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77
파묻어 두었던 기억.
신이 느껴서는 안 되기에 봉인된 그 감정이.
세이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의 얼굴에 인간의 분노가 떠올랐다.
“그렇군…….”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이 서로 맞물려진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황금빛의 오러, 기억 속의 그 불길한 섬광이 저 빛과 어우러진다.
세이어는 웃었다.
인간의 분노가 사라지고 신의 기쁨이 나타났다.
“그렇구나, 그자의 후예였군.”
갑자기 세이어의 전신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흔들림 없던 제라드를 순식간에 밀쳐버릴 정도로 가공할 힘이었다.
콰과앙!
“크윽!”
제라드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력이 폭풍처럼 밀려오니 도저히 제라드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수십 미터 뒤로 밀려나며 제라드가 애써 자세를 잡았다.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호오? 이제부터 제대로 해 보겠다 이건가?”
애초에 제라드는 상대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뭐, 제라드가 마법에 조예가 있어 상대의 숨겨진 기운을 느꼈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저 새끼, 저 얼굴이 밀리는 놈 표정은 아니지.’
무인이라서가 아니라 노인이라서, 오랜 삶과 경험 속에서 인간을 읽을 수 있으면 자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일 뿐이다.
제라드가 긴장하며 자세를 잡았다.
세이어가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인류의 신이 말했다.
“만나서 기쁘구나, 신살자神殺者의 후예여.”
☆ ☆ ☆
제라드는 눈을 껌벅였다.
“……신살자?”
에, 그러니까 액면대로만 해석해 보면 신을 죽인 자란 뜻인가?
“그렇다. 그대는 그자의 후예로구나.”
왠지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세이어가 뇌까렸다. 자세를 취한 채 제라드는 황당해했다.
신살자?
신을 죽여?
“전해지지 않은 것인가?”
묘하게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다. 세이어의 말에 제라드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아주 안 전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님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지?’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사부, 전대의 권황 라스탈이 캘러미티 혼을 전수할 때였다. 그때 분명 사부는 말했었다.
캘러미티 혼을 9중첩까지 익히게 된다면, 신조차도 죽일 수 있는 일격이 된다고!
‘그런데 그거야 당연히 허풍이잖아?’
원래 사부가 제자에게 기술 가르쳐 줄 때는 온갖 허풍 다 섞는 법이다. 이 기술을 완성시키면 하늘을 쪼갤 수 있다느니, 절벽도 무너트린다느니, 파도도 가른다느니…….
세상 사부치고 이 정도 허풍 안 넣는 사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연히 제라드도 레펜하르트를 가르칠 때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묘했다.
‘……가만, 허풍이긴 했나?’
허풍 섞어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자신은 하늘 못 쪼개고 절벽 못 무너트리나?
하늘 쪼개기? 캘러미티 혼이면 잠깐 대기권을 갈라 공기가 없는 상태 정도는 만들 수 있다. 절벽 무너트리기? 그 정도는 제자도 한다. 파도 가르기? 제라드 자신이 수업 중일 때도 그 정도는 했다.
잘 생각해 보니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 치고 딱히 허풍이었던 것은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면 다들 허풍인 줄 알다가 나중에 경악했을 뿐이지.
그렇게 잠시 당황했지만, 제라드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에이, 그래도 신을 죽인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누가 죽인다고 죽으면 그게 왜 신이냐?
제라드는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상대는 지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라드는 그걸 납득할 수 있었다.
원래 미친놈은 허무맹랑한 소릴 하니까 미친놈인 법이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른 놈이 어쩌다 저리 더럽게 미쳤나 모르겠군.”
여전히 무도한 제라드의 말에, 의외로 세이어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까지와 눈빛이 달라졌을 뿐.
“그대는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내 안의 자者가 인연이 있고 내 육체의 주인이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 흥미를 이끌어 아직 신의 위엄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세이어의 전신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세가 떨쳐졌다. 강렬한 보랏빛 영기, 천하의 제라드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다.
“윽!”
제라드가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제 그 흥미가 다했음이니. 신살자의 후예여, 그대는 신의 위엄을 볼 것이다.”
80년의 수행이 무색하게도, 공포마저 느껴지는 섬뜩한 음향이었다.
☆ ☆ ☆
보랏빛 영기는 하늘로 치솟지 않았다.
하늘을 꿰뚫고 그 위세를 세상 만방에 떨치지도 않았다.
그저 세이어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고요히 피어오르며 그 존재감을 드러낼 뿐.
하나 제라드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뭐, 뭔 기운이 저리…….’
극의를 넘보는 그이기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일렁이는 저 보랏빛 영기 속에 세상을 멸할 힘이 담겨 있었다.
‘맙소사, 바나텔과는 비교도 안 되는구먼.’
바나텔의 오러도 방대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바나텔의 오러는 마치 밀려오는 해일처럼 거칠고 거대하며 강렬하다. 반면 저 청년의 영기는 바다에 가까웠다. 그 자체로 한없이 깊고 넓어 그 한계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망망대해.
“으음…….”
신음을 흘리며 제라드는 자세를 바꿨다. 공격이 아닌 방어 태세, 나이 마흔 이후 처음 잡아 보는 자세였다.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신의 힘을 맛보라.”
세이어가 손을 휘둘렀다.
무심한 태도, 무심한 동작에 이어 백색 광채가 제라드를 덮쳐 갔다. 제라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단순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넓고 빠른 일격이기도 했다. 피할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젠장! 아까랑 완전히 다르잖아?’
비웃음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어조가 들려왔다.
“이것도 막을 수 있겠느냐?”
이제껏 제라드는 세이어의 모든 마법을 더블 스파이럴 가드로 견뎌 냈다.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궁극 방어기, 그 위력은 인류의 신인 세이어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제라드는 이제까지의 공격도 더블 스파이럴 가드가 아니면 막을 수 없었다는 소리도 된다.
‘이건 아무리 봐도 무린데?’
기겁하며 제라드는 되려 전신의 스파이럴 가드를 풀었다. 그리고 양팔을 아래로 흘리며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전신의 힘을 뺀, 축 늘어진 듯한 자세. 다른 무문에서 자연체라 부르는 자세다.
순간 섬광이 제라드를 휩쓸고 대지를 반으로 갈랐다.
☆ ☆ ☆
끔찍한 폭음이 순간 무음을 낳았다.
너무도 큰 소리는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던가? 필레나는 귀를 막은 채 눈을 깜박였다. 옆을 보니 이미 렐시아와 세렐라인은 혼절한 후였다. 기가 찼다.
‘맙소사, 이 거리에까지 여파가 미치다니…….’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세이어와 제라드가 있던 바로 옆 언덕, 족히 수백 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이쯤 되면 피신을 넘어 그냥 다른 장소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도 지금 세이어가 발한 거력은 가뿐히 이 일대까지 휩쓸어 연약한 두 여인의 정신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 정도이니 당연히 그 괴물 노인네도…….’
필레나는 섬광이 스친 파괴의 흔적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놀랐다.
그 자리엔, 피투성이의 거구 노인이 눈빛을 빛내며 철탑처럼 서 있었다.
4
세이어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버텨 냈구나.”
제라드도 담담히 대꾸했다.
“솔직히 운이 좋았다.”
제라드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그 무엇도 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불굴의 육체가 사방이 찢어지고 뒤틀려 피를 흘리고 상처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두 발로 대지에 서 있었다. 심지어 두 팔을 들어 다시 전투 자세를 잡기까지 했다.
세이어가 물었다.
“어찌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그 질문에는 일종의 경의마저 실려 있었다. 그래서 제라드도 순순히 대답했다.
“자연체에 이은 흘리기, 그리고 호체술護體術. 스파이럴 가드로 외부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신체 내부를 지키는 것이다.”
감히 감당 못 할 그 힘 앞에 제라드는 깔끔히 포기했다. 상처 없이 피하는 것을.
그리고 최소한의 피해로 회피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섬광의 범위는 너무 넓어 그 순간 뛰어 봐야 범위 밖으로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연체였다.
폭풍 앞에 거목은 뽑히지만 갈대는 쓰러질 뿐 꺾이지 않는 법. 자연체로 힘을 흘리며 최대한 반발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긴다. 이것으로 섬광이 지닌 압도적인 광압을 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폭풍 앞에 갈대는 꺾이지 않지만, 불길 앞에선 맥없이 불탄다. 그 자체로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저 백색 섬광을 이겨 내려면 보다 강력한 신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부상을 각오하고 스파이럴 가드를 체내로 돌렸다.
강인한 육체 없이는 스스로를 갈아 버리는 꼴이 되는 패도적인 오러 스킬, 스파이럴 가드. 이를 자신의 육체 내부에 회전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그러나 스파이럴 가드의 오러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회오리이며, 동시에 기혈을 통해 방출되는 제라드 자신의 생명기이기도 하다.
지금 제라드는 체내로 도는 오러의 회오리를 전신 기혈을 이완시켜 자연스레 흘리며, 방어력은 남긴 채 육체에 오는 손상을 최소화시킨 것이다. 쉽게 말해 신체 내부에 자연체를 걸은 셈이다.
“안티 스파이럴 가드라 하느니.”
신체 외부와 내부를 모두 자연체로 이끄는 아득한 경지. 이는 가르칠 수도,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깨달음을 통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될 뿐. 제라드도 나이 여든에 겨우 다다른 경지였다.
진지한 얼굴로, 제라드가 세이어에게 말했다.
“인정한다. 네놈, 신을 자처할 정도는 되는구나.”
“아직도 고집을 피우는 것이냐?”
세이어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그대의 머리는 부인하더라도 가슴은 인정했을 것이다. 그대 눈앞에 있는 자가 진정 무엇인지를.”
“흥!”
제라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봤자 인간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