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42
레펜하르트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서 있었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분홍빛 성광의 기둥이 찬란히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실란 녀석. 진짜 많이 늘었네.’
뭐, 겉보기엔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저 성광은 단순한 퍼포먼스용이다. 모든 신성력을 광량에 투자하다 보니 저 빛에 닿아 봐야 두통 하나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가호력은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레펜하르트에겐 대단히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다.
‘딱 좋아.’
어차피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필라넨스의 가호가 아니라, 필라넨스의 위세였으니까.
레펜하르트가 시선을 돌렸다. 아라난 그라드의 정경, 남부 성벽을 포진한 사만의 바실리 왕국군이 차례로 보였다.
더더욱 시야를 넓힌다. 도시와 군대가 서 있는 거대한 황야, 아렌드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쪽에 넓게 펼쳐진 아렌드 산맥의 정경도 보인다. 그리고 그 산맥 너머 우뚝 솟은 거대한 세계수, 제네로스의 모습도.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럼 시작해 볼까!”
어깨 위로 보랏빛 마력장이 뿜어져 올랐다. 허리에 차고 있는 사방신의 유물, 그 무한의 마력 공간으로부터 동조동기화를 통해 허락된 마력이 양손으로 흘러들어와 빛을 발한다.
“생명의 씨앗이여, 영원한 밤의 그늘 아래 그 싹을 틔우는 자여…….”
굵직한 영창과 함께 양손의 빛이 무형의 흐름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그 흐름은 수십 킬로미터라는 장대한 거리를 지나 한 곳에 닿았다.
세계수, 제네로스.
그곳에 닿은 레펜하르트의 마력이 제네로스의 술식을 가동시켰다. 자그마치 한 달 가까이 준비했던 술식이다. 도저히 현신의 마력과 연산력으로는 불가능해 세계수의 힘을 빌리고 모든 마력을 묶어 가며 간신히 마련한 술식.
‘이것 때문에 드레자에게 크게 당할 뻔했었지.’
헛웃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술식을 움직였다.
그의 마력이 세계수 제네로스의 코어를 흔들어 맥동시켰다. 제네로스의 생명 코어가 약동하며 머나먼 스펠라트 사막과 글로텐 산맥 깊숙한 곳까지 연계된다.
스펠라트 사막의 세계수, 니힐렌이 응답했다.
글로텐 산맥의 세계수, 제룬팅이 응답했다.
거대한 힘의 그물이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세상을 조율하는 힘으로 변한다. 전신이 짜릿해질 정도의 그 엄청난 마력에 레펜하르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이 느낌. 진짜 오랜만이군.’
한낱 인간이라면 스치는 순간 영혼이 소멸해 버릴 가공할 마력의 소용돌이.
설령 대마법사라도 이 마력의 회오리 앞에선 그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데만 급급할 것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손을 뻗어 소용돌이를 끌어당겼다.
고도로 단련된 그의 두뇌는 이미 잃었지만, 그 영혼에 깃든 깨달음은 이 소용돌이 앞에서도 오히려 흐름을 따라가며 세상을 조율하는 그 힘을 움직인다.
“나는 만물의 사역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뜻이 곧 세상의 의지가 될지니…….”
언령의 힘으로 마력을 움직이고.
마력을 움직여 언령을 다스리며.
영혼의 각오로 세상을 빚는다.
아라난 그라드의 상공 위로 어마어마한 힘의 기류가 일어 올랐다. 오러 유저인 에그라드 경뿐 아니라 일반인인 바실리 왕국군이며 아라난 그라드의 시민마저도 모두 느낄 수 있을 엄청난 힘이었다.
“뭐, 뭐야?”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하늘이 일렁인다거나, 천둥벼락이 친다거나, 태양이 사라지거나, 세상이 검게 물들지는 않았다.
그저 하늘은 여전히 분홍빛 성광의 기둥 위로 은은히 빛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권세,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다.
특히나 오러 유저라 기운의 흐름에 한층 민감한 에그라드 경이 이제 숫제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가 이 이적을 행한 걸로 보이는 미모의 신관, 실란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웃긴 건, 실란도 비슷한 소릴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으, 으어…… 뭐야, 이거? 레펜 씨,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로 듣는 것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바실리 왕국군과 아라난 그라드뿐 아니라 아렌드 평야와 인근의 모든 생물체가 경악과 공포에 휩싸인 가운데, 레펜하르트는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내가 곧 세계요, 세계가 곧 내가 되리라.”
기나긴 영창이 끝나며 초월의 권세가 그의 의지하에 놓였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전능의 힘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전생의 자신, 그 시간의 파편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영혼을 가득 충만케 하고 있다.
“하아…….”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길게 허공을 그으며 땅으로 향했다.
최후의 언령, 궁극의 시동어가 10서클 대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이적 마법, 천지창조.”
4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아렌드 황야의 싸늘한 바람이 아닌, 온화한 기운을 담은 봄의 미풍이 아라난 그라드와 바실리의 사만 정병들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따스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며 흐느끼듯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대지에 싹이 텄다.
싹이 튼다. 줄기가 솟구친다. 이파리가 돋아난다. 천지 만물이 소생하며 황량하던 광야에 녹음이 퍼지기 시작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있어, 커다란 녹색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대지 위로 끝없는 녹색의 파도가 밀어닥쳐 시야를 가득 뒤덮는다.
에그라드 경이 입을 쩍 벌렸다.
“어, 어어…….”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모습을 바꾼다. 황량하던 초겨울의 황야가 순식간에 신록이 가득한 봄의 동산이 되니, 마치 여신이 겨울옷을 벗고 봄으로 갈아입은 듯한 광경이다.
바실리 왕국군의 병사들도 벌벌 떨며 신음을 흘렸다.
“마, 맙소사…….”
“이게 대체…….”
도열해 있던 사만의 바실리 왕국군, 그들은 어느새 푸르른 녹지 속에 서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초원이요, 화사한 꽃과 나무들로 가득하다.
뒤이어, 황야 여기저기서 숲이 솟아올랐다.
잡목만 듬성듬성 나 있던 세란 강변, 그곳에서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빠르게 자라나 서로 얽히며 숲을 이루고 있었다.
상큼한 잎 내음이 코를 간질이고 향긋한 꽃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으어어…….”
사만이나 되는 대군 모두가 석상처럼 굳은 채 제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우르르릉!
굉음과 함께 바실리의 대군을 지탱하던 대지가 용틀임을 했다. 세상이 녹음으로 덮이고 숲이 생겨나더니, 이제 땅이 통째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땅이 갈라진다.
대지가 솟구친다.
콰콰콰콰콰쾅!
귀가 멀 것 같은 끔찍한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거신 아틀라스가 기지개를 키듯이 거대한 바위산 황야 위로 솟구치며 평탄하던 아렌드 황야 곳곳에 기암절벽이 생겨난다.
기암절벽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을 토하며 폭포가 쏟아진다. 쏟아진 폭포가 무지개를 일구며 대지를 따라 흐른다. 개울이 흐르는 곳마다 꽃이 피고 풀이 돋는다.
나무, 나무마다 과실이 열려 상큼한 향기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이끼 낀 바위 위로 반짝이는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첨벙 뛰어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아…….”
에그라드 경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쥔 검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아렌드 황야가 아니었다.
탐스러운 과실이 주렁주렁 열매 맺고 기름진 옥토 위로 맑은 시내가 흐르는 세계.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이 그의 눈앞 가득 펼쳐져 있었다.
벌벌 떨며 에그라드 경이 중얼거렸다.
“기, 기적인가, 이것은…….”
그때였다.
솟구친 기암절벽들, 그 위로 돋아난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몇몇 수목이 단풍이 들어 물들기 시작했다. 녹색 속에서 붉게 물든 그 아름다운 색채는 너무도 확실한 문자의 형상이 되어 바실리의 사만 정병 모두의 눈에 뚜렷하게 박혔다.
붉게 물든 수목으로 이루어진 절벽 위의 글자.
필라넨스 교단에서 사용하는 여신을 섬기는 고대어, 필란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수많은 기암절벽 위로 아로새겨져 너무도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나의 아이들아, 무기를 내려놓아라. 모두가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니.
필라넨스 교단의 세력이 강한 바실리 왕국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교양을 위해 필란어를 필수로 익힌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저 문자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에 담긴 여신의 성스러움도!
“맙소사…….”
“여신이시여…….”
“필라넨스시여…….”
기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강철의 창과 검이 푸르른 녹지 위로 하나 둘 떨구어진다.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비록 필란어를 읽지는 못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이 위대한 신의 기적 앞에서 겸허하지 않을 이는 없었다.
“기적이다…….”
“여신의 기적이다…….”
개중에는 눈앞의 기적을 보고 감동해 펑펑 우는 병사들조차 있었다.
“어허어어엉!”
“오! 필라넨스시여!”
“용서해 주소서, 부디 용서해 주소서, 어허허헝!”
에그라드 경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푸름 가득한 대지 위에 무릎을 꿇었다.
“필라넨스시여…….”
대지에 입 맞추며 그가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었나이다…….”
더 이상 투지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적의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감히 안타레스 공국을 적대하려 했던 자신이 하염없이 어리석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광경인가?
이 얼마나 놀랍고 찬양할 이적인가?
위대한 여신의 뜻이 이 땅에 강림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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