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20
“엘프는 오래 산다. 다시 힘을 키울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처음부터 다시 검을 익히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되겠군.”
농담 같은 저 말속에 실란은 깨달았다.
이니야는 결코 검을 거둘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다.
자신이 예전 같은 말투를 쓰고 있음에도 이니야는 한 번도 왕의 어투를 바꾼 적이 없다는 것을.
‘그래, 그녀는 이제 여왕이지.’
왠지 모를 슬픔 속에서 실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여인은 더 이상 없으며, 저 자리에 있는 것은 안타레스의 여왕일 뿐이란 걸.
“그럼 부디 무사하시길, 여왕 폐하.”
이니야는 대꾸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새하얀 한기를 흘리고 또 흘릴 뿐이었다.
제66장 총력전
1
세렐라인이 고했다.
“아버지여, 준비가 끝났나이다.”
세이어가 답했다.
“준비되었다면 행하라.”
그녀가 두려워하며 되물었다.
“정녕 이것은 괜찮은 일입니까? 정녕 분노치 않으시나요?”
“이미 허락한 일이다. 개의치 않노라.”
세이어가 은발의 소녀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유쾌하진 않으나 불쾌하지도 않다.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고 그 결과를 알며 돌이킬 방법을 안다. 그러니 분노치 않는다.”
“그럼, 움직이라 명하겠습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세렐라인을 향해 세이어는 손가락을 튀겼다. 그녀가 다시 속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세이어는 미간을 짚었다.
두통은 사라졌다.
더 이상 그를 이곳에 가둬 둔 그 기이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이어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기이한 기분이 떠나질 않는다. 뇌리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 기묘한 불안감이.
그는 신음했다.
“으음, 대체 이 느낌은 무엇이지?”
☆ ☆ ☆
“아! 돌겠다!”
레펜하르트는 고함을 터트렸다. 황금빛 오러가 폭풍처럼 일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니, 힘 빼지 말아야지. 먹은 것도 없는데.”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기름 위에 비친 무지개를 연상케 했다. 끝없이 일그러지고 이지러진 무엇인가의 형상.
바로 그가 돌아가야 할 원세계의 모습이다.
“아, 잘되고 있었는데…….”
투덜대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연산을 시작했다. 지금 떠도는 이 세계의 외곽. 차원 계면으로부터 시공의 특이점을 찾아야 했다.
테스론과의 공명을 통해 현 세계의 시공 좌표를 찾는 것은 훌륭히 성공했다. 명확한 좌표를 바탕으로 시공의 문을 열고 원세계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테스론의 육체를 담은 세이어의 현 신체.
그것은 알 수 없는 강력한 결계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어떠한 시공간의 간섭도 배제하는, 레펜하르트조차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초월적인 결계였다.
현관 앞까지 왔는데 대문이 잠겨 있는 셈이다.
결국 레펜하르트는 원세계를 코앞에 두고 세계의 ‘바깥’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길 벌써 사흘째, 세계의 바깥은 허차원처럼 존재 붕괴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하위 생존 주문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신세였다.
뭐, 그 정도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신은 일주일 정도의 단식으론 끄덕도 하지 않으며, 수분 추출 주문을 응용하면 빠져나간 수분의 대부분도 다시 육체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수분이 빠져나간다는 것은 다른 것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크고 굵은 갈색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올리길 천하게 여기지만 세상 그 누구도 만들지 않는 이가 없는 그것!
천하의 권왕이자 전설의 마왕이라도 인간인 이상, 생리 현상은 어쩔 수 없다.
‘윽, 또 마렵다.’
레펜하르트는 슬쩍 바지를 까고 생존 주문 장벽 일부를 열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슥 배설물 투척…….
“……그래도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는군.”
사흘 전, 결국 참다 참다 못 참은 그때는 진짜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는데 두 번째쯤 되니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설마 더 나올 게 있을라고? 이젠 뱃속에 든 것도 없구먼.’
저 멀리 차원 계류에 실려 동동 떠내려가는 ‘그것’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인류 역사상 세계의 바깥에 똥 싼 인간은 내가 최초이지 않을까?’
위업은 위업인데, 정말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위업이다.
“흑흑…… 아, 비참하다.”
궁상을 떨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다시 술식 연산을 시작했다.
세이어의 육체 좌표가 거부된 이상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좌표를 역산해 세계의 다른 공간 좌표를 찾고 있는 중인데, 이것이 영 쉽지 않은 것이다.
수식 자체는 안다. 문제는 연산력이 못 따라 준다.
“그래서 론의 위치가 할론으로 변하면, 여기서 위치가 역순하니까 제타를 제곱해 경으로 바꾸고…… 윽! 그새 또 바뀌었냐?”
혼탁한 마력의 폭풍이 끝없이 세계의 바깥을 타고 흐르니 방금 계산한 술식도 몇 분 지나지 않아 현 상황에 맞지 않게 된다. 그러니 몇 번이나 좌표를 잡아도 금방 무용지물이 된다.
이따위 술식 따위 몇 초 안에 연산할 수 있었던 전생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치겠네…….”
아쉬웠다. 뭔가 지표가 될 것이 하나만 더 있어도 해결책이 되겠는데, 그게 없다.
답답해 레펜하르트가 성질을 냈다.
“진짜 나 찾는 사람 하나도 없나? 수색 주문 같은 거 거는 인간도 없어? 그런 거라도 하나 있으면 어떻게든 될 텐데…….”
말은 저리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저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살아남은 게 용했다. 아마도 안타레스의 다른 이들은 전원 그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처음부터 술식을 전개한다.
“할 수 없지, 죽이 되건 빵이 되건 알아서 해 봐야지, 끙!”
세계의 바깥.
아직 레펜하르트는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고 있었다.
☆ ☆ ☆
일단 결정이 떨어지자 카를은 빠르게 움직였다.
제국의 전진기지를 함락시키면서 산맥 내의 안타레스군도 숨통이 트였다. 제국의 반격에 대비할 최소한의 병력만 놔두고 대부분을 산맥 어귀로 집결시키니 그 숫자가 일만이 넘었다.
일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니야는 카탈란 가드로 진군했다. 진군 도중에 조우한 제국군 대부분은 안타레스군을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후퇴했다.
현재 이니야의 군세에는 산맥 곳곳에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던 안타레스의 강자들도 대부분 합류해 있었다. 그야말로 안타레스가 지닌 모든 힘이나 다름없으니 제국군 일개 부대가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큰 저항 없이 안타레스군은 산맥을 넘어 카탈란 가드까지 진군했다. 그리고 요새가 보이는 들판, 작은 숲을 낀 지형에 진지를 구축했다.
일만의 병력이 도열한 대군의 선두, 새하얀 오러의 순록을 탄 채 이니야는 들판 저편을 바라봤다.
협곡을 낀 채 굳건히 서 있는 거대한 요새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찌나 거대한지 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카탈란 가드.”
공략해야 할 입장에서 볼 때, 저 요새의 굳건함은 정신이 아득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니야는 침착하게 요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근심이나 흔들림은 보이지 않았다.
“병력은 이만 정도인가? 첩보의 말대로군.”
요새 전방엔 이미 제국의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많은 병력이 빠졌음에도 아직 저 요새엔 이만의 제국군 병력이 남은 상태다. 일만 오천의 본대로 요새 앞을 사수하고 오천의 군세가 농성전을 준비한다. 숫자상으로는 여전히 안타레스군이 불리한 셈이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군의 사기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배나 되는 전력 앞에서도 사기충천한 상태다. 병사들 대부분이 눈앞의 제국군을 보며 겁먹기는커녕 되레 흥분을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들은 이제껏 한 번도 불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싸워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몇 배나 되는 대군을 상대로 죽어라 싸워 왔다. 이 정도 전력 차는 이미 익숙하다.
“뭐야? 두 배밖에 안 돼?”
“좋아, 진짜 할 만하겠어!”
“이번에야말로 놈들의 피를 흘려 주지!”
오크는 그렇다 치고, 엘프나 드워프마저 살기등등하게 중얼거리는데 사실 꽤 어색한 광경이었다. 엘프나 드워프는 그리 전투를 즐기지 않는 성품이라 알려져 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 남은 이들은 그 수많은 가혹한 전투를 겪고 또 겪어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반년이란 시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을 전전하게 되면 설사 천하의 호인이라도 호전적인 전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신의 가족, 동포를 위협하는 적 앞에서야 오죽하랴?
게다가 그들 앞에는 너무도 믿음직스러운, 절대적인 전투력을 지닌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일만의 안타레스군,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두려움과 흥분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수천의 트롤병이었다.
이 전투는 안타레스의 국운이 담긴 중요한 전투. 아틸카가 이끄는 트롤 구루들 역시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광전사 트롤들을 동원했다. 그 수가 무려 이천이었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종에게…….”
“여신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실란이 이끄는 필라넨스 신관단이 트롤병 사이를 오가며 신성 주문을 건다. 트롤병의 광폭화를 이후 해제할 수 있도록 미리 밑 작업을 해 두는 것이었다.
작업이 끝나자 신관단은 빠르게 대열을 벗어났다. 신관단의 임무는 전투 전 신성 가호를 가는 것과 전투가 끝난 후 트롤병의 광폭화를 해제하는 것, 전투 도중에는 할 일이 없다.
신관단을 이끄는 실란이 이니야에게 정중히 목례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왕 폐하, 부디 무운武運을.”
“실란 대주교, 그리고 필라넨스의 거룩한 종들이여. 안타레스는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하노라.”
여왕의 치하를 뒤로한 채 실란과 필라넨스 신관단은 숲 속의 진지로 돌아갔다. 이제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임무는 부상자 수습과 치유 쪽이다.
멀어지는 필라넨스 신관단을 보며 이니야가 입을 열었다.
“말로이드, 슬로이틀, 저들의 안위를 부탁하오. 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피해는 실로 막심할 테니.”
그녀 곁에서 말을 타고 있던 두 드워프 오러 유저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맡겨 주십시오, 폐하.”
“이 목숨을 걸고, 절대 저들에겐 칼끝 하나 닿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말로이드와 슬로이틀,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오백의 드워프 병력에게 주어진 임무는 필라넨스 신관단의 수호였다.
보통 인간들의 전투에서, 부상자 치유를 맡은 신관단이 공격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기사도뿐 아니라 인간의 도리마저 저버리는 불명예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좀 다르다. 필라넨스의 신관은 단순한 부상자 치유가 아니라 트롤병의 운용 역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제국이 과연 관례를 인정할 지 확신할 수 없으니 최선의 대책을 마련해 놓아야 했다.
드워프들마저 물러나자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안타레스의 전사들이여!”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길게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