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86
“필라넨스시여, 이들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그동안의 고련이 헛되지 않아 실란은 이제 늘씬한 키에 백옥 같은 피부, 차분한 눈매에 성숙한 미모를 뽐내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묘사에 주목하라. 분명 단어는 ‘청년’이지만 설명은 어째 ‘미녀’쪽에 가깝다.
실란의 핑크빛 성광이 수많은 인파 위로 뿌려졌다. 여신의 축복이 그들을 감싸자 모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이와 이어질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이다. 덤으로 요통, 치통, 생리통 등 자잘한 병을 앓고 있는 이들도 적당히 치유가 되었다.
사람들이 감격하며 실란을 칭송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고맙습니다, 실란 님.”
“오오, 성녀시여!”
실란의 칭호를 들은 다른 필라넨스 신관들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바실리 왕국에서 이적해 안타레스 교구로 온 이들이었다.
순간 찬란하던 성광에 빠직 금이 갔다.
“남자거든요!”
울상을 지으며 실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사람들은 연신 ‘성녀 실란’을 연호할 뿐이었다. 저 아리따운 미청년을 놀려 먹고 반응을 즐기는 것도 축제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개중 좀 순진한 필라넨스 신관 몇 명은 실란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 대주교씩이나 되는 높은 신분임에도 저리 민중의 사랑을 받으시다니! 과연 저 어린 나이에 대주교의 자리에 오를 만한 분이로다!’
물론 실란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 울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누가 뭐래도 여성들이 부러워할 면을 전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날씬한 허리며 잘 빠진 팔다리에 매끄러운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며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에 놀라운 미모까지. 심지어는 나이가 스물인데 수염 한 올 없다.
법복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자신의 가는 허리를 내려다보며 실란이 인상을 썼다.
“아우, 이놈의 허리는 왜 군살도 안 붙는 거야?”
세상 인류의 절반이 치를 떨며 욕할 천인공노할 소리를 태연히도 해 대는 실란이었다.
미사를 끝내고 이제 아이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되었다. 모든 신관들이 아이들에게 사탕이며 쿠키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에겐 종족 구별이고 뭐고 없다. 그냥 마음에 들면 친구고 아니면 나쁜 놈일 뿐. 귀여운 엘프며 드워프, 인간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줄을 섰다.
오크와 트롤 아기들도 질세라 대열에 합류했다. 과자를 받고 다들 방긋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다.
“고맙습니다, 성녀님!”
“감사해요, 실란 언니!”
“잘 먹을게요, 실란 누나!”
열심히 놀림당하며 실란이 울상을 지었다.
“오빠다! 오빠라고 불러!”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래서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라 하는 것 같았다. 안 좋은 건 참 귀신같이 배운다.
개중에는 진지하게 당황하는 아이들도 있어 실란의 여린 가슴을 더더욱 찢어 놓고 있었다.
“엥? 오빠 아닌데? 언닌데? 우리 언니보다 더 예쁘게 생겼는데?”
저 말 하는 아이가 엘프 소녀라는 점이 더욱 서글펐다. 실란이 억지로 웃었다. 분명 눈은 웃고 있는데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다. 실란이 팔뚝을 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니? 이 오빠의 근육이 보이지 않니?”
이래 봬도 예전보다 몇 배나 두꺼워진 팔뚝인데!
하지만 아이들에겐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 모양이었다.
“아닌데. 근육은 저런 건데.”
엘프 소녀가 진지하게 다른 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대머리 사내들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필라넨스를 섬기는 몽크들이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실란이 엉뚱한 데 화풀이를 했다.
“저분들 좀 딴 데 보내요! 비교되잖아!”
괜히 불벼락 맞은 몽크들이 실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나이는 어려도 실란은 그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신관인 것이다. 참고로 필라넨스 교단에선 몽크승의 직급이 그리 높지 않다. 뭐, 하루 이틀 당하는 일도 아닌지라 다들 덤덤한 표정이었다.
“으음, 대주교께서 또 발작하셨군.”
“아니, 남자다워 보이려면 머리라도 좀 짧게 깎으시든가…….”
“붉은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워 놓고 남자로 안 봐 준다고 난리 치는 이유는 또 뭐래?”
사실 실란도 몰라서 머리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발도 해 봤고 빡빡머리도 해 봤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도로 장발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라넨스 교단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유례가 없는 괴사였다. 교단의 현명한 이들이 토론도 나눠 봤지만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 ‘여신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외모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내려 주심이 틀림없다!’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당장 ‘신이 내려 주신 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는 마켈린이 있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소리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샌 실란도 그냥 헤어스타일은 포기하고 근육 단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거리 저편을 바라보며 실란이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인파 사이로 두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가 어색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고, 백금발에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두꺼운 팔뚝에 반쯤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다. 표정에 아양이 가득한 것이 마치 주인에게 달라붙은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아이들이 저 남녀를 보더니 아는 척을 했다.
“앗! 폐하시다!”
“시리스 님이시네?”
실란이 눈을 빛냈다.
‘오잉? 레펜 씨랑 시리스가 데이트라도 하나?’
시리스와 레펜하르트가 실란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실란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나치는 두 사람을 보며 실란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좋아! 시리스 파이팅!’
아, 드디어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마음을 받아들였나? 실란이 기뻐하며 진심어린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의 사랑을 보살펴 주소서. 그래서 제발 이놈의 소문 좀 가라앉게 하소서!’
아무래도 필라넨스께서,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별로 들어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온갖 종족의 소녀들이 다급하게 실란을 재촉했다.
“어떡해요, 실란 님?”
“저러다 시리스 님에게 폐하를 빼앗기겠어요!”
또다시 실란이 발작했다.
“애당초 그런 사이 아니거든!”
현기증이 나 실란은 이마를 짚었다. 아, 이러다가 아예 역사에 남는 거 아냐? 안타레스 공왕의 애첩으로? 주먹을 꾹 쥐고 다짐, 또 다짐했다.
‘행사 끝나면 바로 카를 씨 찾아가서 같이 운동해야겠다!’
☆ ☆ ☆
아라난 그라드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전혀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앗! 폐하시다!”
“레펜하르트 폐하!”
“시리스 님도 계시네!”
모두가 그들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이며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레펜하르트는 그 외모 자체가 이미 이름표인 것이다. 다른 나라 왕처럼 굳이 자기 얼굴 화폐에 박지 않아도 그를 못 알아볼 국민은 없다.
일국의 왕이 호위병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본인이 곧 군대인데 무슨 호위병이 필요할까? 뒷골목의 소매치기나 깡패들도 레펜하르트가 나타난 순간 기겁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둘은 그렇게 거리를 거닐며 즐겁게 축제를 구경했다.
거리 좌우로 엘프들이 옷가게를 열고 아리따운 옷감을 진열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차린 무기점이며 철물점, 대장간 등도 열기를 뿜고 있다. 오크 특유의 가죽 제품들을 내놓은 상회도 있었다.
오크는 그리 경제관념이 없는지라, 직원은 오크지만 점주는 인간이었다. 타오반 상회의 입김이 들어간 상회가 오크들로부터 물건을 떼 와서 파는 것이다. 간간이 푸른 피부의 트롤들이 가판대를 열고 도자기를 늘어놓은 모습도 보였다.
엘프와 드워프야 그렇다 치고, 오크와 트롤이 버젓이 대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데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없다. 인간들 역시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물건을 구경하고 또 흥정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변했군.”
팔짱을 끼 채 시리스가 애교를 부리며 대꾸했다.
“전부 레펜하르트 님 덕분이죠. 정말 대단하세요!”
“고, 고맙구나.”
레펜하르트는 어색해하는 얼굴로 시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갑자기 시리스가 그의 방으로 난입하더니 대뜸 둘이서만 시내 구경을 하자고 조른 것이다.
시리스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레펜하르트다. 사실 그가 전생에 이종족 구하겠다고 날뛴 것도 사실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고 보면 시리스 때문이 아니던가? 그녀를 사랑하다 보니 세상도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고방식도 바뀌어 종국에는 저런 대업을 일으켰다.
마누라가 예쁘니 처갓집 기둥까지 예뻐서 마왕이 되어 버리다니? 통이 큰 건지 소시민적인 것인지 참 애매하다 하겠다.
그런 그녀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니 당연히 좋았다. 당장 하던 일 죄다 미루고 시리스랑 둘이서 시내로 나섰다. 물론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은 또 카를이었다.
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라도 역시 어색한 것은 어색한 것이다.
‘으음, 변한 모습이 좋긴 한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
지금 시리스는 평소와 달리 얇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날씬한 팔다리를 내놓은, 엘프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끈으로만 연결되어 있어 양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치마도 너무 짧아 허벅지가 여실히 보인다. 상당히 야한 옷차림이랄까?
저런 도발적인 차림으로 살살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데, 좋긴 좋지만 역시 걱정도 된다.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시리스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레펜하르트 님?”
전생 때의 표정, 전생 때의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금세 고민을 잊고 레펜하르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단다, 시리스.”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리스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좋아! 역시 플로라 씨 말이 틀리지 않구나!’
☆ ☆ ☆
이니야에게 치명타―그러니까 가슴 사이즈 문제―를 맞은 시리스는 고민했다. 홀로 고민하니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플로라를 찾아가 상의했다.
반색하며 플로라가 그녀를 맞이했다.
“인간 남성이라면 제가 전문이죠! 잘 찾아오셨어요!”
비록 시리스가 그녀의 상관이고, 또 모든 엘프들이 존경하는 수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인으로서는 플로라가 한참 인생 선배다. 어떻게 해야 레펜하르트를 유혹할 수 있겠냐는 말에 기뻐하며 조언을 주었다.
“일단 데이트를 신청하세요. 어디 놀러가고 싶다고 하세요.”
“……별로 놀러가고 싶은 데는 없는데요?”
업무도 바빠 죽겠는데 뭘 놀러가? 뜨악해하는 시리스를 플로라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중요한 건 행선지가 아니에요! 그분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죠! 안 그래도 축제 기간이잖아요?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다고 하세요!”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진지하게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뭐 입을지는 결정했나요?”
“네? 뭘 입다뇨?”
그냥 평소처럼 입고 칼 차면 되는 거 아닌가? 시리스가 어리둥절해했다. 플로라가 또다시 준엄한 호통을 쳤다.
“당연히 예쁜 옷으로 유혹해야죠! 제가 골라 줄게요!”
그러더니 대뜸 얇고 노출도가 높은 엘프 전통 복장을 들고 온 것이다.
“인간 남성은 무조건 야한 옷에 환장을 해요. 이거면 분명 먹힐 거예요!”
예전 같으면 기겁하며 손을 저었을 시리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옷을 받았다.
“이거 입으면 된다 이거죠?”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죠! 승부 속옷!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또다시 플로라가 야시시한 천 조각을 들고 왔다.
“무조건 도장부터 찍고 봐야 한다니까요? 남자는 단순해서 일단 밤만 같이 보내면 사랑하게 마련이에요!”
분명 조언은 조언인데, 꽤나 상식에서 뒤틀린 면이 있었다. 남자 잘못 걸리면 몸만 주고 버림받기 딱 좋은 조언이라 하겠다. 애초에 성노로 살았던 플로라가 제대로 된 연애관을 가질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리스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그렇군요.”
그녀도 노예로 살던 처지였으니 제법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납득이 쏙쏙 갔다. 플로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폐하께서 가끔 한숨 쉬시는 거 보고 가슴 아팠는데 다행이에요.”
옷가지를 쥐여 주며 플로라가 시리스를 격려했다.
“굴러온 돌에 지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