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290
“역시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 ☆ ☆
왕궁 가이라크의 공왕 집무실.
그곳에서 레페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행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현재의 안타레스 공국법은 모든 종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각 종족의 문화를 최대한 존중해 최대한 공평하게 만든 법이었다. 이상 자체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이진 않았다.
“각 종족마다 가치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법률 역시 그에 맞춰야 합니다. 당장 현재의 형벌은 각 종족에 따라 유리한 부분과 불리한 부분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중대한 범죄를 지었을 때 손발을 자르는 것은, 다른 종족에겐 충분히 범죄 억제력이 있는 공포스러운 형벌이다. 하지만 트롤에겐 그냥 매 몇 대 맞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범죄에 따라 감옥에 넣고 노역을 시키는 것은 다른 종족에게는 충분히 형벌이지만 드워프들에게는 평소 생활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라지만 그 법은 실제로 공평하지 않았다. 처벌의 범위나 강도 역시 너무 약했다. 애초에 저 법은 각 종족이 서로 존중하며 화합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만든 법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사형의 영역을 넓힐 수도 없지 않은가?”
카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해야 합니다.”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드리워진 두려움은 죽음뿐이다.
“법은 지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국가는 법의 공평성을 중시하지 그 형벌의 강도를 낮추려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국민들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잠시 말문을 흐리다 카를이 다시 말했다.
“지금 레펜하르트 님의 태도는 인군도, 성군도, 현군도 아닙니다. 그냥 물러 터진 것일 뿐이지요.”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카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 준다지만 방금의 간언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면 난 이분을 주군으로 여기지도 않았을 터다.’
과연,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잠깐 울컥하긴 했지만 이내 카를의 말이 타당함을 인정했다.
“아프지만…… 옳은 지적이군…….”
전생과 다른 길을 가려 했다. 그러다 보니 전생 때처럼 냉혹하게 손쓰는 일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네. 잠시 고민할 시간을 주게.”
카를이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가 신하인 그의 의무였다. 이 이후는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를 뿐이다.
“폭언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이는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알겠네.”
카를이 다시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아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이종족의 수가 적을 땐 이런 일이 없었다.
다들 억압 속에서도 명예와 긍지를 지키던 이들이었다. 고결한 영혼을 유지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의지 견정으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구출되어 자유로워진 이들도 그들의 분위기를 본받아 위대한 조상의 문화를 따라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수가 많아지자, 저들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일단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선 이들은, 하는 짓도 인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똑같이 서로를 질시하고 무시하고 천대하고 학대하고 미워했다.
그래, 전생 때도 이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의 국법은 전생의 제국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이 법으로도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역시 그때와 건국 시간이 너무 달라서 그런 건가?’
그때는 이처럼 급박하게 나라를 세우지 않았다. 이종족을 규합하고 조금씩 구출하고 점점 인구를 늘리며 점진적으로 제국의 위치까지 올랐다. 화합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일어나는 사태는 너무 심하다…….
“으음…….”
그때 집무실에 마켈린이 들어왔다.
“고민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레펜하르트 님.”
“안 할 수가 없지 않소?”
퉁명스레 대꾸하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 건지…….”
“전 짐작이 갑니다만?”
“그렇소?”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 포트가 내려 준 순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켈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종종 제게 말씀해주셨지요. 레펜하르트 님의 전생, 안타레스 제국에 대해서.”
“그랬지. 그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소, 분명.”
“당연한 이야기지요.”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당시의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종족 별로 계급이 확실히 나뉘어 있지 않았습니까?”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요? 나는 분명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거늘.”
“그야, 법적으로는 그렇지요. 나뉜 것은 계급이라기보다는 직종이었고 법적으로는 모두 평등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동등하다고 외쳐 봐야 농민과 그들을 관리하는 행정관이 같습니까? 상점의 주인과 하인이 같은 지위일까요? 법적, 도덕적으로 평등하다고 선언해 봐야 직업에 따라 위아래는 생기는 법입니다.”
마켈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들은 안타레스 제국은 누가 뭐래도, 인간이라는 최하층민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동등하게 대했다고 믿는 레펜하르트 님 입에서 들은 것이 이 정도니 실제로는 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통으로 학대할 ‘인간’이라는 대상이 있었으니 이종족들끼리 크게 다툼이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원래 사람은 공통의 적이 있을 때 단결하니까요.”
레펜하르트가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날아드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요.”
“다른 이유도 있단 말이오?”
“네, 레펜하르트 님이라는 존재 말입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10서클의 대마법사, 누가 뭐래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마왕이었다. 반면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인간의 한계를 ‘살짝’ 뛰어넘은 정도인 것이다.
“전 레펜하르트 님의 마법을 실제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플린 공략 이야기는 들었지요. 솔직히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직접 그 힘을 본 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분명 전 인류가 공포로 떨었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공포를 느낀 것은 인류만이 아니었다.
같은 편인 이종족에게조차도 공포스러운 힘이었다. 손짓 한 번에 산이 날아가고 외침 한 번에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심지어 그러고도 전혀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마왕의 모습은 적아를 막론하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생 때와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성격도 상당히 바뀐 편이었다.
제플린의 사례나 침략해 온 타국의 적을 몰살시킬 때처럼,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대를 적이라 인식하고 나면 지독하게 냉혹해지는 자였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그의 기준은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그 적아의 기준이 만약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같은 안타레스 제국민이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당시에는 레펜하르트 님이 절대적 공포의 대상으로 국민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법과 도덕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인 억제력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오? 지금이라도 10서클 마법을 선보일까?”
‘미티어 폴 정도라면 주 1회는 가능한데…….’
레펜하르트가 그 생각을 하며 묻자 마켈린이 기막히단 얼굴을 했다.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꼭 저런 식으로 생각이 도나?
“그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국가는 어버이와 같습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존경과 경외, 두려움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어버이지요. 그래야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마켈린은 카를의 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었다. 교육과 사상 변화로 국민들이 변하길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늦다. 그동안 무수한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할 테니까.
“원래 건국 초기에 굳건한 법으로 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인간들에게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카를 재상의 제안에 찬성합니다.”
“으음…….”
레펜하르트가 다시금 신음을 흘렸다. 마켈린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마켈린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레펜하르트 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늙은 드워프가 고개를 들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저 강자와 약자라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요. 아마 입장이 역전되었었다면, 추악한 성품의 드워프 종족이 고결한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자의 눈동자를 빛내며 그가 단언했다.
“우리도, 인간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2
현재 안타레스 공국에 살고 있는 이종족들은 모두 크고 작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억압받고 살다 겨우 해방된 이들이니, 변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을 리 없다.
그중 가장 심각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오크와 엘프의 성비였다.
인간에게 있어 오크 여성과 엘프 남성은 노예로의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키우는데 돈 들이지 않고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로워진 엘프들의 남녀 성비는 1:10에 가까웠다. 반면 오크의 남녀 성비는 10:1이었다.
남자만 너무 많은 종족과 여자만 너무 많은 종족.
이 두 종족이 한데 어울려 사니 결국 예정된 문제가 터져 버렸다. 남자가 남아도는 노예 출신 오크들이 성욕을 참지 못하고 엘프 여인을 강간한 것이다.
자유로운 오크와 엘프들이 어울려 살 땐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오크 기준에서 다른 종족의 여성은 다들 ‘비만’이었다. 아무리 몸매가 늘씬해봐야 근육이 없으면 뚱뚱이 취급하는 것이 오크다. 그렇다 보니 총각 오크들도 엘프나 드워프 여인을 넘보는 일은 전혀 없었다. 트롤 여성 쪽은 꽤 심미관이 맞았지만, 워낙 숫자가 적어 만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래 전통의 오크들은 여성을 존중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였다. 보다 자연의 법칙에 가깝달까? 여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남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불명예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물든 노예 출신 오크들에겐 그 위대한 조상의 문화가 전해지지 않았다. 미의식 역시 인간에 가까워졌다. 또한, 인간이 언제나 마음대로 엘프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쉽게 보아 왔다.
그렇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오크들이 생긴 것이다.
“어차피 엘프들은 변변찮은 남자도 없지 않나? 과부로 늙을 불쌍한 여자들에게 남자 맛을 보여 주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야?”
아라난 그라드, 오크 지구.
수십 명의 오크를 앞에 두고 한 무리의 엘프가 모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그 간악한 자들을 불러내시오!”
단하임 일족의 수장, 렐하드였다. 그는 지금 일족으로 받아들인 노예 출신 엘프 여인들을 대변해 이 자리에 왔다. 얼마 전, 여섯 명의 오크에게 강간당한 여인들이었다.
렐하드 앞에 선 이는 회색 오크의 수장, 오러 유저 하다툼이었다. 그는 제플린 공략 시절, 렐하드와 함께 도적단인 척 꾸미고 함께 노예들을 구출한 적이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 평소엔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하다툼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힐끔 등 뒤에 무릎 꿇은 여섯 명의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죽도록 두들겨 맞았는지 전신이 알록달록했다.
하다툼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으음, 내 말하지 않았소? 이놈들은 이미 벌을 받았다고.”
렐하드의 표정이 더더욱 살벌해졌다.
“여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고 어찌 매타작으로 벌이 끝난다 말이오! 목을 베어도 모자랄 것을!”
하다툼의 표정도 점점 구겨졌다.
“아니, 그럼 저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저놈들이 엘프들을 죽이기라도 했소? 저 병신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사실 그쪽 여인들이 무슨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잖소?”
두 종족 간의 문화 차이가 빚은 일이었다.
분명 오크들은 여인의 선택을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여인의 정조까지 중시하지는 않았다.
오크들에게 있어 여인은 평생 살아가며 수십 명의 남자를 고를 수 있었다. 남자들도 처녀보다는 오히려 경험 많은 여인을 선호했다. 애를 많이 낳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산력이 입증되었다는 증거니까. 오크 여인에게 있어 처녀성이란 그저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이며, 빨리 버릴수록 자랑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반면 엘프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하며 한 남자를 사랑하면 평생을 함께한다. 인간의 네 배나 되는 수명을 지닌 그들이니만큼 결혼에 대한 의식도 매우 굳다. 여인이 남편 아닌 다른 이에게 정조를 빼앗긴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한 수치이며 모욕이다.
“무, 무슨 그런…….”
렐하드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여인을 죽음보다 못한 꼴로 만들고 저런 뻔뻔한 소릴 하다니!
“거참, 억지가 너무 심하군!”
하다툼도 성질을 내며 투기를 피워 올렸다. 아니,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쪽이 목숨을 앗은 것도 아닌데, 그 대가로 생명을 요구하다니 이 무슨 불합리한 요구인가!
양쪽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렐하드가 분노를 못 참고 이그나시스를 발동시켰다.
“이 뻔뻔한 작자들!”
하다툼도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게야!”
오러와 불의 정령이 사방을 찬란하게 빛낸다. 각 부족의 두 수장이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