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399
인간도 드워프도 오크도 트롤도, 모두 그 믿음직한 모습에 감동하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예, 여왕 폐하!”
병사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이니야가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보며 엘프 병사들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지만…….”
다른 종족들은 몰라도 엘프들은 잘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체력이 약한 종족인지. 그리고 현재 이니야의 모습은 정상적인 엘프의 체력이라면 결코 보일 수 없다는 것 또한.
“……폐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
☆ ☆ ☆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이니야는 천막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휘장을 내리자마자 바로 선혈을 토했다.
“우욱!”
시뻘건 핏물이 흙바닥에 흥건히 고인다. 쌓이는 피로 속에 육체가 둔해지는 걸 막기 위해 그녀는 오러를 운용, 억지로 전신에 활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피를 토한 뒤 이니야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시원하네.”
병사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그동안 계속 참았다. 피를 토하는 고통보다 오히려 후련함이 더 컸다.
피 웅덩이를 바라보며 이니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천막 하나는 잘 골랐어.’
워낙 썩은 내가 풍기는 천막이다 보니 코가 예민한 오크들도 여기서 피 냄새를 맡질 못한다. 뭐, 굳이 이런 천막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피 냄새는 진지 전체에 진동하니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때였다. 천막 안쪽 그림자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보죠?”
흠칫 놀라며 이니야가 고개를 돌렸다.
“시리스인가?”
백금발의 갈색 피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미터를 쌍으로 허리에 차고 사슬과 가죽을 섞어 만든 안타레스 특유의 경장갑 차림이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 못 챘나요?”
“실력이 많이 늘었군.”
이니야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정령술의 궁극, 엘리멘트를 갈고닦은 시리스는 예전보다 월등히 실력이 올라가 있었다. 이제 어지간한 오러 유저를 상대해도 승리할 수 있을 정도다.
“하?”
시리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제 실력이 늘었다고요? 당신의 눈을 속일 정도로?”
시리스의 매서운 눈이 예리하게 이니야의 전신을 훑었다.
“대체 얼마나 망가진 거지요?”
오러 유저의 눈조차도 속인 이니야지만, 7대 정령의 힘을 통합한 시리스의 엘리멘트는 생명 흐름의 파악에 있어선 오히려 오러 유저보다도 감지 능력이 높다. 보자마자 바로 이니야의 상태를 알아챈 것이다.
태연하게 이니야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차후 이어질 보급과 전략 계획을 훑어보며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좀 무리를 한 것은 사실이나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실란 대주교에게 치유 받으면 완치될 수준이야.”
“아직은 그렇겠지요.”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실란에게 치유받을 때까지도 위험하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죠.”
현재 실란은 필라넨스 신관단을 이끌고 후방에서 중상자의 치유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바실리에 위치한 필라넨스 총단은 안타레스 교구의 신관들이 고국에 봉사하는 걸 허락했다. 비록 눈치가 보여 대놓고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안타레스는 분명히 필라넨스께서 축복을 내리신 나라다. 교단 입장에선 결코 버릴 수 없는 신성한 국가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실란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금 그가 후위에서 빠지면 너무 많은 병력을 잃게 된다. 적들과 달리 우리는 병사 한 명을 잃으면 다시 채울 수가 없다.”
실란이 현재 처리하는 중상자의 숫자는 하루에 백이 넘는다. 그리고 현재 안타레스는 매일 수십, 수백의 중상자가 후방으로 실려 가고 있다. 그런 어마어마한 치유 능력을 후방에서 빼게 된다면, 이어지는 중상자들의 치료가 늦어지고 살릴 수 있는 이들이 죽는 경우도 생긴다.
“노련한 병사 한 명을 잃는 것이 내 육체가 피로한 것보다 더 손실이 크다. 걱정 마라. 한계에 다다르면 나 역시 실란 대주교를 부를 것이다. 군주가 제 몸이 상해 가는 걸 방치한다면 그 또한 수장의 자격이 없음이니.”
왕은 자신의 몸을 건강히 지킬 의무도 있는 것이다.
“단지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다.”
“네, 과연 여왕 폐하시네요. 모든 것을 굽어살피고 계시니.”
어깨를 들썩이며 시리스가 조소를 흘렸다.
이니야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꼭 비아냥처럼 들리는군. 짐은 그대의 왕이다.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 그대가 나를 섬기건 말건 상관치 않으나, 수뇌부가 분열하면 병사들이 동요하게 된다.”
차가운 위엄을 담아 왕의 목소리로 자신을 꾸짖는다. 시리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눈앞의 이니야는 정말 왕좌에 어울려 보였다.
‘어떻게…….’
자신은 아직도 레펜하르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니야는 이미 레펜하르트의 흔적을 멀리 밀어내고 안타레스 공국 전체에 자신의 자취를 확실히 남기고 있다. 이미 안타레스의 모든 이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섬기고, 그녀가 여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조금의 슬픔도 동요도 없이 무심하게 왕의 임무를 행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여왕이었다는 듯이.
레펜하르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죠?”
이니야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이 왕의 의무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두 여인이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한다. 시리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니야 여왕 폐하.”
“말하라.”
시리스의 목소리가 변했다.
“당신은 슬프지도 않은 건가요?”
날카롭고 적대적이던 음성이, 흔들리는 슬픔을 담아 천막 안에 울린다.
“그분이 남긴 백성, 그분이 남긴 나라. 그것을 지키려는 그 마음은 저도 알아요.”
안타까워하며 묻는다.
“하지만…… 적어도 남들이 보지 않을 땐 그분을 위해 눈물 흘려도 되지 않나요?”
이니야는 비웃었다.
“그분이 남긴 나라라고?”
차가운 비웃음으로 시리스를 압도한다.
“안타레스의 국민들은 한 명, 한 명이 삶을 가지고 미래를 지닌,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 수많은 인생을 한낱 죽은 자의 유산 따위로 치부한다니 내 평생 이 정도로 오만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보겠군.”
시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이니야의 말이 이어졌다.
“왕이 슬퍼한다면 그것은 국민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졌을 때뿐. 왕이 눈물 흘린다면 그건 국민의 피가 흐를 때뿐이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나친 사치다.”
한번 흘린 눈물은 각오를 녹인다.
녹아 버린 각오는 다시 굳지 않는다.
“제국을 물리치기 전까지, 짐이 그를 위해 눈물 흘릴 일은 없을 것이다.”
추상같은 이니야의 말에 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다, 당신이란 사람은…….”
가슴 속 한편에서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레펜하르트 님을 사랑하긴 한 건가요?”
“흥.”
이니야는 콧방귀를 켰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무심히 손을 들어 나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만 나가 보도록. 할 일이 많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엔 시간이 아깝다.”
“예, 여왕 폐하. 공사가 다망하신데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했군요.”
과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시리스는 날카로운 동작으로 천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모습, 그걸 보며 이니야는 빙그레 웃었다.
그야말로 어린 소녀다운 생각, 소녀다운 태도다. 어찌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과연 아직 어리네.’
사실은 자신도 저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차가운 왕의 가면, 왕의 모습을 버리고 싶었다.
처음 레펜하르트를 만나고 스티리아 일족의 운명을 그에게 의탁한 뒤, 수장의 의무에서 벗어나 일개 여인으로 행동했던 그 때처럼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분의 죽음 앞에 마음껏 슬퍼할 수도 있었겠지.’
누군가 한 명만이라도, 자신을 대신할 이가 한 명만이라도 더 있었다면…….
“하아…….”
문득 한숨이 흘러나왔다. 참으려 해도 저절로 한 남자의 모습, 한 남자의 웃음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럼 이니야, 죄송한 말인데…….
딱 10분만 기절해 있겠습니다.
어머나!
어휴, 이 사람 좀 봐…….
의외로 머리가 크네.
커도 멋있기만 하다, 뭐.
자신의 무릎에 누워 조용히 잠들던 그 이…….
“……쓸데없는 기억이다.”
애써 머리를 흔들며 이니야는 상념을 지웠다. 그리고 내일의 전투를 위해 다시 서류를 들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굳히며, 그녀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레펜하르트 님은 이미 세상에 없다…….”
한편, 시리스는 막사 밖으로 나와 자신의 천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인상을 썼다.
이니야가 옳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 현재의 안타레스를 위해서 이니야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니야처럼 생각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는 것도 속으론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현실을 받아들이려 해도 마음 한구석, 본능적인 무엇인가가 그 사실이 틀렸다고 부르짖고 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본능의 외침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니야…….”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죽지 않았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