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53
-그런가…….
레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니스의 말은 영 이해하기 어려웠다. 흐릿하게 느껴지는 바는 있지만 명확하게 머릿속에 정립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은 이제껏 레펜이 보고 들은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호호, 꼬맹이에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 꼬맹이는 영리하니까 금방 이해할 거야.
-응, 위니스.
꼬물거리며 레펜이 위니스가 읽던 책에 손을 가져갔다. 자신의 품속에서 자신이 읽던 책을 펼쳐 드는 어린 레펜을 보며 위니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영리한 아이라니까? 어떻게 벌써 이 책을 술술 읽는 거야?’
레펜에게 위니스가 글자를 가르쳐 준 것은 그냥 심심풀이 삼아서였다. 그날 이후 의욕이 생긴 레펜이 자신에게 글자를 가르쳐 달라고 위니스에게 조른 것이다.
딱히 어린애용 글자책 같은 것도 없어서 위니스는 그냥 들고 다니던 서적을 꺼냈다. 무슨 문학 작품이 아니라 대륙 각지의 풍토며 문화 등을 담은 안내서 같은 것이었다. 대륙 여기저기를 떠도는 그녀에겐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 서적과 원래 가지고 있던 공용어 사전―엘프인 그녀가 인간의 문자를 익히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을 들고 레펜을 가르쳤는데…….
‘뭔 애가 글자 배운 지 세 시간 만에 모든 책을 술술 읽어?’
어린 레펜은 그냥 공용어 사전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 다 외우더니, 그대로 100퍼센트 이해하고 바로 술술 책을 읽어 버린 것이다.
공용어 자체야 표음 문자니 문자를 외우는 것만으로 대충은 읽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표음 문자더라도 모든 단어가 전부 발음 그대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단어마다 저마다 뜻이 다르고 의미가 다르며 특이한 발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제대로 글을 익히려면 적어도 몇 달의 시간은 필요하다.
-에휴, 난 저 책 술술 읽는데 1년은 걸렸는데.
-그래? 이상하네, 쉽던데.
-잘났어.
꽁 꿀밤을 때려 주니 레펜이 울상을 지었다.
-우씨! 왜 때려!
머리 위로 깔깔대는 위니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정수리를 매만지다 말고 문득 레펜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기, 위니스.
-응?
갑자기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위니스는 봄이 오면 떠날 거지?
-그래야겠지.
-저기…….
우물쭈물하며 레펜이 손가락을 꼬았다. 힘겹게, 힘겹게 아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혹시…… 안 떠날 수도 있어?
위니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꼬맹아, 난 네가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야.
처음에는 정말 반 재미 삼아 같이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이 아이와 정이 들 대로 들었다. 완전 남일 뿐이라 생각했다면,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었어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너도 알고 있잖니? 내가 왜 떠나야 하는지…….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엘프다. 그녀가 대륙을 떠도는 것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물 경우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 위험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일단, 늙지 않는 그녀를 보고 첫 번째로 의심을 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 해도 한 장소에 오래 머물다 보면 누군가가 알아차릴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레펜도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해하지만, 그래도 인정하기 싫다. 꾸물대는 아이를 다독이며 그녀가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두렵니?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는 게?
-그런 건 아니야.
불퉁한 얼굴로 레펜이 고개를 돌렸다. 위니스는 실소를 흘렸다. 애가 고집은 있어서 절대 자기 입으로 인정은 안 한다.
-하지만 위니스가 떠나면 도로 혼자가 되잖아, 난. 나 때문에 아빠도 엄마도 죽었는데…….
-그때였다. 위니스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레펜의 양 뺨을 감쌌다. 조금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그 시선에 레펜이 당황했다.
-……위니스?
-잘 들어, 꼬맹아.
열기 어린 눈동자로 아이를 바라보며 위니스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넌 엄마 아빠를 죽이지 않았어.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도 네 탓이 아니야.
-……위니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저주에 대해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거든.
마을에서의 일이었다. 검은 기운의 회오리를 베며 위니스는 대략 레펜의 저주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도 그와 비슷한 것들을 제법 베어 왔으니까.
그 후, 몰래 마을 사람들로부터 일명 ‘레펜의 저주’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경우였는지 열심히 조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해. 꼬맹이, 네 저주에 사람이 죽을 정도의 힘은 없어.
-그럼 아빠는?
-사고일 뿐이야. 불운한 사고인 건 틀림없지만, 세상엔 그렇게 불행도 닥치기 마련이지. 꼬맹이 너랑은 상관없어.
-그럼 엄마는? 왜 건강하던 엄마가 그렇게 된 거야?
-아빠가 떠나고 반년 뒤에 돌아가셨지?
-응.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몸도 마음도 약해진 여인이 시름시름 앓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분명 슬픈 일이지만 꼬맹이 너랑은 상관없어.
-그럼 마을 사람들은? 죽은 소와 말은? 아이들이 앓은 건?
-아이들은 자라면서 몇 번 아프곤 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는 경우도 많고. 하지만 네 저주에 사람을 아프게 하는 힘 따윈 없어. 확실해.
레펜이 눈을 깜빡였다. 근거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위니스의 음성에는 이해 못 할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강한 확신이 그걸 가능케 했다.
-나…… 그럼 엄마 아빠를 죽인 게 아니야?
-아니야, 꼬맹아.
위니스는 레펜의 머리를 껴안았다. 혹시나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아이는 조용히 안겨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아이가 물었다.
-그럼……모든 게 우연이었어? 그 모든 일이 전부?
위니스가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라곤 안 했다. 분명 네 주위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그 때문에 불이 나거나 집이 무너지거나 한 것은 사실이야. 그 소나 말은 외양간이 흔들리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갔다가 들짐승에게 물려 죽었지?
-아, 응…….
-널 키워 주던 집에 불이 나서 결국 쫓겨났댔지? 아마도 그건 네 탓이 맞을 거야.
-…….
아주 죄가 없는 건 아니었네? 머쓱해져 레펜은 뺨을 긁었다.
역시 그녀는 가차 없다. 이럴 때에도 아무 죄도 없다며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인 부분은 그냥 사실대로 말해 버린다.
뭐, 그래도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무릎을 꿇고 위니스가 레펜과 눈동자를 마주 했다.
-봄이 되면 널 데려갈 곳이 있어, 꼬맹아.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곳에선 더 이상 불길한 아이 취급을 당하지 않을 거야.
☆ ☆ ☆
“봄이 오자 위니스는 떠났어. 나도 그녀와 함께 마을을 떠났지. 그 후 잠깐 더 여행을 했고 결국 우린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녀가 어린 레펜을 데리고 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델피아의 마탑이었다.
엘프임을 숨기고 대륙을 떠돌며 검술 수행을 하던 위니스는 마법사와 전투를 해 본 경험도 많았다. 그때의 감각을 바탕으로 레펜의 저주가 사실은 마력에 의한 것임을 짐작했던 것이다.
-꼬맹아, 넌 마력도 타고났고 머리도 좋으니까 분명 마탑의 마법사들도 받아들여 줄 거야.
마법에 대해 잘 모르던 위니스는 그저 애가 마법사 될 재능이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알았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이라도 나처럼 배우지도 않고 마력을 쌓거나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법은 없다는 걸. 나란 놈은 실로 규격 외의 존재였다는 것을.”
마탑의 마법사들도 레펜의 진정한 재능을 알아볼 정도의 안목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법사의 자질이 어마어마하게 출중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흔쾌히 마법사의 도제로 들이겠다고 했다.
-잘 지내라, 꼬맹아.
마탑에 어린 레펜을 데려다 준 뒤 위니스는 바로 떠났다. 그녀와 헤어지는 그 순간에도 레펜은 울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이별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은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두 번 다시 얼굴 볼 일은 없을 거야. 난 한 번 왔던 곳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너도 이제 네 길을 걸어야지?
헤어지는 순간마저도, 그녀는 거짓말로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 차가운 진실을 말해 주는 걸 택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 두는 게 제일 좋은 법이야.
마지막까지 그녀는 진실로 자신을 대했다. 그래서 슬펐지만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럼 안녕이다, 꼬맹아.
저주받은 아이, 레펜은 그렇게 마법사의 길에 들어섰다. 마법사다운 이름도 받았다. 새롭게 레펜하르트로 불리게 된 아이는 그녀를 추억 속에 담아 자신의 성을 정했다.
“위니스 스톤, 그녀의 이름을 따 윈스톤이라는 성을 지었다. 그때부터 난 레펜하르트 윈스톤이 되었고 마탑에서 마법사로 성장했지.”
시리스는 잔잔한 얼굴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살짝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께는 그녀가 첫사랑이었겠네요?”
“에이, 열 살짜리가 사랑은 무슨.”
세상이 다를 수도 있다는 걸 알려 준 그녀.
죽음을 생각하던 아이에게 미소를 되찾아 주었던 그녀.
그녀에 대한 감정은 단순한 사랑이란 단어로 단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내겐 그녀야말로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질문했다.
“그럼 그때부터 엘프에 대한 생각이 바뀌신 거예요?”
겸연쩍어하며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아, 그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어. 말하긴 부끄럽지만 그 후의 나는 꽤 싸가지가 없었는지라…….”
마탑에 들어간 이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저주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마법적인 재능, 그것도 출중하게 뛰어난 재능이었다는 것을.
자신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도 축복받은 아이였다.
1서클을 다 익히는 데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그걸 본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은 드디어 마탑의 명예를 드높일 인재가 들어왔다며 고작 열 살짜리 아이를 마구 칭찬하고 추켜세워 주었다.
“학대받던 놈이 갑자기 과분한 인정을 받고 주위에서 마냥 떠받들어 주었으니, 당연히 애가 오만불손해질 수밖에 없지.”
다른 마법사들이 하도 질시를 해 대서 이후 재능을 좀 감추긴 했지만 이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는 깨달아 버렸다. 주위 모든 마법사들이 우스워 보이니 그 와중에 점점 위니스에 대해서는 잊어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 인성 교육에는 참 안 좋은 환경이었어, 음음.”
그렇게 어린 레펜하르트는 마탑에서 성장했다.
점차 나이가 들어 가자 마냥 예뻐만 하던 원로 마법사조차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성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내 딴엔 숨긴다고 숨긴 거였는데도 그렇더라고.”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리고 철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미 오만해진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아부 한마디 못 하는 바람에 고위 마법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덕분에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마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위니스에 대해선 싹 잊고 있었어. 마탑에서야 뭐, 엘프를 볼 일이 있어야지?”
마탑에서 빠져나온 후로는 마법의 경지를 올리느라 바빴다. 던전 탐사를 하고 재산을 비축하며 충실히 힘을 키워 갔다.
그 와중에 가끔 이종족 노예, 특히 엘프 노예를 보는 일도 있었지만 딱히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노예로 사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위니스를 떠올리게 된 건 그때였다.”
던전에서 얻은 기물을 팔기 위해 우연히 들린 차탄의 수도, 제플린.
그곳에서 비참하게 망가져 있던 한 백금발의 엘프 여인을 보았을 때.
“그녀가 위니스를 닮았었나요?”
전쟁의 자신을 타인처럼 칭하며 시리스가 물었다.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