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60
일행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홀 여기저기서 불이 켜졌다. 천장 곳곳에 커다란 백색 구슬 같은 것이 박혀 빛을 내는데, 마치 한낮처럼 환했다.
“윽?”
“기습인가?”
불이 켜지자 일행이 놀라 주위를 경계했다. 한껏 경각심을 높이며 원진을 형성, 사방으로 검을 겨눈다. 하지만 주위는 고요했다. 그저 불만 켜졌을 뿐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러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감을 펼치며 타시드도 동의했다.
“아무 기척도 안 느껴집니다.”
마검 엘드란을 다시 등에 차며 카를이 의아해했다.
“버려진 곳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인적은 없었지만, 버려졌다고 하기엔 너무 깔끔하다. 먼지도 거의 쌓이지 않았고 철제 벽도 매끈한 백색을 뽐내고 있다. 오랫동안 관리된 흔적이 역력하다.
“평소 상주하는 인원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상님. 은의 현자는 평소에 속세 신분으로 산다면서요? 그럼 볼일이 있을 때만 이곳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러스의 말에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흐음, 그렇다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지.”
아까부터 그는 홀 내부의 마력 흐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들이 공간 이동을 한 마법진은 다시 모습을 감췄지만 그래도 그 여파는 그대로 남은 상태였다. 이 홀 곳곳에 같은 느낌의 마력파가 감지된다. 같은 종류의 마법진이 다량으로 포진해 있다는 의미다.
“역시 이곳은 다이만 터미널과 비슷한 용도인 것 같다. 우리가 이용한 마법진이 그곳 말고도 대륙 곳곳에 분포하고, 이곳이 터미널 역할을 하는 거지.”
“누군가가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군요, 형님.”
“그렇지.”
양 주먹을 말아 쥐며 레펜하르트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움직여 보지. 여기 서 있어 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진 않으니.”
☆ ☆ ☆
홀 외부는 긴 통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좌우에 문 하나 없는, 단순하게 길기만 한 흰색 통로였다. 걸음을 옮기며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대체 뭐죠? 왜 쓸데없이 이렇게 복도만 잔뜩…….”
자고로 복도란 것은 방과 방 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길이 아닌가? 이해하기 힘든 구조였다.
그렇게 잠시 걷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복도 바닥에서 둥근 원반이 분리되며 떠올랐다. 그 숫자는 일곱, 딱 레펜하르트 일행과 같은 수였다.
긴장하며 러스와 타시드가 검을 겨누었다.
“뭐지, 저건?”
“함정인가!”
허공에 떠오른 원반은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라, 블레이드 오러까지 끌어내며 막 두 사람이 투지를 불태우려던 차였다.
갑자기 떠오른 원반들이 움직였다. 단 일행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위이잉.
묘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복도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 러스와 타시드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
“……뭐야?”
뭔가 있을 것처럼 나타나더니 왜 그냥 가 버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광경이었다.
실란이 자신없어하며 슬그머니 말했다.
“혹시…… 저걸 타고 이 복도를 지나가는 게 아닐까요?”
러스와 타시드가 헛웃음을 흘리며 핀잔을 던졌다.
“멀쩡한 두 다리 놔두고 뭐하러? 은의 현자는 죄다 다리 불구래?”
“그렇다, 실란. 이 복도가 길어 봤자 200미터도 안 되는데 이걸 안 걷겠다고 저딴 걸 만들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하지만 복도란 게 방과 방을 연결하는 것이고, 여기가 방과 방 사이가 너무 멀어서 이런 구조라면…… 노약자들을 위해서 저런 장치를 해둘 수도 있잖아요?”
이래서 초인이란 작자들은 문제다. 자기들에게야 200미터야 대충 발 몇 번 구르면 닿는 거리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충분히 먼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가 손짓했다.
“계속 가 보면 알겠지. 실란 말이 옳다면 이 복도 끝에 뭔가가 나올 테니까.”
복도 끝에 다다르니 커다란 철제문이 보였다. 철제문을 기점으로 복도가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가다 끊겼다. 근처까지 가 보니 어둠에 휩싸여 새까만 칠흑의 공간이 나왔다. 통로는 그 공간 중앙쯤에 뻥 뚫린 형태로 나 있었다.
마치 큰 절벽 중간쯤에 뚫린 동굴 같은 형태였다. 조심스레 어둠 저편을 내려다보며 카를이 중얼거렸다.
“이건 뭔지 모르겠군요. 건축을 하다 만 건가?”
떨어져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저 절벽 아래로는 사다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식의 구조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가 등 뒤로 손짓을 했다.
“일단 저 문 안쪽을 조사해 보세.”
철제문은 강력한 잠금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었다. 물론 그 마법이 아무리 강력해도 레펜하르트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낑낑대긴 했지만 이내 잠금 마법을 풀었다.
문이 열리며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홀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장에서 불이 켜지며 내부 구조가 확연히 드러났다.
“이건 또 뭐래?”
주위를 둘러보며 타시드가 들창코를 킁킁거렸다.
기이한 곳이었다. 그 공간 전체를 수백 개의 거대한 찬장 같은 것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아니, 찬장이라기보다는 책장에 더 가까운 형태랄까? 하지만 그 책장에 놓여 있는 것은 책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수정구가 책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정보 저장용 수정구로군.”
대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의 수정구들이었다.
이 시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식을 저장하기 위한 매체로 서적을 사용했다. 하지만 대마법사쯤 되면 다른 방식을 찾기도 했다.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마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
그 위대한 비밀을 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마법서는 복잡한 암호와 은밀한 은유로 쓰이며 오직 마법사 당사자와 그 가르침을 이은 도제들만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엔 머리 좋은 이도 많고 암호 해독에 재능을 지닌 이도 드물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정도는 해독해 정보를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대마법사쯤 되면 정보 수정구를 애용하곤 했다.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는 이 정보 수정구는 마법의 결계를 깨기 전엔 내부 내용에 대해 전혀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방 안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흘렸다.
“이 귀한 물건이 무슨 제과점 빵 진열해 놓은 것처럼 놓여 있다니…….”
정보 수정구는 그 효능만큼이나 귀했다. 재료도 귀하고 제작 기간도 대단히 오래 걸린다. 어지간한 대마법사라도 정보 수정구는 한두 개 정도 보유하는 것이 전부, 그래서 제일 중요한 핵심적인 정보만 수정구를 쓰고 나머진 서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뭐, 나는 쓰지 않았지만.’
재수 없을 정도로 천재였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굳이 저 정보 저장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다 외우고 있으면 되는 문제니까.
쓰지는 않았어도 정보 수정구의 용법쯤은 이미 마스터한 레펜하르트다. 그가 화색을 띠우며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하여튼 잘됐군.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어.”
이 정보 저장구의 장점은 바로, 자신보다 약한 마법사라면 절대 이 정보를 들여다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장점은 그대로 단점으로도 바뀐다.
수정구의 주인보다도 강력한 마법사라면 오히려 서적보다도 빠르고 쉽게 모든 정보를 훔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대마법사 입장에선 별 의미가 없는 단점이다. 자신의 정보 수정구를 훔쳐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법사라면 어차피 자신보다 한 수 위, 굳이 들여다볼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라면 대단히 유용해진다.
‘이 귀한 물건이 흔한 서적처럼 놓여 있다니 정말 보통 조직이 아니군, 이거.’
이쯤 되니 슬슬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동안 본 공간 마법진이며 이 거대한 구조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기기들, 이것만 봐도 은의 현자란 조직이 얼마나 강력한 고대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 어서 정체를 파악해야지.’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레펜하르트가 주문을 외웠다.
“만물을 꿰뚫는 자, 그 눈이 내게 임해 통찰의 시야로 화하라. 임프로브드 데이터 리딩.”
순식간에 수정구들의 잠금 결계가 차례로 해지되며 그 속에 담긴 지식이 레펜하르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그것은 보통 정보가 아니었다.
바로, 잊힌 옛 역사에 대한 정보였다.
☆ ☆ ☆
수만 년 전, 주신 세이어가 인간을 창조하였다.
창조된 인간은 곧 번성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놀라운 번영을 누렸으니, 그 찬란한 시대를 일컬어 은의 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은의 시대 인류는 오만해져 신의 자리를 탐했으니, 이에 분노한 세이어께서 진노의 잔을 부으사 그 찬란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문명을 잃은 인류의 고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울며 인류는 세이어께 용서를 구했고, 자비로운 주신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어 새로운 번영을 약속하셨다.
약속의 증표로 세이어께서 인류를 도울 새로운 종족을 내려 주셨으니, 이는 곧 엘프와 드워프, 또 오크라.
아름다운 엘프를 빚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고, 손재주 좋은 드워프를 빚어 인간의 집을 짓게 하며, 힘이 센 오크로 하여금 인간의 궂은일을 돕게 하였으니, 저들을 부리며 인류는 다시 번영의 길을 걸었다.
수많은 인간의 왕국이 생기고 서로 싸우고 또는 협동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갔다. 그 와중에 어리석은 노예 종족들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야만화된 오지의 이종족들이었다.
인간들 사이의 전쟁이 심화되며 인간 왕국의 힘도 서서히 약해졌다. 그 틈에 야만화된 오지의 노예 종족들이 인간을 습격하게 되었으니 날이 갈수록 점점 그 피해가 커졌다.
결국 보다 못한 세이어께서 위대한 선지자에게 뜻을 전해 인간을 보살피게 하였으니, 이가 바로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초대 황제, 바슈탈론 1세였다.
바슈탈론 1세는 오지를 청소하고 인류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 이후 노예 종족들도 본성을 되찾고 인류에 대적하는 그릇됨을 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이어 교단이 가르치는 세계의 역사다.
하지만 오지의 이종족을 접하고 각종 고대 문헌을 해독한 레펜하르트는 또 다른 역사를 알고 있었다.
천 년 전, 최후의 엘프 왕국 엘븐하임이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엘프는 인간의 노예가 아니었다.
천 년 전, 마지막 드워프 왕국 그랜드기어가 멸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드워프는 인간의 노예가 아니었다.
엘드라스 문명의 잔재, 세계수 엘븐하임 속에서 엘프는 우아한 문화와 강력한 힘을 지닌 종족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알하트란 문명의 기술을 물려받은 드워프는 플룬탄 산맥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저 왕국을 세우고 번성하고 있었다.
물론 마냥 평화로운 삶인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인간의 아홉 왕국은 수시로 서로 싸우고, 또는 협력하며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엘프나 드워프와 충돌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예나 지금이나 엘프의 미모는 인간의 탐욕의 대상이었다. 드워프의 기술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몇 번이나 엘프, 드워프와 인류의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로가 멸망할 지경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등 뒤의 적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총력을 다해 엘프나 드워프 왕국을 공격하지 못했으니까.
변화가 생긴 것은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초대 황제, 바슈탈론 1세가 등장한 후였다.
그는 놀라운 카리스마로 전 대륙의 인류를 통일했다. 그리고 각종 개혁을 행했다.
제멋대로이던 다른 교단들을 눌러 세이어의 위세 아래 놓았다. 그리하여 모든 성직자의 힘을 손에 넣었다.
일인전승으로 전해지던 마법의 지식도 제국의 힘으로 한데 모았다. 마탑을 세우고 마법사들을 우대해 중구난방이던 마법 학파를 확실히 정리하고, 대대적으로 강력한 마법사를 대거 양성했다.
하나로 통일된 인류 제국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황제는 그 힘을 제일 먼저 대륙 동부로 뻗었다.
지금의 크로방스, 바실리, 테이칸 왕국 등이 위치한 대륙 동부는 당시만 해도 인간의 땅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전사의 종족, 오크들이 그 거대한 대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과 오크의 거대한 종족 전쟁이 일어났다.
통일된 인류의 힘에 비해 오크들은 수십, 수백의 부족 단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개개인은 강력해도 군대로서 통일성이 부족하니 인간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또한 바슈탈론 1세는 마법사들을 대대적으로 앞세웠다. 전사의 종족이라는 오크들이지만, 마법에 대한 저항력은 너무 약했다. 강력한 오크 전사들이 서글플 정도로 맥없이 쓰러져 갔다.
결국 대부분의 오크들이 죽거나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오크들은 산맥 너머 황무지, 페틀란드까지 쫓겨나 몬스터 취급을 받았다.
바슈탈론 1세의 정복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력한 인간의 군대, 그것은 바로 엘븐하임과 그랜드기어로 향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승리한 것은 인류였다.
거대한 세계수, 엘븐하임이 불타 쓰러졌다. 그 가혹한 전쟁의 여파로 신록이 우거지던 숲이 사라지고 광활한 스펠라트 사막이 되었다.
위대한 왕국, 그랜드기어는 주춧돌까지 파괴당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산맥 일부는 대분화가 일어 대륙 최대의 화산, 레단트 웨일이 되었으며 일부는 바다로 가라앉고 나머지는 열대 밀림이 덮어 대수해 플룬탄이 되었다.
살아남은 엘프와 드워프는 모두 노예가 되었다. 간신히 도망친 소수만이 오지에 숨어 명맥을 이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