 강이 형성한 거대한 삼각주에 위치해 있었다.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 사이에 위치해 반도 형태로 튀어나온 지형으로 그 면적만도 족히 할라인 왕국의 절반 가까이 된다.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접근을 불허하는 수림과 독충, 몬스터들이 들끓어 인간들도 정글 초입에서나 간신히 터전을 꾸릴 뿐, 깊숙한 곳은 감히 들어서지 못한 곳이다.
사우나를 연상케 하는 폭염과 무더위로 가득한 열대 우림, 그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왜에에엥! 왱왱왱!
“으아, 이놈의 벌레들!”
얼굴에 달라붙는 정체불명의 날파리를 떨쳐 내며 실란은 치를 떨었다.
그는 평소처럼 성직자 복장이 아닌, 얇은 상의에 반바지만을 입은 간편한 차림새였다. 이 무더위 속에서 전신을 덮는 법복을 입었다간 당장 탈수증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역시나, 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차림으로 러스가 옆에서 헉헉거렸다.
“아, 진짜 덥다…….”
그 역시 갑옷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실란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었다. 이 열대 우림의 무더위는 그의 굳건한 기사도마저 꺾어 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흉부에 오크제 레더 아머를 걸친 것이 기사로서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러스와 함께 걷고 있던 거구의 오크, 타시드가 뻐드렁니 사이로 연신 넋 빠진 음성을 흘려 댔다.
“으, 끈적끈적해…… 기분 나빠…… 끈적끈적해…….”
타시드는 아예 반바지만 입은 채 상체를 홀랑 벗고 우람한 녹색 근육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틀랜드 오지의 황야, 사막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자란 타시드는 더위에 꽤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더위는 단지 더울 뿐 아니라 습기마저 지독했다.
전신이 끈적끈적한 것이 실로 불쾌한 기분이다. 절로 치가 떨린다.
“으으,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아녀, 그래도 도장 찍는 것보단 낫지.”
그들 뒤에서 따르고 있는 것은 새하얀 수염의 늙은 드워프, 마켈린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알 포트의 법복을 제대로 챙겨 입은 마켈린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후우, 더운 거야 별문제 없지만 확실히 이 곤충들은 견디기 힘들구려…….”
용광로의 열기에 익숙한 드워프들은 다른 종족보다 열에 대한 내성이 월등히 강하다. 대장장이 출신은 아니지만 마켈린 역시 드워프답게 더위나 습기에는 잘 견디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정없이 덤벼드는 이 벌레들만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옷자락을 열심히 부치며 마켈린도 득실대는 날파리 떼를 열심히 쳐 냈다.
“저리 가라, 이놈들아!”
다들 처음 겪어 보는 이 열대 우림의 환경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나 추운 지방 출신인 이니야는 아예 발작 직전이었다.
“크아악! 더워!”
안 그래도 평소 차림이 꽤 야한 이니야다. 현재 그녀는 ‘입었다’라기보다는, ‘벗는 도중이다’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드러나는 민소매 상의에 배꼽조차 드러내고, 치마 역시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간 채였다.
놀라운 미모를 지닌 이니야가 저런 어마어마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 일행의 남성 제군 모두 초반에는 참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러스나 실란은 물론―아무리 외모가 저 모양이라도 실란은 어엿한 스무 살 사내놈이다― 여색에 무던한 레펜하르트마저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 이야기.
이 쪄 죽을 것 같은 더위 속에서는 잘 빠진 여인의 나신도 그냥 ‘불쾌한 체온 덩어리’인 것이다. 다들 진이 빠져 이니야가 헐벗건 말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못 참겠어!”
결국 폭발한 이니야가 은빛 오러를 끌어냈다.
사아아아!
냉기를 띤 오러가 그녀의 주위를 삽시간에 에워쌌다. 벌레들이 윙윙대며 그녀를 피해 도망간다.
“앗! 이니야 씨, 또 발작했다!”
눈을 빛내며 실란이 잽싸게 이니야 곁으로 달라붙었다. 그녀의 다리 옆에 쪼그려 앉아 냉기 속에 몸을 담그고 몸을 부르르 떤다.
실란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아, 시원하다…….”
옆에서 러스가 한없이 부러운 표정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차마 체면이 있어 얌전히 있지만, 마음 같아선 그도 이니야의 반대편 다리에 매달리고 싶었다. 타시드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으음…….”
“흠흠흠…….”
두 사람 다 슬금슬금 이니야에게 다가갔다.
실란처럼 대놓고 달라붙지는 못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그녀 근처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저 냉기의 세례에 몸을 맡기고 싶은 것이다.
당연히 이니야는 쌍심지를 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