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
소용없었다. 이 근육질 노인네는 뭔 소리를 해도 전부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공터에 도착하자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언반구도 없이 대뜸 공터 한가운데 박힌 거대한 나무 말뚝에 묶었다.
“에? 에에?”
두 팔을 뒤로한 채 말뚝에 묶인 레펜하르트는 연신 당황하며 눈을 껌벅였다. 어째 자세가 영 불길해 보였다. 보통, 죄수들 처형할 때 이런 모습을 시키지 않던가? 레펜하르트가 다급하게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차였다.
“옜다.”
간략한 한마디와 함께 제라드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렸다.
“읍읍?”
입이 막힌 채 공포에 질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며 제라드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공터 저편으로 가더니 커다란 대나무 줄기를 한 아름 들고 왔다.
“자, 그럼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그러더니 대나무 하나를 움켜쥐고 양손에 침을 뱉는다. 레펜하르트의 공포가 더더욱 짙어졌다.
“으으읍!”
제라드가 대나무로 레펜하르트의 복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빠악!
“……!”
죽도록 아팠다. 비명을 못 지르니 몇 배는 더 아픈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벌벌 떨며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도대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곧바로 매질이 이어졌다. 대나무가 허벅지를 때렸다. 역시 죽도록 아팠다. 이번엔 옆구리를 때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남부 할라인제 대나무는 강철의 강도와 고무의 탄력성을 모두 겸비해 명성이 드높다. 그 흉악한 물건으로 제라드가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으아아으아으압압!”
재갈이 물린 채 레펜하르트는 연신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매질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강도 높게 전신의 모든 부위를 골고루, 철저히, 모질게 다지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억울하다든가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는 의문 같은 것은 모두 뇌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시, 시리스. 나 이대로 가나 보다…….’
순간 시리스가 저 푸른 하늘 저편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환영이 다 보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간신히 두 번째 삶을 얻자마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했다. 삶에 대한 끈적끈적한 미련을 안고 그는 애써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난 못 죽어! 이대로는 절대 못 죽어!’
한편 제라드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어째 제자를 패는 손맛이 조금 달랐다. 여느 때보다 좀 더 쫀득한 느낌이랄까? 평소처럼 육체를 단련하는 특유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맞고 있다면 이럴 리가 없다.
‘진짜로 기억 상실인가?’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행법이 하도 단순, 무식, 과격한 것이다 보니 종종 단기성 기억상실증이 생기곤 했다. 제라드가 수행받을 때도 두어 번 정도 기억이 날아간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경험자답게 그는 그 해결책도 잘 알고 있었다.
‘패다 보면 다 도로 낫기 마련이지.’
기억을 되돌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억을 날아갔을 때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다. 제라드의 손속이 더욱 매서워졌다.
퍽퍽퍽퍽퍽퍽!
맑은 하늘 아래 북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실로 심금을 울리는, 영혼이 담긴 북소리였다. 정말로 북에 영혼이 담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사, 사람 살려어어어어!’
☆ ☆ ☆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륙에 널린 무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사상을 지닌 무문이다.
보통 무인들, 기사가 되었건 검사가 되었건 무투가가 되었건 간에 수행 방법의 기본 골자는 변함이 없다. 호흡을 갈고 닦아 육체를 단련하며 여러 기술을 익혀 전체적인 무인으로서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 이 과정 속에서 그 방법이 천차만별로 갈리고 그에 따라 여러 유파가 생기긴 했지만 적어도 기본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은 그 기본을 부인했다.
“일단 완벽한 육체를 만들어라!”
사정없이 매질을 해 대며 제라드가 소리쳤다.
“인간이 무기를 드는 이유는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약하니 갑옷을 입고, 발톱과 이빨이 없으니 검과 창, 도끼를 들어 그것을 대신하려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맞는 와중에서도 레펜하르트는 의아해했다. 아니, 인간이 도구를 쓰는 것이 왜 어리석단 말인가?
제라드가 바로 답을 주었다.
“그것은 도피다!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지 못한 자의 치졸한 도피인 것이다! 무인이라면 응당 자신의 약한 부분을 단련해 극복해야 하는 법이다!”
레펜하르트는 기가 차서 입을 쩍 벌렸다. 마법사로 살아온 50 평생 이렇게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은 처음 접해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재갈이 물려 있어 티가 나진 않았다. 제라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선은 부서지지 않는, 완벽한 불굴의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손은 쉴 새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면서도 제라드는 느긋하게 짐 언브레이커블의 사상을 설명해 주었다. 제자가 기억상실에 걸렸으니, 익숙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면 좀 더 빨리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다른 유파처럼, 육체 단련과 기술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고 도달해야 할 무의 경지는 높고 높은데, 그렇게 이거저거 찔끔찔끔 해 가지고 어느 세월에 경지에 오르겠냐는 것이다.
“자고로 세상 모든 일은 한 우물만 파는 놈이 결국 대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단은 육체부터 완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로 기술 수련을 하면 그때는 육체가 최고조로 활성화되었으니 어느 기술이건 쉽게 습득할 수 있고 나쁜 버릇 들어서 수정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육체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육체를 강철로 바꾸는 것이었다.
“인간은 쇠와 같다. 쇠도 인간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왜 쇠랑 같아! 시작부터 심각하게 오류가 있어, 당신!’
레펜하르트는 절규했지만, 딱히 제라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의 뼈는 부러질수록 더 단단해지고, 근육 역시 타격을 입을수록 더욱 두꺼워지고 내구성도 높아지는 법이니까.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다 한계가 있다. 보통 사람이면 그 전에 골병들어 관에 누울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고른 제자다. 믿어라. 네 육체는 한계가 없다! 강철이 될 수 있다!”
제라드가 호쾌하게 외쳤다.
모든 인간이 이처럼 단련해서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 좋은 쇠만이 단조하여 강철로 만들 수 있듯, 재질이 받쳐 주는 인간이어야 강철 같은 육체로 변화할 수 있는 법. 그리고 이 제자는 제라드 자신이 전 대륙을 30년 동안 뒤져서 겨우 찾아낸 완벽한 재질의 소유자였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히 넘어서는 뼈와 근육을 지닌, 그야말로 짐승 같은 놈이었다.
이 소년을 발견하고 제라드가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미지해라. 너는 무너지지 않는 거악이다. 어떤 풍상도 너를 흔들리게 할 수 없다.”
‘아으,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네 속에 있는 대해를 연상해라.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흐르며 광포한 힘을 보여 세상을 덮는다. 그 대해가 네 속에 있다. 바다를 끄집어내라.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 육체를 얻어라!”
‘바, 바다…… 대해…….’
처음에는 기가 막혀 어이가 없었지만, 정신없이 맞다 보니 정말 정신이 없어 불만을 가질 여유조차 사라져 버렸다. 레펜하르트는 무의식중에 제라드의 말대로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아픔이 가셨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략 세 시간 정도, 태양이 정수리를 넘고서야 제라드의 몽둥이질이 끝을 맺었다.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제라드가 레펜하르트를 묶은 밧줄과 재갈을 풀었다.
“그럼 쉬고 있거라. 내 준비를 해 두마.”
밧줄이 풀리자마자 레펜하르트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쓰러지면 코피 정도는 족히 났겠지만, 그토록 처맞고도 살아 있는 육신이다 보니 그냥 땅에 엎어진 정도론 흠집도 나지 않았다. 아픔조차 안 느껴졌다.
레펜하르트를 내버려 둔 채 제라드가 성큼성큼 통나무집으로 걸어갔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죽었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자신을 죽인 테스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튼튼해서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흐흐흑!’
애초에 이런 육체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사실은 이미 뇌리에 남아 있지도 않는 레펜하르트였다.
집으로 들어간 제라드는 창고에서 항시 쓰던 물건을 꺼냈다. 통째로 대리석으로 된, 성인 장정 하나가 푹 잠기고도 남을 거대한 목욕통이었다. 그리고 그는 목욕통에 물을 채웠다.
과연 당대 권왕답게 물 채우는 법도 호쾌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양동이에 물을 떠서 열심히 목욕통으로 옮겼겠지만 이 근육 노괴에게 그런 귀찮은 과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목욕통을 통째로 들고 뒤쪽 연못으로 가 푹 담갔다가 꺼내면 땡이었다. 저 거대한―게다가 통째로 대리석인!― 목욕통을 세숫대야 취급하며 가볍게 들어 물을 뜬 뒤, 제라드는 거기다 웬 액체를 드럼째로 들이붓고 온갖 풀들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왔다. 제라드가 하는 짓거리를 유심히 보던 레펜하르트가 공포에 젖어 질문했다.
“뭐, 뭡니까?”
“뭐긴. 쇠를 두드렸으면 식혀야지.”
대수롭잖게 대꾸하며 제라드는 레펜하르트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다시 예의 그 ‘어미 고양이 새끼 물어 가는 방식’이었다. 이놈의 노인네는 사람 드는 수법을 이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근육질 노인네가 근육질 제자를 공주님 안듯이 들고 가면 그것도 나름대로 호러일 것 같기는 하다.
“자, 그럼…….”
제자의 뒷목을 잡은 채 제라드가 오러를 운용했다. 황금빛 오러가 일렁이며 솟구치더니 이내 넝마가 된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으, 으윽?”
기묘한 기분에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육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아 가는 걸 느꼈다. 예전 마법으로 비슷한 효과를 봤었기에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육체가 활성화되고 전신의 재생력이 증폭되며 어긋난 뼈와 늘어진 인대, 퉁퉁 부은 근육이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가는 느낌.
쉽게 말해서, 제라드는 지금 오러로 제자의 전신을 치유 및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 짐 언브레커블 특유의 오러는 특히나 육체를 다루는 운용법에 있어 대륙 최강을 자랑해 이런 효능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오러를 흘려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돌본 뒤 제라드는 제자의 전신을 홀랑 벗겨 버리더니, 입에 커다란 대롱을 물렸다. 물론 여전히 제자의 의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젠 반항할 기분도 안 들어 레펜하르트는 순순히 대롱을 물었다. 뭐, 목욕통에 물 받을 때 대충 짐작하기도 했고.
‘아니, 그냥 내가 벗어도 되는데 왜 굳이…….’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은 상태, 스스로 탈의할 기력조차 없다. 딱히 제라드가 어린 소년 제자 옷 벗기는 취미가 있어서 이러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자, 그럼 한 시간 뒤에 보자꾸나.”
제라드는 레펜하르트를 머리끝까지 목욕통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었다. 뚜껑엔 대롱만 한 사이즈의 구멍이 나 있어 어떻게든 숨을 쉴 수는 있었다. 물속에 둥둥 뜬 채 그는 멍하니 물속을 살펴보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잘 보니 이거 내용물이 장난이 아니었다.
‘맙소사, 힐링 포션에 게렐 초에 페탈스 꽃잎에…….’
힐링 포션은 어지간한 마법사 길드에서 주먹만 한 병당 은화 열 닢은 줘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걸로 목욕통을 채우다니? 물론 물 좀 많이 타긴 했어도 여기 들어간 힐링 포션의 양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옛 이야기 중에 피부 미용을 위해 우유로 목욕한다는 왕비 이야기가 있는데, 그 왕비가 이 모습을 보면 자신의 검소함을 만방에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들어간 약초들도 고가품이긴 마찬가지. 하여튼 회복에 좋다는 비싼 약초란 약초는 다 들어가 있었다. 물속에 몸을 담그자 놀라운 속도로 상처가 아물고 육체가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스스로가 얼마나 강인해졌는지 또한 절실하게 와 닿았다.
‘아주 근거가 없는 수련법은 아니었다 이거지…….’
죽지 않을 만큼 전신의 근골을 단련한 뒤 오러의 힘과 회복 약수로 빠르게 전신을 치유한다. 이렇게 하니 골병들기 전에 바로 육체가 재생하며 더욱 단단해진다.
‘하긴, 이렇게 했으니 소년 테스론의 육체가 지금껏 버텨 왔겠지. 사실 이 정도면 트롤도 맞아 죽을 판인데.’
확실히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만했다. 물론 절대 심정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강해져야 하는 거냐? 남들은 그냥 평범하게 해도 잘만 강해지더만.
‘아마도 테스론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수행을 반복해왔겠지?’
자신의 마법을 그토록 버텨낼 수 있었던 테스론의 저력이 단숨에 이해가 갔다.
“후우…….”
대롱 너머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회복 약수가 전신을 어루만지며 고통이 점점 옅어진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며 상황을 파악할 여유가 생긴다.
약수 속에 동동 뜬 채 레펜하르트는 차분히 상념에 잠겼다.
‘일단 여기가 과거인 것은 분명하고…….’
테스론의 나이를 볼 때 한 30년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 같다. 왜 테스론의 육체로 전생했는지도 가설은 있었다. 시공 회귀 주문이 발동하는 바로 그때 테스론의 공격이 마법 사이를 꿰뚫으며 마력이 폭주했었다. 아무래도 그 여파인 것 같다.
‘가만있자. 그럼 지금 이 시간대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레펜하르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졌다.
그럼 이 시간대에는 어린 시절의 레펜하르트도 있는 건가? 한 시공간에 동일한 두 영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법의 상식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의 상식으로는 시공을 뒤트는 것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 이미 레펜하르트가 시간을 거스른 시점에서 그 상식이란 것도 믿을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왕년 궁극을 바라보았던 마법사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무래도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겠군.’
첫 번째는 미래의 레펜하르트의 영혼을 지닌 이 육체와 현재의 소년 레펜하르트가 공존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어쩌면 지금 내 육체에 권왕 테스론의 영혼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인가?’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법의 극에 달했던 그라 할지라도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양쪽 모두 그가 익혀 온 마법의 상식 밖의 일이니까.
‘문제는 이것이 현재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이냐로군.’
일단 또 하나의 자신이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동일한 두 영혼이 서로 접촉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혼의 정체성은 세계를 구성하는 불변의 법칙, 재수 없을 경우 둘 중 한 명의 영혼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마법사인 레펜하르트는 이 정도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 레펜하르트가 정식 마법사로 활동하게 되는 건 적어도 10년 후에나 일어날 이야기. 과거를 되새겨 보면 지금의 그는 시기상 델피아의 마탑에서 죽어라 공부만 파고 있을 시기였다.
‘적어도 당분간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일은 없을 것 같고.’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 테스론이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차지했다면?
테스론 역시 회귀 전생했다면 과거의 기억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처지에서 레펜하르트의 처지 역시 유추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자신을 노릴 것이다.
‘음, 이쪽 역시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려나?’
테스론의 강함은 그 육체에서 비롯되는 것, 그러나 지금 그의 육체는 레펜하르트가 차지했다. 아무리 테스론이 왕년의 경지를 기억하고 있다 해도 기반이 되는 육체가 빈약한 어린 소년 레펜하르트의 것인 이상 당장 권왕으로 돌아오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아니, 여기 수련하는 꼴을 보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수련법은 절대적으로 스승의 도움이 필수다. 혼자서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아니야, 테스론 정도의 경지라면 그 상태에서도 스스로 수행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무래도 어느 쪽이건 확인을 해야 제대로 대처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일단은…… 이 지옥에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인데…….’
레펜하르트의 상념이 점점 끊기기 시작했다. 계속 생각을 하고 있자니 육체가 너무 피로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