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11
불길한 예감이 크리스틴이 이맛살을 찌푸릴 때였다. 저 멀리 시리스가 가볍게 발을 굴렸다.
“블링크.”
시리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
동시에 도망치던 크리스틴의 코앞에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엘리멘트의 힘을 실은 시미터가 호선을 그리며 쇄도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순간 크리스틴의 사고가 멈춰 버렸다.
“어……?”
일격에 크리스틴의 오른팔이 뎅겅 잘려 허공으로 날렸다. 그 오른팔이 굳게 쥐고 있던 성광검 메사이어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악!”
5
시리스는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핏물을 뿌리며 떨어지는 크리스틴의 잘린 오른팔, 그것이 보이지 않는 힘에 유도되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잘린 팔에서 시리스가 메사이어를 빼냈다. 검을 쥔 뒤 쓰레기를 취급하듯 잘린 팔을 아무렇게나 버린다.
“아, 역시 좋은 검이네.”
시리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검을 쥔 순간 기이한 기분이 전신을 감돈다. 분명 처음 쥐어 본 검인데도 마치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놀라운 일체감이 느껴진다. 일루미네이터를 얻은 러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반면, 크리스틴은 고통과 분노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크윽! 크으윽!”
소중한 오른팔이 제멋대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끔찍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뇌리를 두들긴다.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혼절하고 싶었지만 크리스틴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고통만큼이나 극심한 증오가 그녀의 정신을 지탱한다.
“이, 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엘프 마녀가! 감히 내 팔을!”
메사이어를 겨눈 채 시리스가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나? 지금 팔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잘린 팔만 신경 쓰이고 잘릴 목은 관심 밖인가 보지?”
다 잡은 사냥감을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시리스가 매섭게 눈매를 세운다. 흠칫거린 크리스틴이 악을 썼다.
“주, 죽여라!”
시리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죽일 거야. 그 전에 시험 좀 해 보고.”
‘시험?’
의아해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시리스가 섬뜩한 목소리를 이었다.
“새 검을 손에 넣었으니 성능을 봐야지. 자, 이 검이 옛 주인의 살점을 얼마나 잘 저며 주려나?”
깔깔대며 시리스가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크리스틴의 귀가 뎅겅 잘리며 떨어져 나갔다.
“……아?”
어찌나 예리한지, 잘린 귓바퀴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통증이 밀려온다.
“아윽!”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리스가 감탄했다.
“이야, 그만큼 싸웠는데도 날이 전혀 죽지 않았네?”
시리스의 시미터도 명품 중의 명품이지만 한참의 사투로 인해 여기저기 이가 나간 처지다. 그런데 메사이어는 그토록 칼날을 혹사했음에도 막 날을 간 것처럼 여전히 예리하다. 역시 은의 시대 기물다운 위력이었다.
희희낙락하며 시리스가 다시 메사이어를 겨눴다.
“다음은 코를 베어 볼까?”
크리스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리스가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자기들도 하던 짓이면서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고 그래?”
실제로 제국군 일부는 전공을 인정받기 위해 안타레스 병사들의 시체에서 코와 귀를 베어 가는 경우도 있었다. 확실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코와 귀를 베진 않았다. 하물며 여인에게 외모는 때론 목숨보다도 귀한 법이다.
그런 여자의 코를 베겠다니? 그것도 같은 여자면서!
“……미쳐도 아주 더럽게 미쳤구나!”
크리스틴은 치를 떨었다. 짐승만도 못한 악랄한 범죄자들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미녀로 만들어 줄게, 크리스틴. 깔깔깔!”
요사스러운 미소와 함께 시리스가 재차 검을 든다. 크리스틴의 두 눈에 지독한 공포의 빛이 떠오를 때였다.
“그만 진정해, 시리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시리스의 전신이 분홍빛 성광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아아…….”
어느새 실란이 숲 속에서 나타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필라넨스시여,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을 인도하소서. 이들에게 명철한 정신을 허락하시어 이지를 맑게 하소서…….”
기도가 이어지며 시리스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혈기 맺혔던 눈동자가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광기 어린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미칠 듯이 날뛰던 살기도 파도가 멎은 바다처럼 잔잔해졌다.
광기의 발렌시아가 사라졌다.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신월의 검사라 불리던, 차분하고 조용하던 평소 시리스의 모습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시리스를 향해 실란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시리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실란.”
“평소보다 더 심하던데? 어찌 된 거야?”
“글쎄요? 세계수에 변화가 생겼나?”
시리스가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한때 레펜하르트의 천지창조 덕에 힘이 소진되었던 세계수도 시간이 지나며 다시 권능을 되찾았다. 그로 인해 시리스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도로 엘리멘트의 힘, 그리고 그에 따른 광기를 점점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레펜하르트가 죽은 이후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요새 들어 갑자기 힘이 증폭되는 듯한 느낌이…….”
의아해하며 실란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세계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해답을 알 수는 없었다.
일단 의문을 젖혀 두고 실란은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틴…….”
☆ ☆ ☆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짜증 나던 상대가 눈앞에 있다. 꿈에서도 보기 싫던 상대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한 팔이 잘려 피투성이가 되고 귀까지 잃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심하게 당했네…….”
정작 당사자는 실란을 보며 감격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실란! 저를 구하러 왔군요.”
“……그럴 리가 없잖아.”
한심하단 얼굴로 실란은 한숨을 쉬었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크리스틴은 크리스틴이었다. 정말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아, 죄송해요. 제 힘이 미약해 당신을 구하지 못했어요.”
비탄의 여주인공처럼 크리스틴이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작은 짐승의 죽음에도 슬퍼하던 이였지요. 천한 노예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던 이였지요. 그런 당신이 저 사악한 마녀의 꾐에 빠져 이런 참혹한 일을 두고 봐야 했다니…….”
흐느끼며 연극의 히로인처럼 말을 잇는다.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의 영혼이 슬퍼하는 목소리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실란과 시리스는 황당해했다. 원래도 크리스틴의 말은 뜬금없었지만 오늘은 그 뜬금없음이 유난히 각별하다.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저 많은 생명을 쓰레기처럼 버리게 하다니. 이게 당신의 뜻일 리가 없지요.”
그제야 실란은 크리스틴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크리스틴은 이들의 자살 작전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트롤의 목숨 따위 가축 취급하면서 이쪽에서 저지른 것은 잔인하다고 욕하다니, 참 어이없는 태도지만 원래 크리스틴은 그런 여자다.
시리스를 노려보며 크리스틴이 눈을 부라렸다.
“이 사악한 엘프 계집 같으니! 나의 실란에게 이런 일을 가담하게 하다니!”
실란이 태연하게 크리스틴의 말을 반박했다.
“사실 저 짓을 반대한 건 시리스 쪽인데?”
크리스틴이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실란이 자신을 가리켰다.
“밀어붙인 건 내 쪽이고.”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크리스틴은 실란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실란은 결코 저런 잔인무도한 짓을 용납할 성품이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이 오히려 주도했다고?
“맙소사! 얼마나 타락의 늪에 깊게 빠진 건가요? 나의 실란!”
“딱히 타락이랄 건 없는데?”
가슴의 성표를 매만지며 실란이 대꾸했다.
“저들은 죽지 않을 거거든.”
때마침 티티마가 나타났다. 실란에게 뛰어오며 그녀가 외쳤다.
“실란! 전투가 끝났어!”
과연, 요새는 이미 조용했다. 수많은 성기사의 시체 사이에서 광폭화된 트롤들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아직은 다들 살아 있지만 무서운 속도로 생명력을 소진하는 것이 뻔히 보인다. 티티마를 보며 크리스틴이 차가운 비아냥을 던졌다.
“네년이 저들을 이끌었느냐? 동족의 생명을 티끌처럼 취급해 결국 이기고 말았구나. 참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로다.”
다급한 목소리로 티티마가 실란을 재촉했다.
“빨리 해, 실란! 아직은 주술이 통하고 있지만 곧 풀려! 그럼 이제 저들끼리 싸우다 다 죽게 될 거야!”
크리스틴이 눈을 껌뻑였다.
‘무슨 소리지? 어차피 저들은 다 죽는 운명이 아니었나?’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어.”
바로 실란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성광이 요새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체처럼 서있는 광전사 트롤들을 향해 필라넨스의 빛이 흩뿌려진다.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을 인도하소서. 이들에게 명철한 정신을 허락하시어 이지를 맑게 하소서!”
이미 한번 들어 본 기도문이었다. 바로 실란이 시리스를 진정시킬 때 쓴 그 신성 주문.
트롤들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 ☆ ☆
거대화된 트롤들이 삽시간에 쪼그라든다. 두꺼운 근육이 사라지고 뻗어 나간 거구가 줄어들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수백의 괴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수백의 노약자와 아녀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대체…….”
크리스틴이 눈을 껌뻑였다. 광폭화된 트롤이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뭐, 애초에 인간에게 트롤의 생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어지간한 건 다 듣도 보도 못한 기사겠지만.
“으으…….”
“되,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