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10
시리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그쯤은 알아.”
수상한 그녀의 태도에 크리스틴이 긴장했다. 시미터를 들어 전장을 가리키며 시리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건 밑 작업일 뿐이야.”
“밑 작업?”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밑 작업? 무슨 밑 작업?
그때였다. 티티마가 나무 위에서 날카로운 고함을 터트린 것은.
“동포들이여! 때가 왔습니다!”
그것을 신호로 수백의 트롤들이 일제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하던 성기사들이 흠칫하며 대비하려는 찰나였다.
“으아아아!”
각오에 찬 외침을 터트리며 수백 명의 트롤들이 일제히 단검으로 자기 배를 쑤셨다.
“뭐, 뭐야?”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실로 비상식적 장면이었다.
수백 명의 트롤이 일제히 할복을 하다니? 그것도 적 앞에서!
하지만 성기사들에겐 그 상황을 반추할 여유가 없었다. 자해한 트롤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르르르…….”
“크르르…….”
섬뜩한 괴음을 흘리며 수백의 트롤들이 점점 변화하기 시작한다. 근육이 부풀고 뼈마디가 길어지며 거대한 무엇인가로 화한다. 커지는 육체에 맞춰 걸치고 있던 갑옷들이 떨어져 나가 대지 위로 뒹군다.
이내 요새 전역에서 광포한 포효가 터졌다.
“크아아아!”
“크오오오!”
“아아아!”
포효가 끝없이 메아리친다. 거대한 그림자가 요새 전체를 뒤덮는다.
이미 성기사들 앞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평범한 트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예로부터 전해져 오던 공포스러운 전설의 현신이었다.
할라인 출신의 성기사 하나가 기겁해 외쳤다.
“트롤의 광폭화!”
변한 상황을 보며 크리스틴은 경악했다.
“이, 이 무슨?”
시리스가 생글생글 웃었다.
“크리스틴, 그대들은 나를 광전사라 불렀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수백의 붉은 눈동자, 그것을 등진 채 피 냄새 나는 미소를 짓는다.
“그런 광전사가 광전사 부대를 이끄는 게 뭐 그리 이상하겠어?”
☆ ☆ ☆
짐승의 괴성을 터트리며 수백의 트롤들이 성기사들을 덮쳤다.
광폭화한 트롤은 오우거와 맞먹는 가공할 몬스터, 아무리 세이어의 성기사들이라도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적어도 신성검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거나 혹은 준비를 완벽히 갖추고 대열을 짜 상대해야 겨우 승부를 장담할 수 있다.
하물며 절반 이상 갑옷도 못 갖추고 대열도 흩어진 지금 상황에선 오죽하랴?
“크윽!”
“이,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이야!”
단숨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애초에 지리적 이점이며 숫자는 트롤들이 위였다. 전략적으로는 성기사단이 패한 상황, 그저 개인의 전투력이 워낙 우위에 있어 오히려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개개의 전투력 우위가 한숨에 뒤바뀌어 버렸다.
“크윽!”
“커어억!”
요새 곳곳에서 성기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무리 허약한 노인 트롤이라도 광폭화하고 나면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아 뜯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 괴물이 무려 수백이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정신없이 밀리던 성기사들, 그중 할라인 왕국 출신으로 비교적 트롤에 대해 지식이 있는 몇 명이 소리를 질렀다.
“광폭화한 트롤은 이성이 없소!”
“저들에겐 지금 적아의 구분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저들끼리 전투하도록 유도하시오!”
활로를 찾은 성기사들이 광폭화한 트롤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저들의 시선을 유도해 저희들끼리 때리게 만든다.
퍽!
과연, 실수로 트롤 하나가 주먹을 잘못 휘둘러 다른 트롤을 후려갈겼다. 성기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그런데, 얻어맞은 트롤이 반격하기는커녕 여전히 성기사만을 노린다?
“말도 안 돼!”
“광폭화한 트롤은 분명 적아를 구별하지 못할 터인데?”
순식간에 밀리는 전황을 보며 크리스틴이 치를 떨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떻게 광전사에게 이성이 있는 거지?”
시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트롤 주술에는 저런 것도 있더라고.”
☆ ☆ ☆
높은 나무 위에 서서 티티마는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낭랑한 노랫가락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날아올라 그 날개를 불사르네, 뜨거운 태양이 그 눈을 멀게 하니 하늘의 밝음은 곧 밤의 어둠이로다. 흑암을 떠도는 가슴속에 한 줌 씨앗 있어 대지를 떠받들 거목의 시작을 노래하리라…….”
오랜 전통을 지닌 트롤 주술 중에는 결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금단의 흑주술이 존재한다. 현재 티티마가 구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 일족의 존폐가 걸린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만 몇 번 구사되었던 광폭화 제어 주술이었다.
“라라라라라라…….”
높은 허밍이 실린 주술음이 날뛰는 광전사 트롤의 귓가를 간질였다.
보이는 모든 것에 증오를 불태우는 광전사의 시야에 세상 만물이 그 존재를 감춘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하나, 화려한 금속 갑옷을 입은 인간의 모습 뿐.
“크라라라!”
“카오오!”
크리스틴의 착각과 달리 이 주술은 광폭화된 트롤에게 이성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트롤 구루들이 광폭화를 되돌리는 법을 고민해 왔지만, 아예 기절시키는 방법 말고 아직 그런 주술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틸카만이 명정광폭화 주술로 스스로의 이성을 유지하는 정도다.
광전사 제어 주술은 실제로 저들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광전사의 흉성을 더욱 자극해 시야를 좁히는 효능이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에 공격성을 보인다면, 공격해야 할 대상만을 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아아아아!”
티티마의 노래가 점점 더 커져 갔다. 대구루 아틸카의 후계인 그녀는 비록 나이는 어려도 뛰어난 주술적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천재성이 빛을 발해 무려 수백 명이나 되는 광전사의 흉성을 한 곳으로 유도한다.
“으아악!”
“세이어시여!”
“어머니!”
수백의 광폭화한 트롤, 이 절대적인 폭력 앞에 세이어의 성기사들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요새 곳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솟구치고 붉은 핏물이 강이 되어 넘쳐흐른다.
피투성이가 된 부관 말튼 경이 주위를 둘러보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결국 야만스러운 본성을 드러냈구나! 이 미친 트롤 놈들!”
이젠 인간도 트롤의 광폭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분명 수백의 광전사 트롤은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성기사가 오백이 아니라 오천이라도 충분히 쓸어버릴 가공할 힘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트롤병 전원이 고통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이다!
“이 천한 것들도 네놈들에겐 소중한 동족이 아니었나? 이들의 목숨을 모조리 버려 버렸단 말이지?”
아무리 승리를 위해서라지만, 그 결과가 분명한 죽음임을 알면서도 수백이나 되는 목숨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어지간한 냉혈한이라도 차마 하지 못할 참혹한 방식이다.
시리스를 향해 크리스틴이 경멸을 드러냈다.
“수하의 목숨을 이토록 하찮게 여기다니, 정말 천하디천한 노예 것들답구나.”
몸을 날리며 시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나도 처음엔 반대했지.”
칼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크리스틴이 뒤로 밀린다. 공세를 퍼부으며 시리스가 깔깔 웃었다.
“하지만 결과가 훌륭하잖아? 안 그래?”
“크윽!”
크리스틴은 신음했다.
세이어의 성기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다. 도망조차 칠 수 없었다. 이종족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지나치게 구석에 요새를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삼면이 절벽이다 보니 퇴로가 전혀 없다.
완벽한 패배였다.
“더 이상 널 도와줄 성기사 따윈 없어! 이번에야말로 그 모가지를 떼어 줄게, 크리스틴!”
소리 높여 웃으며 시리스가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칼날이 허공을 수놓았다. 받아치는 크리스틴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으윽!”
아직 신성력이며 체력에 여유가 있으니 이대로 버티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크르르…….”
“크르…….”
어느새 근처 성기사들을 모조리 학살한 광전사 트롤들이 흉성 어린 눈동자를 빛내며 크리스틴 쪽으로 몰려온다. 완전히 시리스와 크리스틴의 처지가 거꾸로 된 셈이다. 저들마저 합세하면 승산은 전무하다.
‘제길,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검을 휘두르며 크리스틴은 몸을 뺄 기회를 노렸다. 죽어 가는 동료 성기사의 모습 따윈 이미 뇌리에서 사라졌다. 지휘관이면서 수하들을 챙기긴커녕 제 몸 빼낼 궁리만 하다니, 그야말로 이기심이 천하일품이라 하겠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크리스틴은 계속 기회를 노렸다. 물론 시리스의 실력이 그녀보다 위에 있으니 쉽게 기회가 오질 않는다.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허공을 밟고 오르던 시리스의 움직임이 주춤거렸다.
“어라?”
막 날아오르던 그녀의 등 뒤로 눈먼 투창 하나가 날아든 것이다. 아마도 광전사 트롤과 싸우던 성기사 하나가 잘못 날린 것인 듯했다.
“이런!”
당황하며 시리스가 재차 허공을 밟아 몸을 틀었다.
크리스틴의 눈이 빛났다. 기회였다.
“하압!”
전력을 다해 그녀가 메사이어를 떨쳤다. 신성검의 빛의 칼날이 허공의 시리스를 정확히 노리고 쇄도했다. 허겁지겁 시리스가 엘리멘트 소드로 신성검을 막았다.
타앙!
그 틈에 크리스틴이 미리 봐두었던 퇴로로 몸을 날렸다.
‘됐어!’
안도와 분노 속에서 크리스틴은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뒤를 돌아보며 시리스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고 보자, 엘프 계집! 이 수치는 꼭 갚아 주마!”
그런데, 어째 시리스가 그녀를 뒤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도망치는 뒷모습을 멀뚱히 볼 뿐이다.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잘도 속네, 병신 같은 년.”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