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41
자국 영토 내부로 쳐들어온 적군에 물자를 넘기지 않기 위해 성이며 마을을 텅 비우는 것이 바로 청야 전술이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효율적인 작전 같지만 이는 군사학에서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기에,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 아니면 아무리 폭군이라도 함부로 시행하지 못하는 전술이기도 했다.
“……그걸 왜 이기고 있던 놈들이 시행한단 말인가?”
본진에서 말을 몰며 에그라드 경은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엘드릴 가드를 ‘거저’ 먹은 이래 지난 사흘 간 바실리 왕국군은 단 한 차례의 접전도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미 안타레스 공국이 항복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엘드릴 가드에서 지독하게 고생을 한 에그라드 경 입장에서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
“아라난 그라드에서 수성을 할 생각인가?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엘드릴 가드에서 수성을 해도 되었었잖아?”
곁에서 말을 몰던 기사 한 명이 에그라드 경을 달랬다.
“지금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일단 아라난 그라드에 도달해 보면 대답이 나오겠지요.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건 힘으로 꺾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참으로 기사다운 호탕한 발언이었다. 에그라드 경도 표정을 폈다.
“허허, 그렇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봤자 결국은 이 검이 모든 걸 판가름해주는 법이니까!”
기사들이 그렇게 다시금 사기를 높이는 걸 보며 참모진은 한숨을 쉬었다.
‘……힘으로 꺾긴 개뿔. 열흘 넘게 그 힘에서 사정없이 밀린 주제에 뭘 힘으로 꺾는다는 거야?’
하지만 참모진은 기사들에 비해 직위가 낮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기사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안타레스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지금은, 저렇게 사기를 유지하는 쪽이 분명 그나마 승산이 있었으니까.
☆ ☆ ☆
“내일이면, 바실리 왕국군이 아라난 그라드에 도달할 겁니다.”
왕궁 가이라크의 회의실에서 카를이 보고서를 살펴보며 말했다. 레펜하르트가 턱을 괸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영지민의 피해는 없는 것이겠지?”
카를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모두 무사히 인근 산속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바실리 왕국군도 굳이 그런 이들을 제압하려 들지는 않고 있습니다. 예상대로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좀 위험한 작전이 아니었나, 카를? 바실리 왕국군의 목표는 안타레스의 점령이었을 터. 저들이 저대로 진군하지 않고 영지를 점거하고 영토 점령을 노렸다면 영지민의 피해가 컸을지도 모르는데.”
확실히 바실리 왕국군은 군세 일부를 점령한 영지에 남긴 뒤, 그 지역을 지배하려 들 수도 있었다. 사실 점령 전쟁은 이쪽이 정상이다.
영지민을 피난시켰다고, 바실리 측이 그 영지민을 무시하고 그냥 진군할 거라 생각한 것은 너무 운에 맡긴 게 아닐까? 레펜하르트는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물론 평범하게 엘드릴 가드가 함락되었다면 저들도 그렇게 나왔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대놓고 엘드릴 가드를 그냥 내주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 바실리 왕국군의 입장을.”
카를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밀리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어요. 그리고 적국의 수도는 그냥 달려오기만 하면 됩니다. 눈앞에 목표가 있고, 분명 상대에게 꿍꿍이가 있을 게 뻔하지요. 그런데 어느 정신 나간 지휘관이 그런 상황에서 군세를 분리한단 말입니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모든 병력을 보전하고 싶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쪽의 꿍꿍이를 신경 써서 아예 진군을 멈추고 점령 지역에 눌러앉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카를이 손가락을 저었다. 레펜하르트도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여러 예상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카를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이 바실리 단독 전쟁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엄연히 세이어의 이름을 건 성전이고, 또 바슈탈론 제국과의 연합 작전입니다. 제국과의 연계를 위해서도 바실리 왕국군은 아라난 그라드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말이죠.”
머리가 여럿인 세력은 예측하기 쉽다. 서로 이득이 걸려 있고 서로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 단독으로 변수란 걸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강자 개인의 움직임이야 카를도 예측할 수 없었다지만, 바실리라는 거대한 세력의 움직임은 확실히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군, 그렇지만 그래도 영지민들의 고초가 크지 않을까?”
카를의 예상이 맞아 영지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피난 생활이란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다. 피신한 안타레스 영지민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원망할 법한 일이다.
하지만 카를은 대수롭잖게 고개를 저었다.
“별문제 없습니다. 어차피 그 지역 영지민들은 원래 대기근 당시 몰려온 유민이거나 전쟁에서 패해 흡수한 지역 주민들이니까요. 불만은 있겠지만 감히 반발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반발해도 별문제 없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반발하기엔 지금의 안타레스 공국이 너무 강하지요. 애초에 백성들의 뜻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잘난 폐하와 잘난 폐하 동료들이 잘난 이종족 모아서 만든 나라인데요. 대륙 역사상 이 정도의 독재 국가도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 그런가?”
어째 힐난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어 레펜하르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카를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나라를 레펜하르트 님 당대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앞으로 계속 기틀을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이쪽이 최선입니다.”
“그래도…… 나중에 보상이라도 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차 없이 카를이 대꾸했다.
“그럴 예산 없습니다. 지금도 재정이 휘청거리는데 무슨…….”
“자, 자네 의외로 독하군…….”
“독할 것 없습니다. 이번 전쟁을 위해 엘프며 드워프, 트롤과 오크들이 얼마나 많은 물자를 부담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결국은 모두 안타레스라는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인간 역시 안타레스의 일원, 그렇다면 똑같은 부담을 져야겠지요.”
안타레스는 이종족만의 국가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다섯 종족이 어우러진 나라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 된 의무라 카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카를은 자신의 군주를 향해 간언했다.
“안타레스는 엘프와 오크, 트롤과 드워프, 그리고 인간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대륙의 관습이며 다른 국가이고요. 이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폐하의 책무라 할 것입니다.”
레펜하르트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네, 카를 재상.”
☆ ☆ ☆
안타레스 공국의 수도.
오색의 도시, 아라난 그라드.
바실리 왕국군은 엘드릴 가드를 통과한 지 나흘 만에 아라난 그라드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정면에 도시를 두고 진지를 친 뒤 에그라드 경은 말로만 듣던 유명한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아라난 그라드인가.”
상당한 수준의 도시였다. 무슨 바슈탈론 제국의 수도처럼 엄청나게 광대하고 위엄이 넘치는 도시는 아니었지만, 도시 전체가 철저히 계획 조성되어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세워졌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그야말로 통째로 거대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도시를 받쳐 주는 주변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부관이 주변 지형을 살피며 말했다.
“……생각보다 황량하군요.”
아라난 그라드가 위치한 아렌드 평야는 원래 농지로 쓸 만큼 토질이 좋은 곳이 아니다. 사방이 황토로 뒤덮이고 작은 관목과 잡초만이 듬성듬성 나 있는 황야였다. 부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예 것들에게는 무슨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처럼 여겨지더니, 결국 실상은 이렇군요.”
참모장이 고개를 저었다.
“일국의 수도로서는 좋은 위치입니다. 세란 강과 테르마니아 관도가 교차하니 상당한 교통의 요충지로군요.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 적당한 입지라고 봅니다.”
애초에 도시를 농토 위에 세울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무엇하러 좋은 농토에 굳이 도시 세워 소출을 줄이겠는가? 하지만 실리보다는 감성이 우선인 기사들에게는 저 황량함이 일종의 상징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일국의 수도가 이 모양이라니. 화창한 숲과 기화요초가 뒤덮이고 아름다운 강이 흐르는 바실리의 수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요.”
“허허, 노예 것들을 부려 만든 나라와 어찌 영광스러운 바실리를 비교하는가?”
부관과 에그라드 경이 서로 담화를 나눈다. 참모장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원래 바실리의 수도도 처음에는 아라난 그라드처럼 황량했었다. 그저 오랜 세월 시간이 지나며 조성이 되어 수도다운 모습을 갖춘 것이지.
뭐, 저 황량함이 바로 안타레스 공국의 역사 짧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바실리의 국민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다.
아라난 그라드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벽 위로도 온갖 다양한 종족의 병사들이 농성 준비를 끝마친 후다.
그 모습을 보며 바실리 측도 움직였다.
바실리의 사만 정병이 대열을 갖추고 아라난 그라드 남부에 진형을 갖추었다. 사만이나 되는 대군이 차례로 도열해 있으니 그 위세가 과연 대단했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에그라드 경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들은 이곳 아라난 그라드까지 왔다.
그리고 영광된 승리를 그들의 군주, 바실리의 국왕에게 바칠 것이다!
확성 마법을 이용해 목소리를 높이며 에그라드 경이 고함을 질렀다.
“안타레스의 무도한 이단자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의 왕은 진정한 신의 뜻을 거역하여 그 죄가 심연까지 닿았노라!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그 목을 바쳐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오러의 힘으로 한껏 증폭된 음성이 확성 마법의 힘으로 더더욱 커진다. 쩌렁쩌렁한 음성이 아라난 그라드 전역을 덮었다. 동시에 바실리의 사만 정병이 고함을 질렀다.
“우오오오오!”
“와아아아아!”
사만이라는 숫자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니 지축이 흔들리고 대기가 떨쳐 울린다. 이 가공할 기세 앞에서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들도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
‘권왕이여,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지만 일개 시민까지 전쟁에 빠지게 한 그 어리석음, 이번 기회에 톡톡히 맛보게 해 주마!’
그렇게 에그라드 경과 바실리의 사만 정병이 모두 투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아라난 그라드 남부 성문 위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실리의 병사들이여!”
확성 마법으로 증폭된, 낭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에그라드 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는 결코 권왕의 음성이 아니었다.
나타난 것은 붉은 장발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드리운, 놀랍도록 아름다운 미녀였다.
아니, 미녀는 아니다. 미녀로 착각할 만큼 아름답지만 틀림없이 사내인 저자는 에그라드 경도 잘 아는 이였다.
요즘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신관 중 한 명, 필라넨스의 안타레스 교구 대주교 실란이었다.
‘실란 대주교? 왜 갑자기 저자가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지? 필라넨스 교단은 분명 중립을 선언했을 텐데?’
당황한 에그라드 경의 귀에, 실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바실리의 병사들아! 어찌하여 이곳을 핍박하는가! 어찌하여 그 칼끝을 이곳에 향하는가! 이 자리의 모두는 여신의 아들딸들, 그대들의 형제자매이거늘!”
바실리 왕국군의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필라넨스의 본산이 위치한 왕국답게 바실리 국민치고 필라넨스 교단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이들은 없는 것이다. 투지가 사그라지고 대신 웅성거리는 음성이 조금씩 커진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에그라드 경이 언성을 높였다.
“당황하지 마라! 아무리 대주교라지만 저자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필라넨스의 교황께서 이미 이 전쟁을 허했노라! 여신의 뜻을 안다 하는 저 어린아이의 말에 휘둘릴 셈이냐!”
바실리 왕국군의 동요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지만, 역시 실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 보니 그리 말에 힘이 없는 것이다.
“대주교 실란! 이는 세이어께서 내리신 신의 뜻이다! 그대가 정녕 여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진실로 그리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오만일 것이다!”
오히려 에그라드 경이 반박을 하니 도리어 바실리 왕국군의 사기가 크게 오른다. 하지만 실란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렇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건 신경 쓰지 않고, 실란이 꿋꿋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필라넨스께서 굽어보고 계신다! 에그라드 경! 바실리의 용사여! 그대는 정녕 필라넨스의 뜻을 보고 싶은 것인가?”
코웃음을 치며 에그라드 경이 마주 소리쳤다.
“우습구나, 어린 성자여! 그대만이 필라넨스의 뜻을 알고 그대만이 필라넨스의 의지를 행한다 하는 것이냐!”
순간 실란이 서 있던 아라난 그라드 남부 성벽에 성광이 터져 나왔다.
파아아앗!
거대한 분홍색 빛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었다. 어찌나 거대한지 그 광량이 허공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더더욱 늘어난 실란의 신성력이 이제 저 정도 위용을 보이는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바실리의 병사들, 여신의 사랑하는 아이들이여!”
실란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여신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보라!”
필라넨스의 성광이 더더욱 빛나며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에그라드 경도 바실리 왕국군도 그 대단한 위용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분명 굉장한, 이미 대주교 수준을 넘어 교황급이라 해도 무방할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경악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대륙의 전장에서는 저렇게 성광으로 시위하는 일이 거의 관례처럼 이루어지고 있다. 전투에 앞서 저 정도 성광을 보는 것은 병사들 입장에서는 흔한 것이다.
“뭐, 뭐지?”
“대단하긴 한데…… 뭘 어쩌려고?”
당혹스럽긴 해도, 놀라지는 않은 채 바실리 왕국군의 시선이 실란에게 쏠렸다.
신성력을 모조리 성광으로 바꿔 사방을 밝히며 실란이 힐끔 하늘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 판 다 깔아 줬으니 잘해 봐요, 레펜 씨!’
☆ ☆ ☆
아라난 그라드 상공, 수백 미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