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17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저들의 마성이 극에 달해 불필요한 인류의 피가 흘렀나이다.”
“알고 있다.”
세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이 아이의 기억으로 그자의 대부분을 안다 여겼다. 그리하여 그자만 없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테스론의 기억에 따르면, 전생의 안타레스 제국은 순전히 레펜하르트 하나의 힘으로 돌아가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전 대륙이 그를 압박해 손발을 묶으니 결국 무한한 힘을 지닌 마왕조차도 패하고 말았다. 마왕이 패하니 그만을 믿고 있던 이종족들도 지리멸렬해 버렸다.
“하나, 세상은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렸구나.”
레펜하르트는 죽었다. 하지만 전생과 달리 그가 없어도 이종족들은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계속 싸웠다. 스스로 궁리하며 스스로 노력해 결국 인류의 힘을 타파할 방법마저 손에 넣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 힘을 준 이 또한 인류라는 점이다. 필라넨스의 신관, 인간의 신성 주문이 없다면 트롤은 결코 저 힘을 다루지 못한다.
“예전엔 인간과 이종족의 패권 다툼이었으되 지금은 그저 사람과 사람의 전쟁이 되었다. 인간이 저들과 한마음으로 손을 잡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세렐라인이 눈치를 보았다. 세이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전 그자는 지키는 자였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적을 죽이고 가족을 수호하는 자였지. 그래서 수호자를 잃은 이들은 결국 죽음당했다.”
세이어가 혼잣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생의 그는 땅을 일구는 자가 되었구나. 씨를 뿌리고 싹을 돌보며 밭을 만들었으니, 씨 뿌린 자가 사라졌어도 새싹이 자라나 거목이 되어 열매를 맺을 수밖에.”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눈을 깜빡거리다 세렐라인이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용서하소서, 제가 어리석어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세이어가 웃었다.
“아이야, 네가 어리석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귀엽다는 듯 세렐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을 잇는다.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다. 제아무리 현자라도 상황도 모른 채 앞뒤도 없는 혼잣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실제로 세이어는 세렐라인이 듣길 바라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며 고독에 익숙한 자가 흔히 가질 수 있는 습관인 혼잣말을 한 것뿐이다.
눈치를 보던 세렐라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또 있어요, 아버지시여.”
“무엇이냐?”
주저하다 세렐라인이 대답했다.
“……위대한 신의 모체母體를 잃었나이다.”
“신의 모체? 아, 성배 계획 말이냐?”
잠깐 의아해하다 세이어가 바로 이해하고 되물었다. 세렐라인이 대답했다.
“예, 2차 성배 계획의 일원이었던 크리스틴 경이…….”
원래 은의 현자들은 항시 크리스틴과 실란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비밀결사의 특징상 대놓고 움직일 순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항시 기회를 노려 왔다. 레펜하르트의 존재 때문에 통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세이어가 부활하며 성배의 중요성이 상당히 떨어져 버렸다. 부활한 신을 담을 육체에서, 만일을 대비한 스페어 역할로.
방심한 은의 현자는 잠시 크리스틴에 대한 감시를 허술히 했다. 그리고 그 틈에 그녀는 전장 깊숙이 개입해 죽음을 당해 버렸다.
아무리 중요도가 떨어졌다 해도 세이어의 신체神體를 잃은 사건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용서를…… 아버지시여…….”
세이어는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것 없다. 그 계획은 어차피 실패할 테니.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노라.”
세이어는 이미 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테스론의 기억을 통해서.
미래의 성배 계획, 그 결과물은 완전치 못했다. 고작해야 미약한 신성에 닿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인류에겐 엄청난 힘으로 여겨져 성녀라 불리며 칭송받았지만, 세이어의 자아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테스론의 기억이 담은 성녀 엘린의 20년 인생 동안 그녀 안에 존재하던 신의 의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 1차 성배 계획으로 인해 신을 담을 그릇으로 탄생한 세렐라인이 결국 세이어를 깨우지 못하고 그저 담고 있을 뿐이었던 것처럼.
‘세렐라인과 달리 어느 정도 신성에 닿았던 걸 보면 몇십 년 뒤엔 결국 깨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실패는 실패지.’
상념에 접어든 세이어를 향해 세렐라인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패였……던가요?”
세이어가 어찌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확신하는지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원래 신앙자는 신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은의 현자가 행한 노력,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부정당한 듯하여 씁쓸할 뿐.
그녀를 달래며 세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세렐라인, 네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네가 나를 담았고, 또 날 담을 육신을 찾지 않았느냐? 이제 더 이상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난 이미 완벽한 육신을 손에 넣었으니.”
세렐라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마치 주인의 표정에 따라 울고 웃는 강아지 같다.
“생각해 보니 웃기는군.”
문득 세이어가 실소했다.
“열화되는 육체의 대체품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노력을 했는데…….”
금단의 지식을 통해 R.X 시리즈를 부활시키고 성배 계획도 창안했다.
‘그러다 놓친 모르모트 하나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바람에 결국 육체를 잃기도 했지.’
덕분에 성배 계획의 프로토 타입인 세렐라인이 태어날 때까지 허신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수모도 겪었다.
“그런데 정작 손에 넣은 완벽한 육신은 전혀 상관없는, 자연이 낳은 인간의 것이라니.”
세이어의 혼잣말에 세렐라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이어의 갑작스러운 소멸은 은의 현자 내에서도 전혀 이유가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말을 이해할 리 없었다.
세이어가 화제를 돌렸다.
“세렐라인, 나의 아이야. 아직 할 말이 있지 않느냐? 그저 용서를 바라고 나를 찾은 것만은 아닐 터인데?”
세렐라인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예, 아버지시여. 실은 하나 청할 것이 있습니다.”
말을 듣기도 전에 세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노라.”
그는 이미 세렐라인이 무엇을 청할지 알고 있었다.
“그자가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속여 나도 신의 위업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부턴 사람의 일, 사람끼리 해결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내심 실망하며 세렐라인은 허리를 숙였다. 역시 세이어가 직접 신의 위엄을 보여 저들을 벌하길 기대할 순 없는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사랑한다 하여 그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돌봐 주면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때론 아이가 힘들더라도 멀리서 지켜보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의 진정한 힘을 보이게 허락하소서.”
“그것을 원하느냐?”
자세한 설명도 없는데 세이어는 세렐라인이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초월자의 음성으로 그는 허락을 내렸다.
“원한다면 행하여라.”
세렐라인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감읍하며 그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물러가겠습니다, 아버지여.”
“그러려무나.”
그녀의 모습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이 강철의 공간 안에 세이어 홀로 남게 되었다.
세이어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별문제 없겠지. 다행히 그자는 더 이상 존재치 않으니…….”
☆ ☆ ☆
글로텐 산맥 중앙의 한 고원 지대.
수목한계선을 넘어 작은 수풀만이 나 있는 푸른 산기슭을 토대로 수천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오랜 전쟁은 그 튼튼한 오크의 가죽 막사마저도 버티지 못했다. 대다수의 막사들이 때가 타고 찢겨져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 유독 크고, 또 초라한 막사가 있었으니 바로 그곳이 안타레스의 여왕 이니야의 막사였다.
아리따운 엘프 여인이 조심스레 막사를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폐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에선 이니야가 대충 만든 나무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일국의 왕이 앉고 있는 의자라기엔 너무도 초라한 물건이었다.
이 더러운 막사가 바로 그녀의 왕궁.
이 허름한 의자가 바로 그녀의 옥좌.
하나 그곳에 앉아 있는 그녀는 너무도 오만한 여왕의 모습이었다.
다리를 꼰 채 눈을 감은 이니야의 전신으로 서늘한 한기가 연신 흘러나온다. 엘프 여인, 플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폐하?”
“그곳에 두어라.”
이니야의 손짓에 따라 플로라는 빵과 채소가 담긴 쟁반을 살짝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지금 계속 흘러나오는 한기는 예전엔 없던 현상이었다. 오러 유저라면 무릇 자신의 기운을 허투루 흘리지 않으며, 기교의 극에 달한 이니야라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오러 운용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당연하겠지. 오크라도 버티지 못할 강행군을 계속하셨는데…….’
플로라가 주저하다 물었다.
“폐하, 잠시라도 좋으니 제대로 침상에 누우심이 어떠실지…….”
명상으로 계속 들끓는 오러를 제어하느니 차라리 푹 쉬는 것이 더 낫다. 오러 유저가 아닌 플로라라도 그 정도는 안다.
이니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가 들고 온 것은 식사뿐이 아닐 터.”
플로라는 쟁반과 함께 산맥 각지의 현 전황 보고서도 챙겨 왔다. 비서관의 업무다.
“내가 잠들면 그건 누가 검토하고 책임을 지지? 그대가 할 텐가, 플로라?”
무심한 어조지만 왠지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플로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내 건강을 근심하는 것은 시녀장 틸라의 일이다. 플로라 비서관.”
바로 말을 끊고 이니야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숨을 쉬며 플로라도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현 전황에 대해 적힌 서류들을 빠른 목소리로 요약해 보고한다.
“……그리고 탈영병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있습니다, 폐하.”
태연하게 이니야가 명했다.
“목을 베라.”
플로라도 태연하게 답했다.
“예, 폐하.”
이니야가 왕위에 오른 이래 안타레스군의 분위기는 변했다. 레펜하르트 시절에도 물론 군기는 엄했지만, 그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형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이에게만 행해지는 벌이었다.
반면 이니야는 군기를 흔드는 이들에게 중형을 내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종족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사람,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제 욕심만 챙기는 비리는 일어나는 법이다. 실제로 얼마 전 트롤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군수물자가 빼돌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광폭화를 통해 전황을 바꾼 트롤 중 일부가, 자신들의 공이라면 이 정도는 합당하다며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리고 그 트롤들은 전원 목이 베였다. 일부에선 그래도 저들의 공이 있는데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고 만류했지만 이니야는 흔들리지 않았다.
-굳건한 제방도 작은 틈새 하나로 무너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안타레스엔 구멍 난 제방을 보수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패배는 죄가 아니지만 도주는 죄였다.
무능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게으른 것은 용서치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사욕을 채우는 것은 무조건 사형으로 다스렸다.
스스로의 솔선수범, 그리고 지도층일수록 더욱 엄격히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안타레스 국민들에게 실로 신뢰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엄격함이 아니었다면 안타레스가 여태껏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두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법.
엄격하고 공정한 왕은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결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스스로조차도 용서치 않는 이니야의 철혈 같은 모습은 경외의 대상이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철두철미한 그녀의 삶의 방식은 존경스러운 것이겠지만, 동시에 전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인가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막사로 들어오는 안타레스의 인간 병사 역시 이니야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