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40
바실리 왕국군이 질서 정연하게 엘드릴 가드로 진군했다. 선두에 서서 요새 성문으로 들어서며 에그라드 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도대체?”
단 하룻밤 사이에, 엘드릴 가드가 텅 비어 있었다. 성벽도 요새도 건물도 모두 멀쩡하건만 그 지독하던 안타레스의 병력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레스시여…… 설마 정말로 기적을 내려 주신 건 아니겠지요?”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어제 올린 기도마저 떠오르는 에그라드 경이었다. 물론 현 상황은 그런 농담을 떠올릴 기분이 아니었다.
텅 빈 요새.
사라진 적군.
그야말로 괴담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실제로 수하 기사 한 명이 그 괴담을 입에 담기도 했다.
“이게 무슨 가란 성의 최후도 아니고…….”
바실리 왕국의 민간 괴담 중에는, 저주를 받아 단 하룻밤 만에 성 안의 모든 인구가 사라져 버린 가란 성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엘드릴 가드의 지금 상태는 그 괴담과는 달랐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확실하게 짐 다 꾸리고 하나도 안 남기고 떠났군요. 작정하고 철수한 것입니다, 이건.”
참모의 말에 에그라드 경의 미간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남은 흔적을 보면, 안타레스군이 무슨 저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철수 방식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요새를 떠났음이 분명했다.
“어째서?”
혹시 함정인가 싶어 한나절 동안 전군을 동원해 철저히 수색도 벌였다.
우물에 독을 탔는지, 마법 함정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려 바실리 왕국군을 몰살시키려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이 거대한 요새를 통째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기술로 요새를 지은 드워프들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결과는 명백했다.
그냥 떠났다.
잘 싸우다가 하룻밤 만에 요새 비우고 싹 철군해 버렸다!
“대체 왜 이기는 쪽이 알아서 후퇴를 한단 말인가?”
☆ ☆ ☆
바실리 왕국군의 승전(?) 소식에 바실리 국왕은 크게 기뻐했다.
“으하하! 이제야 그 무도한 권왕 놈에게 한 방 먹였구나!”
멍청한 국왕과 달리 제대로 된 신하들은 크게 걱정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요?”
“아니, 패배해서 후퇴한 것도 아니고 그대로라면 오히려 이쪽을 몰아붙일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는데…….”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에그라드 경도 슬쩍 보고를 조작해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본국에 알렸으리라. 하지만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바실리의 수만 정병이 모두 증인인 셈인데, 거짓 보고 올려 봐야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우세하던 안타레스군이 스스로 철수했다는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혹시 안타레스 깊숙한 곳으로 유인해서 반격할 생각인 것은?”
“군사학의 기초만 핥았더라도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은 알 거요! 자국 깊숙이 적의 본대를 끌어들이는 게 무슨 유인이오? 그냥 점령당하는 거지!”
“그런 기초조차 없는 것이 아닐까요?”
“짐 언브레이커블이야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이단의 현자가 그 기초가 없다고? 그 작자가 크로방스와 안타레스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잘 알지 않소?”
“화, 확실히…… 첩자들의 보고는 어떻소?”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바실리 왕국 역시 안타레스 공국에 상당수의 첩자를 심어 놓고 동태를 계속 염탐하고 있었다.
“정말 후퇴한 것이 맞소. 현재 엘드릴 가드를 수호하던 모든 병력이 아라난 그라드로 입성하는 걸 확인했다 하오.”
“혹시 군대 일부를 몰래 빼돌려 다른 수작을 노린 것은 아니오?”
“빼돌릴 군대가 있어야 수작을 벌이지? 수십 명 단위라면 모를까. 병력 수천 명이 줄어든 걸 설마 우리 측 첩자들이 모를 것 같소? 적어도 엘드릴 가드의 병력 대다수가 아라난 그라드로 후퇴한 것은 확실하오.”
“그럼 대체 왜?”
왜?
대체 왜?
이는 바실리 왕국뿐 아니라 바슈탈론 제국이며 이 전쟁을 주시하던 모든 국가가 공통으로 갖는 의문이었다.
대체 왜 이기고 있는 측에서 알아서 성문 열고 자리를 비운 채 몰리는 상황을 자청했단 말인가?
☆ ☆ ☆
아라난 그라드 중심부, 왕성 가이라크.
집무실에 마주 앉아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쯤 저쪽은 미치고 환장하겠군요.”
“그렇겠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훗, 이 작전을 눈치챌 만한 이가 과연 현 대륙에 있을까?”
카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이게 무슨 작전입니까? 그냥 사기 치는 거지. 뭐, 이런 사기를 칠 능력이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사기도 아니긴 하지만 말입니다.”
낄낄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어쨌거나 먹히기만 하면 되는 거지. 저쪽의 상황은 어떤가?”
“예상대로 아라난 그라드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가건 안 가건,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독 오른 살쾡이처럼 한껏 긴장해 천천히 진군 중입니다.”
“예상했던 날짜보다 조금 늦어지겠군?”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애초에 진군 속도 느려질 것까지 예상한 날짜니까요.”
“역시 자네는 대단해.”
새삼 카를의 능력에 감탄하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엘드릴 가드에서의 일은 아쉽군. 드레자 소식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바실리 왕국군의 짐작대로 레펜하르트는 드레자의 존재를 경계하느라 직접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드레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날짜가 다 되어 아라난 그라드로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고 나서야 드레자가 이미 전장을 이탈, 라스틸 공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레펜하르트도 마음껏 전장을 휘저었을 것이고 안타레스군의 피해를 상당수 줄일 수 있었으리라.
“적어도 저쪽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 한둘쯤은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며칠 뒤면 대륙의 그 누구도 안타레스를 적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쯤 되면 그들도 더 이상 적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문득 카를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레펜하르트 님을 믿고 이 사기를 치긴 했다만, 정말이지 너무하군요. 신이 인간에게 사기 치는 형국이 아닙니까, 이건?”
“그 대가로 애꿎은 일반 병사들의 피를 줄일 수 있다면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은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왕궁 가이라크 뒤쪽, 병풍처럼 아라난 그라드를 감싸고 있는 아렌드 산맥 너머 희미한 그림자가 비추고 있었다.
구름이 끼어 마치 산봉우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산이 아닌, 거대한 나무의 가지임을 알 수 있으리라.
산맥 깊숙한 곳에 위치함에도 높이가 수백 미터에 달해 슬슬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 이미 나무라 하기도 부끄러운 그 웅장한 존재는 바로 레펜하르트가 심은 세 번째 세계수 제네로스였다.
문득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실란 대주교께서 알현을 청합니다.”
이내 붉은 머리의 미청년이 안으로 들어섰다. 레펜하르트와 카를이 실란을 맞이하며 환하게 웃었다.
“어서와, 실란.”
“어서 오십시오, 안타레스 대주교.”
“대주교라니, 정말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요. 하긴 레펜 씨 만나는 게 알현인 것도 적응 안 되긴 마찬가지지만.”
너스레를 떨며 실란이 집무실 소파에 와 앉았다. 카를이 물었다.
“교단 일은 잘되어 갑니까?”
퉁명스레 실란이 입을 삐죽였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하는 게 없는데.”
안타레스의 모든 이들이 전쟁에 한창인 지금, 실란은 철저하게 놀고 있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에서 가장 교세가 강력한 교단을 꼽으라 하면 물론 필라넨스 교단이다. 공국의 주요 권력자이자 개국공신인 실란이 필라넨스의 대주교인 만큼, 기존의 레단티 교단조차도 필라넨스 교단의 위세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교리는 이종족이 받아들이기 매우 쉬운 것이다. 오크건 드워프건 엘프건 트롤이건 시집 장가가는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니까. 현재 이종족들이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교단이 바로 필라넨스 교단이었다.
문제는 저 필라넨스 교단의 본산이 바로 바실리 왕국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세이어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교단이 정교 분리의 원칙을 지킨다지만, 그래도 왕국 내에 있는 이상 교단 입장에서 바실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레스 공국과의 전쟁에 대놓고 성직자를 파견하자니 기껏 손에 넣은 안타레스 교구가 아까운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교단의 위세가 한 방에 두 배로 늘었는데 그걸 멍청한 국왕 눈치 보느라 날리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현 필라넨스의 교황, 라울 3세는 바실리와 안타레스 양국의 필라넨스 신관들에게 칙령을 내렸다.
-이는 속세의 전쟁일 뿐. 자애와 사랑을 중시하는 필라넨스의 뜻과도 어긋나는 전쟁이노라. 모든 필라넨스의 종들은 이 전쟁에 중립을 지키도록 명하노라.
덕분에 현재 모든 필라넨스 신관들은 반쯤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 있었다. 평소처럼 일반 시민들을 치유하고 상담하고 결혼식을 주도하는 정도가 업무의 전부, 어느 누구도 전장에서 부상자를 돌보거나 아군을 가호할 수 없었다.
“덕분에 남는 시간에 운동이나 신 나게 했죠. 어때요? 팔뚝 많이 굵어졌죠?”
실란이 팔을 걷어붙이고 알통을 만들며 으스댔다.
팔뚝이 실란 허리만 한 레펜하르트와, 팔뚝이 실란 허벅지만 한 카를이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음…….”
“으음…….”
저리 좋아하는데 그 앞에서 차마 ‘1밀리미터도 안 늘었는데?’라고 할 만큼 두 사람은 야박한 성품이 아니었다.
“어, 어쨌거나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실란?”
레펜하르트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정 안 되면 마켈린을 이용해 알 포트의 위세를 빌릴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이 작전에는 필라넨스 여신께서 제일 잘 어울리니까 말이야.”
팔을 내리며 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 아마도 허락은 떨어진 것 같아요. 네, 필라넨스께서 허락하셨어요. 신탁은 아니지만 징조로 분명히 그 뜻을 전해 받았어요.”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으며 허리춤을 매만졌다.
“좋아.”
사방신의 유물, 무한의 마력이 담긴 고대의 기물을 툭툭 건드리며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호쾌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이제 작전 개시다!”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카를과 실란이 구시렁댔다.
“그러니까 그건 작전도 아니지 말입니다.”
“그렇죠. 그냥 고금에 유례없는 사기극일 뿐이지.”
3
사흘에 걸쳐 바실리 왕국군은 안타레스 공국 깊숙이 전진했다. 사만의 대군이 안타레스 공국의 영토를 짓밟으며 아라난 그라드를 향해 거리낌 없이 나아갔다.
저항은 전혀 없었다. 진군로에 속하는 안타레스의 모든 영지는 이미 영지민까지 데리고 깔끔히 피난을 한 후였다. 생각이 짧은 병사들은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어떻게 도착하는 마을마다 텅 비어 있지?”
강간과 약탈을 기대하던 병사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바실리 왕국군 수뇌부가 그런 병사들을 위해 진군로를 바꾸진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아라난 그라드였으니까.
“하지만 청야 전술이라니, 의외로 이단의 현자도 독한 면이 있군요.”
바실리의 참모 하나가 말에 탄 채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