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4
레펜하르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라드 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란타스는 이미 그가 제라드의 제자임을 확신한 듯했다. 원체 알아보기 쉬운 무문이었으니까.
란타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물었다.
“대체 그대 정도 되는 강자가 왜 고작 노예 따위에 연연하는 것이오?”
자기 정도 되는 강자가 노예 납치 따위에 연연하고 있다는 사실은 싹 무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분노할 부분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누가 노예냐…….”
순간 그의 전신에서 진득한 분노가 흘러나왔다. 란타스가 흠칫거렸다. 살기나 적의야 아까부터 철철 흐르고 있었지만, 이 기세는 뭔가 달랐다.
이건 보다 순수하고 직접적인 분노다!
“너희가 노예랍시고 끌고 다닌 이들도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연신 땅을 박차며 란타스의 정면으로 무식하게 돌진해 간다. 란타스가 인상을 쓰며 3단 찌르기로 응수했다. 세 줄기 오러의 창이 적색 잔상을 남기며 상대의 급소를 찔러 간다.
“한 번이라도 그들과 제대로 이야기해 봤느냐? 한 번이라도 그들이 노예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냐는 말이다!”
극심한 분노를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황금의 오러로 날아오는 창을 모조리 박살 내며 수소처럼 란타스를 쇄도해 간다. 당황해 란타스가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몰이해라는 단어를 얼굴 가득 떠올리는 란타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모두가 저랬다. 전생에서도 모두가 저런 반응이었다.
인류 전체에 뿌리박힌 저 불합리! 인간 외의 모든 것은 천하다는 저 굳은 인식!
두 발로 걷고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보고도, 그들에게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이 엘프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노예로 부리는가!”
순간 란타스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도 솔직히 도덕, 도리 따지며 살아온 놈은 아니지만 저렇게 어이없는 생각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받았기에 다른 종족을 모두 노예로 삼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주신 세이어가 정한 정명한 이치다.
“아니, 그럼 노예로 타고난 이들이 뭐 다른 것이라도 된단 소린가?”
멍청한 란타스의 반문에 레펜하르트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던 이들이 어째서 노예로 타고났단 말이냐!”
무자비한 공격이 연거푸 들어온다. 란타스는 당황하면서도 냉정하게 반격에 들어갔다. 칼날의 춤 앞에 레펜하르트의 피부 곳곳에 붉은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치명상은 없었다. 흥분한 와중에도 그토록 단련한 그의 육체는 스스로 최선의 공격과 방어 형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울분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엘프였다면 인간이 노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나?”
권력자가 오크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오크가 아니니까.
권력자가 드워프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드워프가 아니니까.
권력자가 엘프들을 노예로 삼았을 때 인간들은 환호했다. 자기는 엘프가 아니니까.
그리고 노예 제도가 대륙에 뿌리박힌 지금, 인간들조차 힘없고 약한 이들은 반노예가 되어 힘든 삶을 살기 시작했다. 농노 제도가 그것이다.
이미 한번 바뀐 그릇된 패러다임은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들을 노예로 삼는 걸 허용하면, 결국은 자신 역시 노예가 될 수 있단 말이다!”
이미 레펜하르트의 분노는 란타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힘없는 자신, 불합리에 가득 찬 이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란타스는 여전히 이해 못 하고 있었다. 그가 시리스를 힐끔 보더니 기막힌 얼굴로 뇌까렸다.
“아니, 그럼 엘프 따위가 인간과 같단 말이냐? 그대, 제정신인가?”
레펜하르트는 결국 폭발해 버렸다.
“시리스는 노예가 아니다!”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그는 바닥을 재차 박찼다. 울분에 찬 의지가 주먹에 실려 파괴의 힘으로 화했다.
란타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점점 더 상대의 몸놀림이 좋아지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을 잃고 강해진다는 건 모험담 속에서나 나오지, 보통은 이성을 잃으면 약점만 수두룩하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살짝 맛이 간 쪽이 더 움직임이 예리하다!
“뭐, 뭐야!”
하지만 란타스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사실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지금이 더 냉정한 상태였다. 아까까지는 그저 단순 무식한 이 육체, 테스론의 감정에 휘둘려 익힌 대로 체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 마법사로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는 아무리 분노해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마법사였던 자신을 되찾은 그는 분노와는 별개로 냉정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연거푸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려 상대를 압박한 뒤 하단을 노려 스텝을 제압한다. 그리고 그 위로 오러가 실린 권격을 퍼부어 움직임을 제한한다. 슬슬 란타스의 검술에도 익숙해졌다. 상대는 오러 능력자지만, 몇 년이나 주색잡기에 빠져 제대로 수행한 몸이 아니다. 그토록 죽어라 단련한 이 육체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의 힘을 빼 놓는 것처럼 레펜하르트는 연신 란타스를 압박해 갔다. 두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토록 사랑하고 사랑하던 이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고 소중한 상대가 노예라 불리고 있다. 용납할 수 없다. 결코 이런 세상은 용납할 수 없다.
“젠장!”
욕설을 토하며 란타스가 힘겹게 검을 휘둘러 3연속 베기를 날렸다. 연달아 회전해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팔꿈치 회전 치기를 날렸다. 바위도 베어 버릴 예리한 엘보 블로에 란타스가 후퇴하다 발이 꼬였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가 미들 킥을 날렸다. 상대의 가드를 부수고 타격을 주는 킥이었다. 팔을 들어 막는 순간, 란타스는 온몸이 마비되는 걸 느꼈다.
‘아, 안 돼!’
순간 그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타아앗!”
강렬한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의 주먹이 란타스의 명치에 꽂혔다. 단 일격에 척추가 박살 나고 전신 가득 통증이 퍼져 갔다.
“크어억!”
피를 토하며 란타스가 쏘아진 포탄처럼 건물 벽에 처박혔다. 벽이 무너지며 박살 난 벽돌 파편이 바닥 가득 나뒹굴었다. 그 위로 한 자루 롱 소드가 떨어져 챙그랑 쇳소리를 냈다.
쓰러진 란타스를 향해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바꾸고 말겠다…….”
반드시 바꾸겠다.
어느 누구도 시리스를 노예라 부르지 못하게…….
어느 누구도 노예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녀를 위해 이 세상을 바꾸겠다!
☆ ☆ ☆
시리스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전투를 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오러 능력자의 힘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여태껏 그녀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저런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곤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엘븐하임에서 오러 유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여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역시 인간은 허풍이 세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허풍조차 너무 미약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란 생각만 들 뿐이었다.
‘저것이 무武의 궁극에 달한 자의 영역!’
시리스는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인간을 증오하는 그녀였지만, 무술을 익힌 이로서 어쩔 수 없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를 산 덩치 큰 주인의 외침이 들렸다.
“시리스는 노예가 아니다!”
그때 시리스의 생각은 딱 이것이었다.
‘저거, 제대로 미친놈이었구나.’
엘프가 노예가 아니라고? 역할 놀이에 얼마나 푹 빠졌는지 헛소리가 아주 일품이었다. 역시 오러를 각성해도 변태는 어쩔 수 없이 변태인 것 같았다. 하긴, 저 란타스란 작자도 오러를 각성했지만 더러운 소아 성애자가 아닌가?
그 순간 시리스는 모든 경외감을 버렸다. 이제 그녀의 눈에 저 놀라운 전투는 덜한 변태와 더한 변태가 피터지게 싸우는 광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저 덩치 큰 주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비록 변태의 역할 놀이라지만, 저 인간은 진심으로 시리스를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단다.
“위대한 요정의 후예였던 이들이 어째서 노예로 타고났단 말이냐!”
지금 저 정신 나간 덩치 큰 주인은, 일족의 어른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 ☆ ☆
“으으으으…….”
벽돌 더미에 깔린 채 란타스는 신음을 흘렸다. 다른 이였다면 즉사할 공격이었지만 미세한 오러의 힘이 아직 그의 숨통을 붙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장 신관의 치유를 받지 못하면 얼마 못 갈 것임은 분명했다.
그가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주시오.”
순간 레펜하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놈은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있는데 설마 살려 줄 거라 생각하나?
“애들 덮치는 변태 놈을 살려 둘 필요가 뭐가 있지?”
그러자 란타스가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검에 걸고 약속하겠소. 남은 인생 모두 선한 일에 쓰겠소. 내 죄악을 반성하며 평생을 보내겠소!”
피를 흘리면서도 란타스는 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표정만 보면 정말 회개하는 것 같긴 한데…….”
“그, 그렇소!”
주름진 얼굴에 반성의 빛이 가득하다. 지금 표정만 보면 정말로 반성하는 것 같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문득 그가 딴소리를 했다.
“내가 세이어 교단을 참 싫어해. 특히 그 고해성사란 거, 정말 마음에 안 들더라.”
죽어 가면서도 란타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있는 짓 없는 짓 다 해 놓고 신전 가서 몰래 말하고 회개하면 땡이냐? 진짜 회개할 거면 치안대 가서 자수를 해야지, 왜 세이어 신전으로 가는 건데?”
“물론 자수도 하겠소!”
“하긴 뭐, 내가 딱히 살인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왠지 살려 줄 것 같은 말투다. 란타스가 초조하게 외쳤다.
“나 같은 놈을 굳이 죽여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싸늘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런데 이미 피는 많이 묻었거든?”
살인에 취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만, 사실 레펜하르트가 전생에 죽인 사람 숫자는 네 자리를 넘어서서 다섯 자리 가까이 된다. 괜히 마왕으로 불린 것이 아니다. 칼잡이와 달리 진정 강력한 마법사는 광범위 주문으로 수천 단위의 인명을 한 순간에 앗아 갈 수 있다.
“좋아, 진짜로 회개했다고 믿어 주지.”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란타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때였다.
“진심으로 회개했으니 죽어도 싸다고 느끼고 있겠지? 응?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막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아? 응? 반성했다며?”
“그, 그건!”
비아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섬뜩한 살기, 란타스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순간이었다.
퍼억!
황금빛 오러가 그의 머리통으로 내리찍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란타스의 머리였던 부분이 피떡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손을 거두며 레펜하르트가 차가운 눈으로 뇌까렸다.
“회개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마라. 너 같은 놈이 쓸 단어가 아니다, 그건.”
그렇게 란타스는 길거리 개처럼 죽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러 유저로서, 한때 테이칸 왕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기사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러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어야지.”
중얼거리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 전직 마왕이 할 소린 아니었다.
란타스를 박살 낸 뒤, 레펜하르트는 바로 실란과 시리스에게 다가갔다. 시리스의 전신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이미 시리스는 실란의 치유술로 모든 상처가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실란을 돌아보며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혜안(?)에 감탄했다.
‘아! 역시 이 최고급 약통을 데려오길 잘했어!’
잘했다며 레펜하르트는 실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 취급 하지 말라며 실란이 신경질을 내며 빠져나간다. 그때 시리스가 머뭇거리더니, 살짝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
조금 전 그의 외침은 분명 그녀의 가슴을 일순 뒤흔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레펜하르트의 두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시리스!”
그는 감동으로 몸을 떨었다.
‘아! 시리스가 내게 말을 걸었어! 물론 여전히 목소리는 차갑지만, 그래도 말 건 게 어디야? 까칠하던 고양이가 손에서 먹이 받아먹는 걸 처음 본 기분이 이런 걸까?’
왠지 표정이 영 요상 야릇하다. 시리스는 흠칫거리며 다시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