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75
덕분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반나절 만에 몰튼 모라스 던전을 절반 이상 주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복도와 전당을 지나쳐 한참을 내려간 후였다.
후우우우…….
들끓는 공기 소리와 함께 레펜하르트 일행의 눈앞에 커다란 다리가 보였다.
밑에 용암의 강이 흐르는, 수십 미터 높이의 장대한 다리였다. 다리 주위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동이 있어 벽면 곳곳에 마그마의 폭포를 드리우고 있었다. 시뻘건 용암이 아래로 흐를 때마다 후끈한 열기가 다리 위를 맴돌았다. 조심스레 레펜하르트가 다른 이들을 이끌고 다리를 반쯤 지났을 때였다.
콰앙!
용암이 폭발하며 수십 개의 불덩이가 날아올랐다. 불덩이가 다리 위로 착지하며 거대한 사람의 형태로 화했다. 실란이 눈을 반짝였다.
“어, 저거?”
상당히 자주 본 불꽃 거인이었다. 바로 단하임 일족이 주로 불러 대는 단골 정령, 불의 이그나시스가 아닌가?
“멈춰라!”
“허락받지 않은 침입자들아!”
수십 개체의 이그나시스가 화염을 일렁이며 길을 막았다. 하나하나의 크기가 평소 엘프들이 불러 대던 이그나시스에 비해 세 배도 넘어 보였다.
러스와 타시드가 긴장하며 검과 도를 뽑았다. 그동안 많은 던전을 다녀 봤지만 정령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과연 어느 정도 위력을 지녔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레펜하르트도 조심하라며 등 뒤로 손짓했다.
“이건 이계의 오염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이곳 방어 시스템의 일부야. 신성력은 통하지 않는다.”
과연, 변질되지 않은 방어 시스템답게 이 이그나시스들은 다른 마물처럼 무턱대고 공격하지 않았다. 앞장 선 가장 거대한 불의 거인이 일행에게 경고했다.
“그대들은 허락의 징표가 없으니 이곳을 지날 수 없다. 만약 경고를 무시하면 마그마의 분노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일행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다. 고대어로 말한 것이라서 알아들은 이는 레펜하르트밖에 없었다. 이니야가 전의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치울까요, 레펜하르트 님?”
안 그래도 주위가 워낙 덥다 보니 불쾌지수가 하늘까지 치솟은 그녀였다.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니야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귀에다 뭔가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이니야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 그게 먹혀요?”
“해 보세요. 먹힐 겁니다.”
자신만만한 레펜하르트의 태도에 이니야가 긴가민가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이내, 이니야가 천진난만한 소녀의 표정을 한 채 맑은 목소리를 토했다.
“이그나시스, 사랑스러운 우리의 친구여!”
바람이 휘감기는 듯한 청량한 목소리였다. 이니야가 우아한 포즈로 팔을 들어 가슴을 감쌌다. 나긋나긋한 태도하며 표정이 어떤 더러움도 모르고 자라난 성처녀를 연상케 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니야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평소 그녀의 행태를 아는 러스며 실란, 타시드가 부르르 떨었다. 여자의 내숭은 무죄라지만 지금 이니야의 가증스러움은 족히 무기징역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용케 이그나시스들에게는 먹힌 모양이었다.
“정령의 친구여, 그대를 알아볼 수 있다.”
이그나시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다. 이니야가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기억하신다면 친구로서 간청하겠어요. 우리를 그냥 보내주실 수 없나요?”
눈을 초롱초롱 뜨며 이니야가 이그나시스를 지긋이 올려다보았다. 타시드가 못 참겠다는 듯 옆구리를 벅벅 긁었다.
이그나시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우리의 업이 가혹하다곤 하나 우정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
“잠들겠다.”
“우리는 그대들을 본 적이 없다.”
불꽃의 거인들이 흐릿해지며 허공에 녹아 사라진다. 이니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 정말 되네?”
완전히 불의 기운이 사라지자 그토록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니야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우에, 오글거려…….”
얼마나 오글거렸는지, 하도 입술을 삐죽거려 입 돌아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칭찬을 건넸다.
“잘했습니다, 이니야. 연기력이 좋으시군요.”
전생 때는 시리스에게 시킨 짓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이니야가 훌륭히 ‘사랑스러운 정령의 친구’ 역을 소화해 낸 것이다.
“어머나, 별말씀을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인걸요?”
또다시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니야가 애교를 부린다. 이젠 마켈린조차도 몸을 벅벅 긁기 시작했다. 비교적 저 작태를 자주 본 러스와 실란만이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기가 사라진 다리를 건너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역시 엘프가 있으니 편하긴 편하네.’
☆ ☆ ☆
반면 테스론 일행은 아주 불꽃 튀게 싸우고 있었다.
“물러서라, 이방인들이여.”
이그나시스의 경고를 테스론 일행은 심플하게 답해 주었다.
“프로즌 오브!”
정중한 경고에 대뜸 마법을 날렸으니 그 대가가 어찌 작을쏜가?
“마그마의 분노를 맛보아라!”
수십 개체의 이그나시스가 미친 듯이 덤벼들었고, 테스론 일행도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어디 어설픈 불의 정령 따위가!”
“제가 움직임을 막을게요!”
제이드와 필레나의 빙계 주문이 펑펑 날아가고.
“세이어여, 힘을 주소서!”
크리스틴이 성광검 메사이어에 신성검을 발동시켜 마구 휘두른다.
“알렉스! 좌측에서 협공하게!”
“알았다.”
테스론의 명령에 따라 알렉스가 바로 검을 들고 움직여 이그나시스의 왼편을 사정없이 몰아쳤다. 이 이그나시스들은 엘프들이 소환한 것보다 몇 배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테스론 일행들에게도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오러와 마법, 신성력을 총동원하며 한참 동안이나 전투를 벌였다.
모든 이그나시스들을 물리친 뒤 테스론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거, 꽤나 귀찮은 놈들이 많은데.”
딱히 위기 상황에 처할 만큼 강한 놈들은 아니었다. 테스론 혼자 왔다거나 크리스틴, 필레나만 대동했을 때라면 꽤 고생할 법도 했겠지만, 제이드와 알렉스가 가세하니 어지간한 적도 쉽사리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알렉스의 힘은 대단하군.’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오는 알렉스를 힐끔거리며 테스론은 속으로 감탄했다.
현재 알렉스의 실력은 그가 기억하는 전생의 용사, 알렉스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오러도 마력도 신성력의 수준도 흡사했다. 단지 그때에 비해 경험이 떨어지고 감성이 없어 전술적으로 취약할 뿐이다.
‘저 정도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어.’
당시의 용사 알렉스가 테스론 자신이나 검성 사이러스에 비해 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고, 객관적으로 볼 때는 그 역시 초인이었다. 아무리 일국의 왕자이고 삼위일체라는 신기한 능력을 쓴다지만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대륙 최강의 5인에 끼었겠는가? 분명 마왕과의 최후 전투에 참가할 만한 강자 중 강자였다.
저 RX-13은 그때의 알렉스와 기량만으로는 필적한다. 순수한 위력만으로는 현재의 테스론보다 훨씬 우위였다.
‘물론 전투가 오직 기량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니 실제로 붙어 보기 전엔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겠지만…….’
하여튼, 현재 테스론 일행의 힘이면 크게 험한 꼴 볼 일은 절대 없다. 그러나 악령이니 악마니 마물이니 정령이니, 나타나는 족족 물리치면서 나아가다 보니 시간이 많이 잡아먹히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테스론 일행은 다리를 건너 계속 이동했다.
커다란 쇠사슬로 이어진 다리 끝에 용암 사이로 거대한 바위기둥이 건물처럼 우뚝 솟은 것이 보였다. 그 기둥 위쪽에는 족히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신전이나 회장처럼 같은 저 건축물 뒤쪽에 있는 순백의 매끈한 성벽, 그걸 보며 테스론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저기가 이 던전의 코어 같군.’
던전 안쪽을 맴도는 이계의 기운, 그 흐름을 느끼면 대략적인 중추의 위치와 방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처음 던전을 탐사할 때 목표를 정하는 방법이다. 확실히 이 몰튼 모라스의 모든 사기는 저 성벽 뒤를 중심으로 회오리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며 테스론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거의 다 왔군요. 일단 안에서 좀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관문을 공략하지요.”
건물 안쪽은 텅 빈 광장이었다. 원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넓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홀에 두꺼운 기둥만 세워져 있었다. 벽의 창문 너머로는 용암 폭포가 시뻘건 빛을 발하며 안쪽을 달구었다.
필레나가 무한의 주머니를 뒤져 막대 하나를 꺼냈다. 밀림에서 자주 애용했던 휴대용 마법 천막이었다. 비록 건물 안이라고는 해도 워낙 주위 열기가 심해 제대로 휴식하려면 마법 천막의 냉기를 빌릴 필요가 있었다.
후다닥 천막을 친 뒤 필레나가 식기를 꺼내며 물었다.
“테스론, 밥할까?”
“그래, 든든하게 먹고 움직여야지.”
이번에도 크리스틴이 제일 먼저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밥 짓는 필레나 도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크리스틴의 이기심은 천하일품이라, 제 몸 편하기 전에는 남 도와야 한다는 개념이 절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뭐, 필레나도 그녀에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니 아무 말 없이 솥부터 설치했다. 어차피 크리스틴 말고 제이드나 테스론도 돕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무뚝뚝해 보였던 알렉스가 요리를 도와주었다.
“나는 불을 피우겠다.”
뭔가 선언하는 듯한 말투와 함께 알렉스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절도 있는 자세로 마법의 불을 바닥에 피웠다. 용변 보는 자세로 절도를 지킬 수 있다니, 저것도 나름 굉장한 재주다 싶어 필레나가 키득거렸다.
“필레나? 왜 웃는가?”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콧노래를 부르며 필레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아쿠아 드레인 마법을 구사, 주위의 수증기로부터 수분을 추출해 식수를 만든다. 그렇게 솥에 물을 채운 뒤 무한의 주머니에서 싱싱한 과일과 갓 딴 채소, 도축 직후의 신선한 고깃덩이를 꺼내며 그녀가 감탄했다.
“아, 이거 하나쯤은 달라면 주지 않을까? 진짜 탐나는데.”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무한의 주머니는 어디까지나 현세의 공간을 왜곡시켜 줄 뿐이다. 부피나 무게를 배율에 맞춰 줄여 주긴 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시간은 동일하게 지나간다. 무한의 주머니에 식량을 들고 다닌다고 안에서 썩지 않는 건 아니란 소리다. 그래서 무한의 주머니를 지닌 여행자들도 이동식량은 언제나 건조식이나, 마법이 걸린 장기 보존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은의 현자가 준 이 무한의 주머니는 달랐다. 아예 강렬한 물질 동결의 권능이 담겨 있어 내용물을 넣었던 상태 그대로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요리가 취미인 필레나에게는 진짜, 그까짓 플레스텍스 슈트보다 100배는 더 탐나는 마도구였다.
‘이게 있으면 언제나 테스론에게 맛있는 거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녀도 큰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테스론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반납해야 돼.”
“알고 있어, 흥!”
솥에서 스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따로 냄비를 마련해 필레나는 미리 반죽한 밀가루로 빵도 구웠다. 신선한 과일을 썰어 빵에 끼워 넣고 꿀을 바른다. 얼려 놓은 자고새 고기를 해동해 불에 얹으니 이내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테스론이 포크를 들고 솥 옆으로 와 앉았다.
“음, 좋은 냄새.”
알렉스도 나이프를 들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영양 보충이 필요하다.”
손끝 하나 돕지 않은 주제에 제이드와 크리스틴도 어슬렁어슬렁 천막에서 기어 나왔다. 스튜를 국자로 휘저으며 필레나가 웃었다.
“다들 식사하세요.”
그렇게 막 스튜를 나눠 주려던 참이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건물 반대편 입구, 그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아? 여기서부터는 아는 길이라고. 이제 곧 쉴 만한 곳이 나올 거야.”
“거긴 좀 시원해요, 레펜 씨?”
“쉴 만하다고 했지 시원하다곤 안 했다, 실란.”
“으으, 마법 좀 쓰면 안 되나요?”
“알았어, 자리 풀면 적당히 결계 하나쯤 쳐 줄게.”
“좋죠, 그런데 이거 무슨 냄새지? 되게 맛있는 냄새가 나네?”
곧이어 우락부락한 거구의 사내가 한 무리의 일행을 이끌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홀 안에 가로막는 벽은 하나 없이, 바로 그쪽 일행과 테스론 일행이 눈을 마주쳤다.
“엥?”
“어라?”
양쪽이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멀뚱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낯익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테스론?”
숟가락을 든 채 테스론도 눈을 멀뚱하게 껌벅였다.
“……레펜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