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42
실란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하고 있는 이라면 자신의 죽음 뒤 남은 이가 괴로움에 헤매길 원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이가 행복해지길 원하는 것이야말로, 필라넨스가 지음한 사랑이다.
실란은 단언했다.
“여신께선 오히려, 새로운 사랑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라 하셨죠.”
레펜하르트는 침묵을 지켰다.
“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새파랗게 어린 실란에게 저런 소리나 듣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동시에 그 말에 납득하는 자신을 보고 황당하기도 하며, 얽인 실타래가 풀어지는 해방감도 느껴지고, 저 말에 반박하고 싶은 감정의 편린도 느껴진다.
모든 것이 그저 심란할 뿐이었다.
“자, 그럼 필라넨스를 섬기는 이의 임무는 여기까지!”
실란이 테라스 난간에서 손을 뗐다.
이미 할 말은 충분히 했다. 이제 남은 선택은 레펜하르트의 몫이었다. 필라넨스의 가르침은 자연스러움, 어디까지나 도움을 줄 뿐 선택을 강요하진 않는다.
“전 술이나 더 마시러 갈래요.”
게다가 더 이상 레펜하르트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 여인이 테라스 밖으로 나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 님? 뭐 하고 계세요?”
희미한 미소를 건네며 실란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실란을 지나치며 이니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이니야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보다 강건하고 듬직한 최고의 육체를 지닌 저 사내를.
저 굴강의 육체 안에 그 누구보다 위대한 지식과 지혜가 담겨 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고의 육체와 최고의 정신.
양립하기 힘든 그 둘이 어찌 한자리에 모여 있었는지.
“그럼 지금의 레펜하르트 님은 권왕인가요, 아니면 대마법사인가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군요. 지금 와서는.”
“그럼 이것도 그런 이유일까?”
“뭐가요?”
이니야가 손을 뻗어 레펜하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머리가 나고 있어요.”
“네?”
황당해하며 레펜하르트는 머리칼 하나를 뽑아 보았다. 밤이지만 오러 유저의 가공할 시력은 이 정도로도 색을 구별할 수 있다. 정말, 갈색 머리칼 밑동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인상도 많이 바뀌셨고.”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뺨을 만졌다. 인상이 바뀌었던가?
“예전보다 훨씬 지적인 인상이세요. 못 느끼셨나요?”
매일같이 보다 보니 오히려 자기 얼굴은 변화를 느끼기가 힘들다. 조금 놀라 레펜하르트는 마법으로 빛의 거울을 만들어 얼굴을 비췄다.
“변……했나?”
여전히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미 테스론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달라졌다. 성질 급해 보이던 인상은 사라지고 상당히 차분한 표정이 얼굴 전체에 감돈다. 혈기 넘쳤던 갈색 눈동자도 짙은 고뇌의 빛이 맴돌고 있다.
“확실히…… 좀 변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영혼이 육체에도 영향을 주나요?”
“그럴 수도 있지요.”
육체는 정신을 따른다.
정신은 육체를 따른다.
서로 다른 둘이 온연히 하나가 되었으니, 더 이상 둘일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신기하네요.”
“전례가 없던 일이니까요.”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머리칼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젠 더 이상, 권왕의 육신을 입은 마왕의 영혼이라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생과는 별개의, 이 시대의 전혀 다른 존재다.
“기분이 복잡하네.”
미묘한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는 뽑은 머리카락을 날렸다. 날리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따라가다 이니야가 말했다.
“레펜하르트 님.”
“네?”
“레펜하르트 님 말씀대로라면, 전생 때는 안타레스가 패한 거지요?”
분명 레펜하르트는 말했다. 전생의 자신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고. 그런 힘을 지니고도 인류에게 패해 버렸다고.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까요?”
레펜하르트는 이길 수 있다고 답하지 않았다. 대신 반문했다.
“재상이 물었었죠? 대체 그 힘을 가지고 어떻게 질 수가 있냐고?”
이니야가 빙긋 웃었다. 사실 그 의문은 그녀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해야 저런 신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도 패배할 수가 있는 거야?
“이제야 저도 제가 왜 패배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패배한 원인은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엔 하나로 집결된다.
그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난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해 못 하고, 결국엔 이해받아 전쟁이 멈출 거라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의 현명함을 이해 못 하고, 적당히 힘을 쓰면 굴복할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전생의 자신은 꿈을 꾸는 방법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인류와 이종족의 공존.”
인류 연합군의 지도부를 몰살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인간의 왕국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 대가로 이종족들의 피해가 더욱 커지긴 했지만 당시 그에겐 이종족이 흘릴 개개의 피보다는 인류와의 공존이 더욱 중요했다.
전생의 레펜하르트에게 있어 전쟁이란, 인간이라는 거인과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이라는 작은 소년들의 싸움이었다.
거인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는 소년들을 대신해 거인을 두들겨 팼다. 그러나 소년들이 거인의 급소에 칼을 꽂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싸움을 벌이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 소통할 것이라 믿었다. 설사 팔다리에 부상을 입는다 해도 숨통이 끊어지지만 않는다면, 결국 원하던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저 거인과 소년들의 팔다리, 그것 역시 의지가 있는 별개의 존재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티격태격한다고만 생각하는 저 싸움 속에 얼마나 무수한 의지가 충돌하고 죽어 가는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미움과 증오가 쌓여 가는지…….
이 모든 걸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막연히 시간이 덜 지나 원하는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만 여겼다.
‘그랬으니 결국 그 모양까지 갔지.’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지금도 제가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편은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눈치 빠른 인간은 아니다.
“그래도 이젠, 제가 이해를 못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인 그는 모르는 부분을 알기 위해 살아왔다.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극복해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러나 권왕이기도 한 지금은 모르는 부분을 타인에게 넘길 수 있다.
이 차이는 실로 컸다.
“전 변했지요. 그러니 결과도 변할 거라 믿고 있습니다.”
밤바람이 불어와 레펜하르트와 이니야의 머리칼을 살며시 흔든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이니야가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레펜하르트 님이 변하셔서…….”
“네?”
어째 알아듣기 힘든 반응이라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니야가 수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 인류가 레펜하르트 님을 마왕이라 불렀는지 좀 이해할 것 같거든요.”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이니야가 집중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녀는 레펜하르트를 따르던 이종족과, 그를 적대하던 인간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이니야가 어깨를 부르르 떤다.
“신과도 같은 힘을 지닌 존재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사람을 위해 그 힘을 멋대로 쓴다니…….”
실로 두렵다는 듯 그녀는 중얼거렸다.
“정말 무서운 일이군요, 그거야말로.”
제69장 확인
1
두 명의 엘프 여인이 유리 쟁반을 들고 어두운 통로를 걷고 있었다. 석벽으로 이루어진 이 좁은 통로는 길목마다 한기가 흐르고 기이한 기분이 들어 다들 기피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 두 엘프 여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들은 안타레스 왕궁의 시녀였고, 안타레스의 왕을 위해 심부름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이 통로의 끝에 그들의 왕이 있었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온갖 액체가 끓고 있는 플라스크가 놓인 십수 개의 테이블과 형형색색의 광석들, 괴상한 형태의 식물들과 벽 여기저기 걸린 마물의 시체까지.
무슨 연쇄살인마의 도축장을 보는 듯한 그 섬뜩한 광경 속에서 한 거구의 남자가 뭔가를 작업 중이었다.
“폐하, 나머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들이 들고 온 유리 쟁반에는 붉게 물든 금속 구슬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그 구슬은 표면 여기저기에 피가 묻고 살점이 달라붙어 흉측하게 보였다.
거구의 남자, 레펜하르트가 테이블 한쪽에 손가락질을 했다.
“아, 거기 놓도록.”
“예, 폐하.”
구슬을 살펴보며 그가 물었다.
“그건 누구 거지?”
전후 처리를 하며 레펜하르트는 불사의 힘을 지녔던 은의 현자들, 그 시체로부터 심장 반대편을 해부하도록 따로 명령을 내렸다. 저 구슬들은 그 시체 속에서 나온 물건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끔찍한 일인데, 의외로 일개 시녀인 이 엘프 여인들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국 기사 걸포드와 폴스타 후작의 것이라 들었습니다.”
안타레스의 일개 시녀는 다른 왕궁 시녀와는 뽑는 기준이 전혀 다르다. 왕실 예법이라든가 손재주, 혈통 따윈 아무 의미 없다. 안타레스에선, 최소 두 자릿수의 전장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왕궁의 시녀’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군사 국가다운 면모라 하겠다.
“그렇군. 알았다.”
대꾸하고 이내 레펜하르트가 등을 돌렸다.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아 작업에 열중한다. 덩치에 안 맞게 뭔가를 열심히 조물락거리며 가끔 등을 움찔거린다. 그때마다 뚜렷한 등 근육이 씰룩대며 존재감을 발한다.
그 모습에 엘프 시녀 하나가 한숨을 쉬었다.
“폐하, 웬만하면 외투 정도는 걸치심이…….”
개탄할 일이었다.
아아, 자신들의 왕은 어째서 공식적인 자리 외엔 바지만 입고 사는 건가? 저 무문에게 상의上衣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정녕 짐 언브레이커블은 가슴 못 보여 줘서 안달이 난 변태 무문이란 말인가?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시리스가 잔소리 열심히 한 덕에 나름 외투 잘 챙겨 입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니야가 왕비가 되며 상황은 변했다. 시리스는 더 이상 레펜하르트의 옷 취향에 관여하지 않았고 이니야는 레펜하르트의 근육만 보면 해롱해롱 녹아 버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 벗기지 못해 안달인 판이었으니 제대로 옷을 입힐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