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09
요새의 명칭을 떠올리며 에그라드 경은 비웃음을 흘렸다. 진금 엘드릴, 지상 최강의 금속 이름을 요새에 붙이다니? 대륙 유수의,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하는 역사 깊은 요새들도 감히 하지 않는 짓이다.
“신흥 국가답게 패기만 넘치는 거죠.”
“흥, 패기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보여 주마, 안타레스! 감히 바실리를 상대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에그라드 경이 문득 눈동자에 분한 빛을 띠었다.
그들은 이미 안타레스의 강력한 전력 대부분이 크로방스 서부 전선으로 차출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진군함을 알면서도 저런 짓을 한다는 것은 바실리 왕국을 심히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자신만만하게 에그라드 경이 중얼거렸다.
“과연 오만한 짐 언브레이커블. 권왕 레펜하르트여, 바실리 왕국의 힘을 보여주겠다!”
☆ ☆ ☆
제국보다 하루 늦게 안타레스의 국경을 넘은 바실리 연합군은, 재쿼드 평야 끝자락에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일찌감치 요충지를 선점하고 요새끼리 강력한 연대를 꾸린 크로방스 서부 국경선과 달리 아직 역사가 짧은 안타레스 남부 국경은 그렇게까지 완벽하지 않다.
엘드릴 가드는 분명 수도 아라난 그라드의 관문이라 불리는 중요한 요새고, 그곳을 뚫리게 될 경우 바로 왕도까지 진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크로방스 서부 국경처럼 돌아갈 길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엘드릴 가드가 위치한 협곡 좌우는 높은 고원 지대, 군대가 진격하기 쉽지 않은 지형이지만 돌아서 못 갈 정도로 험준하지도 않았다.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로 구성된 부대라면 엘드릴 가드의 손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크게 돌아 수도 정복을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바실리 연합군은 사만 오천의 정병으로 엘드릴 가드를 향해 진군하는 한편 일만의 신성군을 요새 서쪽 고원으로, 오천의 세이어 성기사단에 오천의 보병을 더해 동쪽 고원으로 보냈다. 어차피 연합군, 지휘 계통이 통일되지 않아 함께 싸워 봤자 손발이 맞지도 않을 테니 이쪽이 훨씬 각 부대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포진이었다.
엘드릴 가드로부터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원 지대. 사천 명 정도의 인간과 이종족 혼성 병력이 고원 입구에 포진한 채 다가오는 기마부대의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휘날리는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아스레일 경이 적군을 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카를 각하의 예측대로 신성군이 이쪽으로 향했군.”
적이 세 부대로 갈라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구성원이 바실리 본진과 신성군, 성기사단으로 나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측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니까. 군사학을 겉핥기로 배운 아스레일조차도 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신성군이 이 서쪽 고원으로 향하고, 성기사단이 동쪽으로 향할 줄 알았을까?
‘설마 반반 확률로 찍으신 건 아니겠지?’
잠깐 딴생각을 하다 아스레일은 스스로가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카를은 정확하게 신성군의 성향과 병력에 맞춰 이쪽에 군대를 보냈다. 세이어의 성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만약 대충 찍은 것이었다면 이토록 확신을 담아 부대 운용을 하진 않았겠지.
‘대체 어떻게 아신 걸까?’
☆ ☆ ☆
국경이 침공당하기 며칠 전, 아라난 그라드의 황성 가이라크.
레펜하르트는 아스레일과 같은 의문을 카일에게 던지고 있었다.
“대체 신성군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거요? 솔직히 어느 부대가 그쪽으로 향해도 별 차이 없어 보였는데? 군사학을 깊이 공부하면 그런 것도 보이나?”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군사학에 저런 게 있을 리가 있습니까? 공왕님 말씀대로 군사학적으로 볼 땐 둘 다 반반 확률이지요.”
“그럼?”
“제가 신경 쓴 쪽은 전략적인 이치가 아닙니다. 각 부대 지휘관의 발언력 쪽이지요.”
바실리 연합군을 담당하는 세 축, 바실리 본군의 에그라드 경과 신성군의 이라나드 공작, 그리고 성기사단의 크리스틴 경은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지위다. 지휘 계통상으로 저 셋은 동맹 관계일 뿐이며 상하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지닌 경험, 나이가 다른데 상하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카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비웃듯 말했다.
“일단, 저 셋 중 가장 잘나가는 양반은 누가 뭐래도 이라나드 공작입니다. 에그라드 경이 아무리 바실리에서 큰소리쳐 봤자 왕족도 아닌 방계 귀족, 오러 유저가 되어 큰소리치긴 하지만 가문 자체는 그리 볼 것이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잇는다.
“크리스틴 경은 더더욱 그렇지요. 덩치만 컸지 이제 겨우 20대 후반의 여인, 발언력이 아무래도 약하지요. 사실 명성이나 실력이나 이라나드 공작은 고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 유서스 경보다도 밑이니까요.”
카를이 지도를 가리켰다.
“현재 아라난 그라드를 도모하기 가장 좋은 위치는 엘드릴 가드 동쪽으로 우회해 프란트 고원을 경유하는 것입니다. 잘만 된다면 최단 시간에 아라난 그라드에 도착할 수 있지요. 반면 엘드릴 가드 서쪽은 라키드 산맥의 지류가 중간에 뻗어 있어 아무래도 진군이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펜하르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그러니까, 이쪽 진군로를 차지하는 부대가 제일 공을 세울 확률이 높다, 이 말씀입니다. 아라난 그라드에 첫 입성하는 부대라면 그 영광 역시 이 전쟁에서 제일 빛날 테니까요.”
“과연…… 공적을 탐하는 지휘관이라면 모두 이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어 할 것이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카를은 빙그레 웃었다.
“들은 대로라면 이라나드 공작은 그리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에게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라나드 공작의 휘하에 있는 일만의 신성군은 원래 그의 부하가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모인 기사들입니다. 지휘해야 하는 공작 입장에서는 저들에게 전장의 명예를 안겨 줄 의무가 있으니, 공적을 탐하지 않을 수 없지요.”
“크리스틴 경도 마찬가지일 테고?”
“네, 아마 에그라드 경도 내심 엘드릴 요새 공략은 수하에게 맡기고 별동대를 꾸려 동쪽 진군로를 택하고 싶었을 겁니다. 요새 공략은 굳이 그가 없어도 가능한 일이니.”
이는 실제로 군사 회의 당시 에그라드 경과 이라나드 공작, 크리스틴 경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셋 모두 동부 진군로로 향하고 싶어 했고, 또 자신이 그곳으로 향하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머나먼 아라난 그라드에 앉아, 카를은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바실리 연합군 내의 속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이 같으면, 결국 발언력 센 쪽이 이기기 마련이지요.”
이해한 레펜하르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쉽게 말해서, 남은 두 사람은 짬밥에서 밀린다 이거지?”
“속된 말로 표현하면 그거죠, 뭐.”
고개를 주억거리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어, 그럼 그냥 요새 무시하고 전부 동쪽 우회로로 향하는 것 아닌가, 혹시? 이야기 듣고 보니 그쪽이 제일 좋아 보이는데.”
“그건 아닙니다. 동쪽 우회로가 가치가 생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엘드릴 요새에 안타레스의 본군이 위치하고, 또 아라난 그라드 방비를 위해 라키드 산맥으로도 군대를 보낼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바실리 연합군은 매가 양 날개를 펼치고 부리로 목표를 쪼아 대는 형국, 그중 오른 날개가 가장 강하다고 해서 몸통과 왼 날개 없이 매가 날 수 있겠습니까?”
마치 학생에게 설명하듯, 카를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단 이라나드 공작이 동쪽 우회로로 향한 이상 에그라드 경과 크리스틴 경은 다른 쪽 포진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드릴 요새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그곳에 오러 유저급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상황이 저렇게 되면 저들은 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뭐, 정말 레펜하르트 님 말씀대로 움직여 주는 바보들이라면 이 전쟁, 고생도 안 하겠습니다만 그렇게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요?”
“뭔가 복잡하구만.”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차라리 마법이 쉽지, 저런 걸 죄다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네?’
카를이 별것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재차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요. 사람 자체가 복잡한 존재인데,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이 복잡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2
신의 뜻에 따라, 대륙 각지에서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인 일만의 명예로운 기사들.
그들 앞에 서서 중후한 인상의 중년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위대한 세이어의 용사들이여!”
화려한 은빛 갑옷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눈처럼 새하얀 백마 위에서 중년 기사, 이라나드 공작은 찬란한 블레이드 오러를 뿜어냈다. 보랏빛 검광이 기둥처럼 솟구쳐 모인 모든 기사들의 시야를 밝혔다.
“간악한 이단자, 노예로 지음받은 비천한 것들이 감히 그분의 뜻을 거역했도다!”
말을 몰며 진열 앞을 차례로 이동한다. 그때마다 모인 기사들의 눈빛에 투지가 피어오른다. 이라나드 공작이 쩌렁쩌렁한 외침을 터트렸다.
“그분의 종으로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세이어여!”
“세이어를 위하여!”
“그분을 위해 검을 들겠소!”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전의를 불사른다. 비록 대륙 각지에서 모인, 저마다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기사며 기사단들이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로 뭉친다.
세이어!
세이어를 위하여!
☆ ☆ ☆
“흥, 세이어 따위야 내 알 바 아니지.”
아군 진지의 분위기를 살피던 황금빛 갑옷의 기사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감히 대놓고 할 말이 아닌지라 입 속으로 웅얼거리는 수준이지만, 어쨌거나 그가 딱히 불타는 신앙심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전혀 세이어에 대한 신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성군 부사령관의 지위를 차지한 이 기사, 그라임의 유서스 경을 향해 부관이 말을 건넸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단장님.”
부관은 왜 유서스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러스 자식…….”
적진을 보며 유서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이복동생, 사이러스를 해치우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은의 현자에게 협력했고, 가문을 떠나 테스론을 따르며 대륙을 떠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기껏 새로운 힘을 얻어 봤자 러스에게 비참하게 당하기만 했다.
기껏 믿었던 테스론은 권왕 레펜하르트의 손에 죽어 버렸다.
도저히 일대일, 정예들끼리의 전투로는 러스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꺼이 성전에 참가했다. 전장이라면, 군대와 군대가 붙는 전쟁터라면 러스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검사라면 모를까, 지휘관으로서는 분명 그가 러스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 확실하기에.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러스는 상대측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듣자 하니 바슈탈론 제국과 상대하기 위해 크로방스 쪽으로 가 버렸다 한다. 기껏 이번 기회를 기다린 유서스에겐 실로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이해한다는 듯 부관이 유서스를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저희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반역자에게 테네스의 천벌을 가할 기회를 놓치다니.”
유서스를 따르는 테네스 기사단 또한 이 기회에 가문을 배신한 이를 벌할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했다. 이미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자가 된 러스를 상대로 참 속 편하게도 말하고 있다 하겠다. 여전히 이들에게 러스는 배신자, 반역자, 그리고 가문의 천덕꾸러기일 뿐인 것이다.
다른 기사도 나서서 유서스를 위로했다.
“러스 본인을 벌하지 못함은 아쉬우나, 안타레스 공왕 역시 테네스 가문에 죄를 지은 몸. 안타레스가 무너지는 것 역시 배신자에 대한 벌이 될 것입니다.”
배신자 러스만큼이나 테네스 기사단은 권왕 레펜하르트도 증오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권왕으로 이름을 날린 시초는 바로 황금기사 유서스의 패배 덕이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복수를 달성해야 할 상대, 하물며 그는 배신자 러스를 거두어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버렸다.
테네스 가문으로서는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수하들의 위로에 유서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지. 안타레스 공국이 무너지면 그 배신자도 갈 곳이 없을 터, 그때 단죄해도 늦지 않다.”
잡념을 떨치고 유서스는 눈앞의 적에 집중했다. 고원 위쪽에 포진하고 있는, 러스만큼이나 증오스러운 안타레스의 이종족들을 향해.
마검 엘드란을 뽑아 들며 유서스가 투지를 불태웠다.
“오늘은 저들을 벌할 때로다!”
☆ ☆ ☆
이라나드 공작이 신성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투기의 외침을 터트리는 바로 그때.
안타레스군은 진중한 태도로 지휘관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안타레스의 용사들이여!”
이백의 안타레스 기사단, 그리고 공국 각지에서 모인 구백의 인간 경장기병들.
이들은 지금 굳은 얼굴로 창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눈앞의 신성군, 일만 병력은 실로 거대해 보였다. 하나하나가 이름난 기사단이며 강력한 무장과 갑주를 걸친 이들, 그에 비해 이쪽은 안타레스 기사단과 경장기병 모두가 가죽과 사슬을 섞어 입은 가벼운 차림이다.
병사들을 향해 아스레일 경이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두려운가?”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의 표정은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