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62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네.’
레펜하르트도 은의 시대 고대인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고대 엘프어나 고대 드워프어를 사용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대인들이 엘프나 드워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럼 당시의 엘프와 드워프는 뭔데?’
전생 때 레펜하르트는 은의 시대 유물의 자료에서 고대인과 엘프, 드워프가 함께 나오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직접 찾은 유물도 있었고, 오지의 엘프나 드워프가 지닌 유물인 경우도 있었다.
‘당장 엘류시온의 목소리만 해도 귀 긴 금발 엘프들이 나오잖아.’
뿐만 아니라 엘류시온의 목소리를 상위 레벨까지 사용하다 보면 오크나 트롤도 등장한다. 플레이 방식이 오크와 트롤의 습격이 닥치기 전에 모든 판자를 맞춰 떨어트리는 타입이다 보니 오크는 흉악하게 나오고 트롤은 광폭화된 상태로 구현되었지만, 어쨌건 등장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 은의 시대엔 분명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이 있었다. 그리고 은발과 흑발의 고대인 또한.
레펜하르트는 고민에 잠겼다.
“으음, 이건 도대체…….”
고대인들에 비해 엘프와 드워프가 그려진 유물은 극소수다. 하지만 모든 은의 시대 유물은 고대 엘프어와 고대 드워프어로 적혀 있다. 세상은 그저 고대어라고만 알고 있지만, 언어학적으로도 조예가 깊은 레펜하르트는 저 고대어가 현존하는 엘프, 드워프어와 같은 계통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은의 시대 문명은 엘프와 드워프가 선도하고 있었다.
인류의 조상이 된 고대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당시의 오크와 트롤은 지금처럼 자연 친화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어 그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뿐이다.
‘엘프나 드워프의 번식력과 인간의 번식력을 비교해 보면 유물의 숫자 차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
고고학적으로 볼 때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그런데 고대인이 사실은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였다고?’
순간 은의 현자들은 엘프, 드워프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당장 정보 속에 ‘귀가 길고 몸이 가느다란 엘프나 귀가 뾰족하고 지나치게 짧고 굵은 드워프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 우길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왜 은의 현자가 저런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겠군.’
은의 현자가 고대의 비밀을 감추려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만물의 영장이라 믿었던 인류, 그 위에 노예인 줄만 알았던 엘프와 드워프가 존재했다는 것은 극단적인 이들에겐 치욕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하지만 굳이 고대인을 엘프와 드워프로 만들 필요는 없는데?’
장신의 인간처럼 보이는 엘프, 단신의 인간처럼 보이는 드워프가 있다면 그건 그냥 장신과 단신의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명확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은의 현자가 일부러 정보를 조작한 것 같지도 않다.
인류를 수호하고, 인류의 긍지를 높이기 위해서 역사까지 조작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눈에 뻔히 보이고 가능성도 가장 높은 결론을 놔두고, 굳이 고대인들을 고대 엘프와 고대 드워프라 믿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오지에 살고 있던 현재의 엘프와 드워프들조차도 고대인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판인데 말이지.’
모순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뭔가……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가?’
의문을 품고 레펜하르트는 좀 더 정보 수정구들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아쉽군.’
혀를 차며 일단 고민을 접었다. 제국 이후의 역사를 검색해 보니 은의 현자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행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잔뜩 나오기 시작했다.
비밀에 접근한 유적 탐사자들을 죽이고, 유물을 빼앗고,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면 몰래 말살하고, 이종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는 왕이나 귀족을 제거하며, 미처 손을 쓰지 못했을 경우 타국을 움직여 왕국을 전복시키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면서도 결코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은의 현자라는 명칭조차도 철저히 숨겼다. 아무리 비밀 조직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민담 형식으로 존재나 이름 정도는 알려질 법도 한데, 이들은 그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기록을 읽으며 레펜하르트는 기가 찼다.
‘이런 놈들이 세상에 있었다니…….’
왜 전생 때 인간 왕국들이 그리 잘도 뭉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놈들이 뒤에 있었으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그런 대전쟁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테스론과 제이드가 은의 현자라고 했지? 그럼 전생 때도 마찬가지였겠군.’
지금의 유서스가 은의 협력자인 걸 보면 당시의 검성 사이러스도 은의 협력자였을 것이다. 전생 땐 사이러스가 유서스를 밀어내고 테네스의 가주 자리를 차지했었으니까.
이 시대에 있을 리 없는 알렉스가 테스론, 제이드와 함께 나타난 것을 보면 전생 때의 알렉스도 은의 현자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성녀 엘린 역시 세이어의 성직자인 만큼 은의 현자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전생 때 자신의 사천왕을 죽이고 레펜하르트를 궁지에 몰았던 다섯 명의 용사 일행 역시 알고 보면 모조리 은의 현자가 보낸 놈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빠드득.
주먹을 쥐며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미간이 짙게 일그러졌다.
가슴 한구석에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그 모든 일의 뒤에 이놈들이 있었단 말이지?’
☆ ☆ ☆
필요한 정보를 대충 다 검색한 뒤 레펜하르트는 탐색 마법을 거두었다. 장시간 마법을 지속했더니 살짝 두통이 왔다.
“으음…….”
신음하는 레펜하르트를 부축하며 시리스가 수통을 건넸다.
“괜찮으세요, 레펜하르트 님?”
“아, 고마워, 시리스.”
목을 축이니 한결 나아진다.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일행은 그가 마법을 시전하는 내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이 물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폐하?”
레펜하르트는 간략하게 정리해 얻은 정보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대 엘프와 드워프에 대한 이야기는 뺐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일행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러스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우리를 조종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실란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어이가 없네요. 아니, 자기들이 뭔데 멋대로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한대?”
카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이종족에 대한 진실이 그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군요. 저 정도로 철저한 놈들이 뒤에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다들 황당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반면 이종족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티티마가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렸다.
“되게 웃긴 양반들이네? 우리가 보기엔 인간이 제일 무서운데.”
“그렇다. 대체 얼마나 겁이 많기에 저런 짓을 한 거지? 이상한 놈들이군.”
두 사람을 보며 시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저들이 성공하긴 했군요.”
얼핏 타시드를 겁쟁이라 매도하는 것처럼도 들리는 발언이었다. 타시드가 발끈하며 반박했다.
“제라드 님이나 바나텔 영감을 보고도 인간이 약하다는 소리가 나오나? 당장 폐하는?”
“그분들이야 어쩌다 한번 나오는 괴물들이잖아요.”
“전사를 숭상하는 우리 오크들 중에서도 저런 괴물은 안 나온다. 엘프 중엔 흔한가 보지?”
“아, 물론 없긴 하지만 그건 지금 시대니까 그렇죠. 과거에 없었으리란 법 있나요?”
“그럼 과거 인간들 중엔 없으리란 법이 있나? 마찬가지 아닌가?”
시리스와 타시드의 대화에 레펜하르트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본인이 눈앞에 있는데 괴물이라니…….”
하여튼, 드러난 역사의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세상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이들이 이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을 수 있다니?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머릿속을 정리하며 카를이 단언했다.
“은의 현자와 안타레스 공국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3
레펜하르트 일행은 정보 수정구들이 놓인 방을 나왔다. 다른 곳도 탐색해 보기 위해서였다.
“……라고는 해도, 길이 이것밖에 없는데요?”
어둠이 깔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실란이 난처해했다. 얼마나 큰 공간인지, 시리스가 빛의 정령으로 주위를 밝혀 보아도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런 데서 길이 끊겨 있는지 모르겠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카를이 말했다.
“일단 내려가 볼까요?”
상식적인 경우라면 바닥도 보이지 않는 이 매끈한 절벽―사실은 거대한 공간의 금속 벽이었지만―을 무턱대고 내려간다는 소리가 참으로 어이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일행에 마법사가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매스 레비테이션.”
다중 부유 주문으로 일행 전부를 허공에 띄운 뒤,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발을 디뎠다.
“실란, 이번엔 신성 주문 쓰지 마. 또 충돌할라.”
“안 써요, 안 써. 누굴 바보로 아나.”
핀잔을 던지며 실란도 살며시 몸을 던졌다. 일행 모두가 어둠 속에 묻혀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앉으며 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야 마법으로 내려온다손 치고, 은의 현자는 어떻게 여길 사용하는 걸까요?”
“부유 주문쯤은 다들 기본으로 사용하는 게 아닐까?”
레펜하르트는 대수롭잖다는 듯 대답했다. 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의 현자는 죄다 5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겁니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당장 이라나드 공작 같은 경우를 봐도 순수한 오러 유저였으니까.
“아니면 죄다 부유 주문이 걸린 부츠라도 신고 있나 보지. 몇천 년 동안 남의 유물 강탈했다잖아?”
“하기야…….”
그때 실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요?”
실란이 머리 위를 손짓했다. 일행이 들어왔던 절벽 중앙의 통로, 그곳에서 예의 기묘한 굉음과 함께 몇 개의 원반이 벽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위이잉.
실란이 발끈했다.
“거 봐요! 저거 타는 거 맞잖아!”
굳이 안전하게 내려가고 있는데 굳이 정체도 모르는 물체를 탈 필요는 없다. 일행은 계속 부유 주문을 써서 아래로 하강했다.
☆ ☆ ☆
한참을 내려가니 바닥이 보였다.
착지한 시리스와 레펜하르트, 실란이 저마다 빛의 정령이며 마법, 신성한 빛의 주문을 써 주위를 밝혔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니 상당한 광량이 나왔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며 공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를 살피던 레펜하르트 일행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야…….”
“우와!”
어지간한 왕궁 홀을 능가할 정도로 넓은 바닥이었다. 수백 개의 제단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고, 그 위로 각종 기이한 물체들이 놓여 있었다.
갑옷이나 무기, 배낭처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물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더 많았다. 새하얀 백색 상자라든가 마치 비석처럼 거대한 검은 돌, 그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일단 바닥에 내려오니 위에선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강렬히 느껴진다. 마법사인 시리스나 레펜하르트는 물론, 아직 마법이 미숙한 카를마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카를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거 혹시 전부 마도구입니까,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