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39
☆ ☆ ☆
시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방에서 이니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뛰어들지 않았다. 그저 멀리 떨어진 요새 다른 곳에서 자기 업무에만 열중할 뿐.
‘당신은 자격이 있어요.’
이미 알아 버렸다.
자신은 남자로서 레펜하르트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전생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시리스는 그 여인이 자신이라고 실감할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와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소릴 들어도 그녀는 이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이런 식으로 들렸다.
-엄마와 아빠는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했단다.
시리스에게 있어 레펜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보호자였다. 그녀를 구해 주고, 그녀를 아껴 주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해 준 부모 같은 존재.
그래서 이니야를 질투했다. 그리고 그 질투는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긴 여인의 질투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버지를 빼앗긴 딸의 질투에 가까웠다. 홀로 된 아버지가 새엄마를 맞이하는 걸 본 딸의 심정이 그녀가 느낀 감정의 진실이었다.
오열하는 이니야를 본 순간 시리스는 그 사실을 실감해 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이니야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격이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아버지’ 곁에 있을 자격이.
‘그래, 자격은 있는데…….’
문득 시리스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알았다 해서 질투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열받아!’
새엄마에게 아버지를 빼앗긴 딸의 질투도 엄연히 질투다. 머리론 이해해도 당연히 열은 받지!
신경질이 나 시리스는 멋대로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쳇!”
테이블이 잠시 흔들리다 이내 멈췄다. 옆에서 업무를 돕던 플로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플로라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중뿔난 오러 유저가 업무 보다 말고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수없이 보아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시리스 근처에 깨질 만한 것, 부술 만한 것 다 철수시키고 기본 가재도구도 각별히 튼튼한 것만 놓았다.
덕분에 성질부리는 수장을 모시면서도 엘프 행정부는 별 지장 없이 업무를 치루고 있었다.
“시리스 님, 다음 일이에요.”
사무적인 태도로 플로라는 서류를 건넸다. 잠깐 흥분했던 시리스도 이내 서류 쪽에 집중하며 딴생각을 잊었다.
속으로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시리스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도 이젠 이니야 님을 응원할 수밖에 없네요.’
예전엔 시리스에게 굴러온 돌에 지지 말라고까지 했지만, 이제 와선 플로라도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 반년간의 이니야,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본 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나라의 왕비가 될 자격이 있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라고.
☆ ☆ ☆
마사지가 끝나자 이니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의관을 정돈했다. 겉옷을 걸치며 그녀가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곧 만찬이네요?”
“예, 모든 이들이 모이는 자리지요.”
얼마 전 레펜하르트는 각 종족의 수장이며 안타레스의 수뇌부에 연락을 취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만찬을 열겠다는 소식이었다. 다들 기쁘게 받아들이며 만찬에 참가하겠다고 전언을 보냈다.
들뜬 얼굴로 이니야가 말했다.
“오랜만에 모두의 얼굴을 보겠네요.”
물론 정확히 말하면 모두는 아니다. 렐하드며 킨지르 등, 지난 반년간 생사를 달리한 이들도 제법 있다.
아련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들을 추억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어째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죽은 이들 때문인가 싶어 이니야가 아차 했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좀 표정이 달랐다.
“레펜하르트 님?”
슬프다거나 그리워한다기보다는, 뭔가 굉장히 긴장한 얼굴이다.
진지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그녀를 보았다.
“이니야.”
“예.”
“전 이제 그곳에서 중대한 발표를 할 생각입니다.”
이니야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과연, 그들이 어찌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전생부터 알아 왔던 이들.
그리고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난 이들.
이미 오랜 시간 그들과 함께했다. 이미 많은 일들을 그들과 함께했다.
레펜하르트의 뜻에 따라 안타레스를 세우고, 레펜하르트가 죽었다 믿었음에도 스스로 일어서 스스로의 의지로 안타레스를 지킨 이들이었다.
모두에게 진실을 알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미 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동안 너무 미뤄 왔지요.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습니다.”
레펜하르트는 각오를 다졌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4
전시 중이라 만찬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풍성했다.
크로방스 왕국의 원조 덕에 안타레스는 혹독했던 식량난에서 벗어났다. 테이블 가득 술과 요리를 쌓아 두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생긴 상태다.
푸짐한 만찬을 앞에 두고 안타레스의 수뇌부가 모두 모였다. 상석에 앉아 레펜하르트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전생의 사천왕이었던 시리스, 마켈린, 아틸카, 타시드가 보였다.
전생의 검성 사이러스와 카르사스 대왕,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적이었던 그들이 러스와 카를로서 동료가 되어 이곳에 앉아 있었다.
이번 생애에 새롭게 생긴 소중한 인연도 보인다. 현생에서 가장 먼저 만났던 권황 제라드, 실란과 틸라, 아스레일 경이며 스탈라와 샤일렌 등.
그리고 무엇보다 왕비로서 그의 곁에 차분히 앉아 있는 여인, 이니야…….
모두를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좌중의 시선이 레펜하르트에게 쏠렸다.
“그대들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다들, 느닷없이 이 열린 만찬에 뭔가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모두들 그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스스로를 가리켰다.
“당신들이 왕이라 부르는 눈앞의 남자가 과연 누구인지.”
모인 이들의 눈이 빛났다. 레펜하르트의 측근치고 그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그저 다그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이제껏 참아 왔을 뿐이다.
“나는 이 시간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야, 겨우 그들의 왕이 입을 열었다.
“이 모습 또한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닙니다.”
차분한 어조로 레펜하르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온 자.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뒤, 마왕이라 불릴 자입니다.”
☆ ☆ ☆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10서클을 터득함으로써 고금 제일의 마법사가 되었던 것, 그 와중에 생각이 변화하여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고 인류로부터 두려움을 사 마왕이 된 일. 그리고 결국 패배해 안타레스 제국을 잃고 시공 회귀 주문을 써 이 시대로 돌아온 그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풀어헤쳤다.
그 와중에 권왕 테스론과 육체가 바뀐 일이며, 그로 인해 전생의 적이었던 러스를 만난 일, 카르사스 대왕을 거둔 것과 현재 세이어가 자신의 육신을 차지했다는 것까지 전부 말했다.
워낙 긴 이야기였다. 몇 번이나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술잔을 비워야 했다.
결국, 허차원을 떠돈 것으로 지난 반년간의 일을 해명하며 레펜하르트는 모든 이야기를 마쳤다.
“……이게 제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가볍게 술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솔직히 레펜하르트는 크게 반발은 없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정도 신뢰 관계는 쌓았단 확신이 들었기에 털어놓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고, 사람 일은 더더욱 모르는 법이다. 이들 모두가 그의 기대대로 반응해 줄 거란 확신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꿀꺽!’
침까지 삼켜 가며 레펜하르트는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을 보니 다들 상당히 놀란 것 같긴 했다. 그런데 배신감이나 당혹감 등이 보이느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끙, 할 수 없잖아. 애초에 내가 남 눈치 잘 보는 놈도 아니었고.’
그때였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카를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다행입니다.”
“응?”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그가 예상한 반응은 ‘괜찮다, 이해한다.’ 같은 긍정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그럴 수가! 우리를 속이다니!’ 같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다행이라고?
카를이 실란을 바라보았다. 실란도 피식 웃었다.
“그러게, 다행이네요.”
두 사람이 레펜하르트를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래도 인간이긴 했네요.”
“그러게요. 예상했던 것보단 훨씬 양호한데요?”
심지어 저런 반응은 카를과 실란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난 형님이 무슨 다른 차원의 마신이랑 계약했다든가 해서 저런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계약해 놓고 마신은 패 죽였다든가…….”
타시드도 동참했다.
“난 은인께서 은의 시대 고대인의 후예라든가, 뭐 그런 쪽에 걸었지. 둘 다 틀렸으니 러스와의 내기는 무승부구먼.”
스탈라가 슬쩍 손을 들었다.
“난 그냥 다른 차원의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아틸카가 혀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