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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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난 그라드 주위를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해야 하고 확연히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안타레스 공국 내부도 정비해야 했다. 할 일이 많으니 하루가 바빴다. 단 여기서 바쁘다는 건 어디까지나 카를의 이야기였다. 레펜하르트는 별로 바쁠 일이 없었다.
법령을 선포하고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고 국민들의 생활을 돌보는 이 모든 업무의 뒤에 카를이 있었다. 워낙 그가 해놓은 일이 완벽하다 보니, 요즘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왕인지 도장 찍는 기계인지 구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에이, 말은 그렇게 하셔도 모든 서류 일일이 다 검토하시잖아요?”
테이블 위에 또 한 뭉치의 서류를 올리며 비서인 엘프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재상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였다.
최대한 간략하게 올라온 보고지만 공국 전체의 일을 담은 것이니만큼 그 분량이 장난이 아니다. 높이가 거의 레펜하르트 가슴치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레펜하르트가 대수롭잖다는 듯 서류를 받아 들었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그냥 읽고 이해만 하는 건데 뭐가 어렵겠느냐?”
굵직한 손가락 사이로 서류가 파르르 넘어간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서류가 테이블 왼쪽에 놓였다. 전부 파악이 끝났다는 의미다.
“이제 도장만 찍으면 되네.”
오른손으로 서류를 잡고 파르르 넘긴다. 왼손으로 도장을 들고 맹렬히 찍어 간다.
두다다다다다!
콩 볶는 소리가 나며 서류 위로 도장이 연달아 찍혔다. 극강의 오러 유저이며 권왕이기도 한 레펜하르트의 핸드 스피드로 도장을 찍어 대니, 그 많던 종이들이 전부 결재 서류로 변하는 데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결재 끝난 서류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흐뭇하게 웃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 일 참 편하네. 예전엔 카를이랑 둘이서 이걸 다 해야 했는데.”
보고 있던 비서가 혀를 내둘렀다.
‘폐하나 재상님이나 둘 다 참 괴물이야.’
애초에 저걸 둘이서 했었다는 것부터가 기가 찰 일이다.
서류를 옆으로 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공식 업무는 끝이고, 이제 비공식 업무만 남았나?”
비서가 대답했다.
“예, 폐하. 오늘 오후에 그분들과 알현하셔야 합니다.”
“몇 시지?”
“네 시쯤이라 들었습니다만.”
비서가 말한 ‘그분들’은 바로 신생 이종족 노예 해방단이었다.
현재 안타레스 공국은 인접한 저 바실리, 크로방스 두 국가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대륙 동부 지역의 이종족 노예 제도도 철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대륙 서부 지역의 이종족들은 노예 신세였다.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버릴 생각도 없다.
그래서 카를과 레펜하르트는 또다시 비밀리에 노예 해방단을 꾸려 그들을 구해낼 계획을 세웠다. 안타레스 백국 시절 대륙 전역에서 했던 짓을 또 할 셈이었다.
단지, 예전처럼 노예인 척 꾸며서 타국으로 잠입하는 수법은 더 이상 쓰기 힘들었다. 아직 이종족 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대륙 서부 국가들은 타국에서 들어오는 이종족 노예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아예 입국을 불허하는 일도 많았다. 예전 레펜하르트에게 당한 것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종족들을 인간처럼 변장시킨 뒤 인간 무리 사이에 끼워서 잠입시킬 생각입니다. 타국에서 들어오는 이종족 노예에는 민감해도 아직 그냥 오가는 인간 상인까지는 신경 안 쓰거든요.
카를의 의견대로, 비교적 인간과 외모가 비슷한 이종족들이 변장을 맡았다. 주로 오지 출신의 엘프와 드워프 여성들이 대상이었다.
일단 트롤이나 오크는 변장한다고 인간으로 보일 외모가 아니다. 그리고 드워프 남성들은 억지로 우겨 봐야 너무 근육 키워서 키 안 큰 중년 남자일 뿐이다. 속을 리가 없었다.
반면 드워프 여성은 뾰족한 귀만 살짝 가리고 그 풍만한 가슴을 압박붕대로 감아 놓으면 그냥 어린 10대 인간 소녀처럼 보이는 것이다. 엘프들도 귀를 가리고 머리를 염색하면 그냥저냥 인간이라 우길 수 있고.
문제는 엘프의 체형이 너무 가는지라 아무래도 의심을 사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엘프 중에서는 보디빌더급 근육질이더라도 인간 기준으로는 ‘좀 더 먹이면 그럭저럭 사내구실 하겠네.’ 수준이니까.
-그래서 오지 출신 엘프들 중에서 뽑았습니다. 전사 출신 엘프 중엔 그래도 제법 몸이 두꺼운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엘프 여성 같은 경우엔 좀 더 뽑기가 쉬웠다.
-그냥 가슴 큰 여인들만 고르면 되지요.
엘프 여인은 가슴이 납작하다는 것이 대륙의 정설.
그러나 인간도 체형이 천차만별이듯이 엘프도 저마다 체형이 다르다. 대부분의 엘프 여인들은 가슴이 작았지만, 드물게 인간 여인처럼 풍만한 가슴을 지닌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차탄의 노예 경매장에서는 인위적으로 가슴 큰 엘프 여인을 키워서 팔기도 했었다. 뭐, 성공률이 높지 않아 그리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니야 씨도 예전에, 그 체형 덕분에 들키지 않고 인간 세상을 떠돌았다고 들었습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흐음, 그냥 전부 인간들로 구성하면 안 되오? 그쪽이 더 들킬 위험성이 없을 텐데.
-아무래도 노예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이쪽도 이종족이 나서야 하니까요. 변장은 필수입니다.
납득할 수 있는 계획이었고, 그래서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그 후 열심히 인선을 꾸리는 것 같더니 드디어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준비 다 끝났으면 그냥 가면 되지 귀찮게 왜 알현씩이나…….”
투덜대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비서가 달래듯 말했다.
“폐하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일이잖아요. 당연히 폐하께서 주관하셔야죠.”
“하긴, 그건 그렇지.”
허례허식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런 사소한 일이 쌓여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인식을 만든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는 레펜하르트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네 시라 이거지? 그럼 아직 시간이 남았군.”
그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일을 끝냈으니 좀 쉴 생각이었다.
“뭐 하지? 시리스랑 차나 마실까?”
☆ ☆ ☆
아라난 그라드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왕궁 가이라크의 테라스.
새하얀 테이블 위에 우아한 다기가 놓여 있었다. 찻잔 위로는 김이 오르며 기분 좋은 향기를 뿌려 내고 옆에 놓인 형형색색의 다과들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찻잔과 다과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 정도까지 기틀을 잡았군.”
이 과자는 왕궁 요리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아라난 그라드의 흔한 제과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그냥 작은 과자일 뿐이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이런 사소한 물품에서 곧 그 나라의 일반적인 물류가 드러나는 법이다. 특권 계층이 아니라 대중에게 이 정도 수준의 과자를 팔 수 있을 정도로 안타레스 공국의 문화적, 사회적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다.
곁에 앉아 있던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차탄에서 먹었던 것만은 못해요.”
“에이, 거기랑 비교하면 안 되지. 거기 역사가 몇 년인데?”
즐거워하며 레펜하르트는 과자를 입안에 털어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음, 맛도 괜찮네.”
조용히 차를 마시던 시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좀 우아하게 드세요. 무슨 사료 먹는 것도 아니고.”
“으음, 미안하다.”
사과를 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요즘 다시 시리스의 분위기가 변한 것 같은데.’
최근 묘하게 살갑게 굴던 그녀였다. 여기서 저 살갑다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살이 참 가깝다’라는 의미다. 이상할 정도로 달라붙고 비비적거려서 좋기도 했지만 솔직히 걱정도 되고 그랬다.
‘들은 바로는 전투 시에 이상할 정도로 잔인하게 날뛰었다는 말도 있었고.’
뭐, 전쟁 중에 흥분해 날뛰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고 해서 대수롭잖게 넘겼지만, 하여튼 그녀가 어딘가 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왠지 도로 예전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플로라의 말을 떠올려 보면 또 딱히 이상할 건 없는 것도 같고.
-질풍노도 못 들어 봤어요? 질풍노도? 원래 저 나이 대는 다 그렇답니다. 갑자기 쌀쌀맞다가 또 갑자기 애교도 부리고 그래요.
쌀쌀맞다가 갑자기 애교를 부릴 수 있으면, 애교를 부리다가 갑자기 쌀쌀맞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따, 질풍노도 무섭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레펜하르트는 실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리스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흐음.”
마음이 차분하다. 얼마 전까지 격정적으로 날뛴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시리스는 자신의 이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원인을 짐작하고 있었다.
‘세계수…….’
그녀의 심상이 변질된 것은 모두 7대 정령력의 힘, 엘리멘트를 터득한 이후였다. 세계수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휘하는 정령력, 그리고 그 궁극의 경지인 엘리멘트는 분명 오러 유저와 필적할 만한 힘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에 맞먹는 광기 또한 주었다.
하지만 현재 세계수의 힘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레펜하르트의 천지창조 마법이 세계수의 정을 몽땅 끌어낸 덕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엘리멘트의 힘도 약화되었지만…….
‘대신 마음이 차분해.’
예전 같은 정신적인 동요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발정이라도 난 것 같던 그 부끄럽고 기이한 기분도 많이 사라졌다.
시리스는 말없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
여전히 친애의 정은 느끼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남녀의 애정인지는…….
그때 시선을 느끼고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니, 시리스?”
“아뇨, 아무것도.”
말문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시리스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문득, 예전부터 담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저, 레펜하르트 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응? 뭐든지 물어봐.”
“왜 레펜하르트 님은 저희를 보호하시는 건가요? 레펜하르트 님은 인간이시잖아요?”
뭘 새삼스러운 말이냐는 듯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엘프였기 때문이지. 난 그녀를 사랑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세상도 그녀를 사랑하길 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륙을 공포로 휩쓴 마왕의 이유치곤 참 개인적이라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대륙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힘 있는 자의 개인 감정은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시리스가 궁금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의 눈이 빛났다. 화제를 돌리려 한 짓이었지만, 이 의문은 그녀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떻게 엘프를 사랑하게 되신 건가요?”
☆ ☆ ☆
레펜하르트는 말없이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시리스는 이런 걸 물은 적이 없었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레펜하르트에게 헌신적이었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으며, 어떤 의심도 없이 그를 사랑했다. 그 헌신과 의심 없는 사랑 뒤에는 그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더렵혀진 몸, 농락당할 대로 당해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거두어 준 레펜하르트에게 감히 의문 따위는 표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멸시가 바탕이 된 헌신이었다.
그래, 전생의 시리스는 감히 자신이 레펜하르트의 사랑에 의문을 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시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시리스 역시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레펜하르트에게 의존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노예 생활이었지만 몸을 더럽히지도 않았고 긍지와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레펜하르트에게 의문도 표할 수 있었다.
분명 동일인임에도 어긋난 시간 축 속에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사람.
다른 시간과 다른 사건을 보낸 두 시리스는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