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54
“그렇지는 않았어.”
그녀는 위니스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녀는 위니스처럼 당당하고 자신만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예도 아니었다. 평범한 엘프 노예처럼 비굴하고 주인에게 아양을 떨며 웃음을 피워 내지도 않았다.
그저 학대받고 고통받으며 세상에 한없이 절망하고 있었을 뿐.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빛바랜 눈동자는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 달라고.
“그녀를 보고 떠올린 것은 위니스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아련한 그리움을 닮아 중얼거렸다.
“어릴 적의 내 자신이었지…….”
☆ ☆ ☆
생각이 났다.
위니스는 엘프임에도, 인간인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꼬맹아, 네 입장에선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큰 도움이겠지만, 사실 난 금전 몇 푼을 더 썼을 뿐이란다.
그는 이미 강력한 대마법사였다. 저 엘프 여인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저 마법의 언령 몇 마디를 더 구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저 여인 입장에선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큰 도움일 것이다.
“난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그녀를 돌봤지. 그리고 점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로 레펜하르트는 점차 더 이종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물론 그가 이종족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유는 어디까지나 10서클의 단초를 잡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그들을 구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엘프를 사랑하게 되고, 다른 오지의 종족과도 점점 접촉이 잦아지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결국 그들을 위한 땅을 마련하기까지 이르렀다.
인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이종족에 대한 사상은 그가 겪어 온 경험과 삶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지 결코 어린 시절의 짧은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위니스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당시의 시리스를 구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시리스는 말없이 찻잔을 휘저었다. 이미 차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문득 시리스가 질문했다.
“혹시, 그 뒤에 위니스란 분을 다시 만나 보셨나요?”
“못 만났어. 대륙이 워낙 넓잖니?”
“그래도……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나요?”
사실 안타레스 제국을 세운 이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했다.
“방법이 없었어. 이름도 가명이었고, 얼굴도 변장한 것이라 진짜가 아니라고 했고.”
위니스는 자상하고 상냥했지만, 동시에 철저한 성격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다.
“엘프란 걸 가르쳐 준 것도 사실 엄청난 호의였지, 그녀에겐.”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아는 것은 종족뿐인데 그 사람을 찾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일에 안 그래도 바쁜 수하들을 부려 먹을 만큼 레펜하르트는 악랄한 황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위니스 씨 쪽에서는 레펜하르트 님을 알지 않았을까요?”
레펜하르트야 위니스를 찾을 방도가 없다지만 반대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엘프의 구원자로 나선 레펜하르트를 당시의 엘프가 모르고 있었을 리 없는 것이다. 장성한 아이를 보고 싶어서라도 한 번쯤 모습을 드러낼 법한데…….
잠시 생각에 잠긴 시리스가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아, 그럼 혹시 돌아가신 걸지도…….”
이미 죽어 버렸다면 모를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인간 세상을 떠돌며 위험한 수행을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생각도 해 봤는데, 그냥 모를 수도 있겠더라고. 당시의 난 열 살이었고, 본격적으로 움직인 건 서른 살 이후였으니 서로 얼굴을 마주 봐도 알아볼 리가 없잖아?”
“레펜하르트의 이름을 듣고 떠올릴 수도 있잖아요?”
“위니스가 과연 내 이름을 기억이나 하고 있으려나? 무조건 꼬맹이라고만 불렀지 한 번도 이름 부른 적이 없는데.”
그가 기억하는 위니스는 일견 철저해 보이면서도 사소한 데선 굉장히 대충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아마도 분명 이름 까먹고 있었을 거다.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폈다.
“아마도 그녀는 날 기억도 못하고 있지 싶은데. 맺고 끊음이 분명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나요?”
“그렇진 않았어. 위니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
시리스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헤어지며 위니스가 남겼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녀도 말했듯이,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 두는 게 제일 좋은 법이니까.”
4
오후의 티타임이 끝나고 다시 업무를 볼 시간이 되었다. 이제부터 출발하는 신생 이종족 노예 해방단, 일명 신 프리지안 해방단의 출범식을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그냥 원래 이름에 신新 하나만 붙였소? 이름 짓기 되게 귀찮았나 보군?”
카를과 함께 홀을 향해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카를도 마주 웃었다.
“어차피 타국 나가면 쓰지도 않을 명칭인데요. 왜 거기에 머리 씁니까? 안 그래도 할 일 많구먼.”
“하긴……. 그럼 난 가서 뭘 해야 하오?”
전생 때는 이런 짓을 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카를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옥좌에 앉아서 써 준 대로 읽으시고 앞날을 축복해 주시면 됩니다. 명색이 왕인데 그 정도는 해 주셔야죠.”
“내가 신관도 아닌데 무슨 축복을 해? 다른 나라 국왕들도 어떻게 하나?”
“다른 나라야 뭐, 국왕의 홀 같은 걸 휘두른다거나 하는 식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하지만 폐하는 좋은 거 있으시잖습니까?”
“좋은 거?”
“맨날 하는 거요.”
“아, 그거.”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이 말을 이었다.
“평소처럼 한 방 쏴 주십시오. 그래서 일부러 옥좌 위 천장도 개폐開閉식으로 만든 건데.”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알현의 홀로 들어섰다. 이미 홀 안에는 백여 명 정도의 인원이 질서 정연하게 무릎 꿇은 채 레펜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앞에 부복한 이는 이 신 프리지안 해방단의 단장, 틸라였다.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가 카를에게 속삭였다.
“어라? 틸라 양이 단장이오? 난 당연히 이니야나 유스테아 씨가 단장이 될 줄 알았는데.”
변장한 이종족 구성 대부분이 드워프 여성과 오지의 엘프 전사인 만큼 그들을 통솔하는 이도 역시 변장이 가능한 오러 유저, 유스테아와 이니야였다. 그런데 왜 틸라가?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둘 다 문서 작성 귀찮다고 떠넘겼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유구만. 그래도 왜 틸라 양이오?”
틸라가 뛰어난 드워프 전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중책을 맡을 만큼 강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니야의 부관인 세르펠 같은 이가 낫지 않나?”
“그러니까 무력의 강약으로만 재는 버릇 좀 버리시라니까요? 왜 꼭 강한 사람이 우두머리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카를이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를 타박했다.
실제로 틸라는 카를의 곁에서 종종 공무를 돕다 보니 드워프답지 않게 상당한 수준의 행정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작전을 진행하고 상황을 파악하며 타국의 아군, 그러니까 타오반 상회와 지속적으로 연락해 연계를 갖추는 등의 능력이라면 틸라만 한 적임자도 없었다.
“게다가 다들 그녀가 단장인데 불만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빽이 좋잖습니까?”
“카를, 댁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말이지.”
어쨌거나 대충 상황은 이해가 갔다.
레펜하르트가 옥좌에 올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고통받는 동포를 위해 일어선 용맹한 이들이여, 자유를 위해 일어선 그대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니…….”
그렇게 적당히 써 준 대로 읽고 나니 부복한 이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안타레스의 명예를 걸고,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우렁찬 호통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는 허공에 주먹을 찔렀다.
“가거라! 안타레스의 전사들이여!”
빛의 기둥이 천장의 구멍을 통과해 푸른 하늘을 꿰뚫었다.
콰아아앙!
황금빛이 해방단의 머리 위를 환하게 밝힌다. 모두가 감격해 고개를 숙였다. 폭음 속에서 레펜하르트가 남몰래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나. 이제 슬슬 이 짓거리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어.’
☆ ☆ ☆
출범식을 마치고 모인 이들이 하나 둘 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장 격인 틸라와 이니야, 유스테아는 남아서 마저 처리할 일이 있지만 나머지는 바로 궁 밖으로 나가 출발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
홀을 나서는, 변장한 드워프 여성들과 엘프 남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이야, 다들 상당히 인간 같구려. 저 정도면 정말 안 들키겠는데?”
틸라만 해도 지금의 그녀는 그저 평범한 10대 인간 소녀 이상은 아니었다. 귀를 가리고 가슴을 꼭꼭 동여매니 전혀 드워프라는 티가 나질 않았다. 대부분의 드워프 여성들은 인간 소녀와 인상이 흡사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엘프 쪽도 괜찮고.”
원래 엘프는 체형뿐 아니라 인상도 인간과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사실 귀만 가린다고 그렇게 인간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다들 화장을 통해 눈매와 입매를 교묘히 바꾸어 엘프다운 느낌을 상당히 지운 것이다.
“그런데 엘프 여인 숫자가 꽤 많은데? 엘프 중 가슴 큰 이가 저리 많았소?”
“사실 저 정도는 아니지요. 그래서 그냥 적당히 가슴 좀 있다 싶으면 모았습니다.”
“어, 그런 것치고는 다들 너무 큰데…….”
카를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뽕 넣었습니다. 벗기고 확인할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아, 그렇군…….”
대화를 나누다 말고 두 사람은 문득 얼굴을 붉혔다. 일국의 국왕과 재상이 진지하게 머리 맞대고 여인들 가슴 사이즈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국정 운영이 이리 파렴치해졌나?
“어쨌거나 저 정도면 그냥 잘생긴 인간 남자와 예쁜 인간 여자처럼 보이는구려.”
“지나치게 잘생기고 예쁜 이들이 모여 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인간 병사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 괜찮을 겁니다.”
“응, 정말 괜찮을 것 같소. 나만 해도 도저히 못 알아보겠던데?”
모였던 엘프 여성 중에는 평소 자주 보고 지냈던 이니야며 플로라, 시리스의 의자매인 샤일렌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둘러봐도 도저히 못 찾겠다. 여인의 화장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레펜하르트였다.
“저도 좀 놀랐습니다. 틸라 양이야 그렇다 쳐도 유스테아 씨와 이니야 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더군요.”
틸라와 달리 유스테아와 이니야는 오러 유저로 제법 얼굴을 팔았다. 당연히 변장도 남들보다 훨씬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다.
슬슬 대부분의 단원들은 홀을 나섰고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작은 어린 소녀와 늘씬한 키의 흑발 여인, 둘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무심하게 생각할 때였다.
‘저들이 유스테아와 이니야인가?’
흑발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레펜하르트의 시선에 들어왔다.
“……어?”
순간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머릿속이 텅 비며 오직 흑발 여인의 얼굴만이 뇌리를 가득 메웠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싸늘한 눈매를 지닌 저 차가운 인상.
“저 알아보시겠어요, 레펜하르트 님?”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바로 인상이 바뀌었다. 차가운 인상 대신 장난기가 밴 온화한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