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43
‘아, 왕비님은 다 훌륭하신데 남자 취향이 좀…….’
‘아니, 남자 취향 자체는 훌륭하시지. 그렇지만 심미관이 좀…….’
물론 레펜하르트에겐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에이, 시약 잘못 튀면 옷 버려. 어지간한 가죽옷도 단번에 녹여 버리는 것들뿐이라고, 이거.”
그가 현재 다루는 마법 시약 대부분은 상당히 독성이 강한 것들이다. 한 방울만 잘못 튀어도 어지간한 옷은 구멍이 송송 나는 것이다. 엘프 시녀가 기가 막혀 말을 이었다.
“그럼 옥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외투를 걸쳐야…….”
말하다 말고 시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옥체라는 표현이 맞나?’
눈앞의 사내는 바로 권왕이다. 아무리 독한 마법 시약도 몸에 튈 경우 슥 닦으면 그만인 몸뚱어리를 지닌 작자다. 옥체보단 금강체에 가깝지.
‘……어떻게 보면 검소하신 걸지도.’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건 아까운 옷 버리지 않겠다는데 뭐라 할 순 없었다. 그저 흉한 꼴 안 보도록 외면하는 수밖에.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아, 수고했다.”
볼일 끝난 시녀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듯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전장에서 온갖 흉한 꼴 다 본 그녀들이라지만,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이 걸려 있는 마법사의 연구실에선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녀들이 나가자 레펜하르트가 구슬을 챙겨 들고 유심히 살폈다.
“역시 모든 구슬이 기능이 동일하군. 똑같은 물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은의 현자들로부터 불사의 아티팩트를 회수한 후, 레펜하르트는 시간이 허할 때마다 이를 연구해 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확도 있었다.
“일단 수신기 역할을 한다는 건 틀림없고.”
아티팩트 자체의 능력은 거의 없다. 내재된 기운만 보면 아티팩트란 이름을 붙이기 부끄러울 정도로 하찮다.
이 아티팩트의 기능은 하나뿐이었다. 이식된 사용자의 생체 반응을 읽어 낸 뒤 어딘가로 보고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불사의 힘이 주어진다는 거지.”
은의 현자가 죽어 간 것은 레펜하르트의 A.M.P 쇼크웨이브 때문에 수신기가 정지되어 신호가 가지 않아 더 이상 불사의 육체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특이한 점은 그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 마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조금 파장이 다르긴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마력보다는 신성력에 가까워 보이는데…….”
스스로의 기운, 생명기를 키워 물리적 힘으로 바꾸는 것이 오러.
세상을 구축하는 기운을 체내로 받아들여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힘으로 바꾸는 것이 마력.
신성력은 이 둘과도 다른 궤를 지닌 힘이다.
사람들은 신관이 기도를 올려 신과 소통함으로써 기적을 행사한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분명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간 과정이 대폭 생략된 믿음인 것이기도 하다.
아무나 신과 소통해 기적을 행사할 수 없다. 신관, 신성력이라 불리는 권능을 지닌 이만이 저것이 가능하다.
신이라 불리는 고차원적인 존재까지 닿을 수 있는 소통력, 스스로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갈고닦아 그 전달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신성력이었다. 단순히 기원만 애절하게 하면 장땡인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에너지로서 존재하는 힘이었다.
저 관점으로 접근하면 신성력도 마력처럼 저장이 가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신성력을 아티팩트로 발동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이 아티팩트의 기본 메커니즘은 신관이 신에게 기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 신성 주문은 기도에 응답한 신이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2차 산물, 현실적인 영향력을 보여 주는 것인 데 비해 이건 신성 그 자체로 응답한다는 것 정도군.”
고민하다 말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연구 자체는 꽤 잘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신성神性, 그 자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쩝, 진짜 파악해야 하는 건 사실 그쪽인데…….”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웬일로 여기까지 왔나, 재상?”
이내 문이 열리며 근육질 거구의 수염남이 안으로 들어섰다. 연구실을 둘러보더니 카를 재상이 놀랍단 표정을 지었다.
“이야, 많이 산뜻해졌네요?”
온갖 흉물스러운 물건들이 잔뜩 널린 이 광경을 보고 산뜻하다니? 조금 전의 시녀들이 보았다면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물품이 많이 모자라니까.”
현재 레펜하르트의 마법 연구실은 카탈란 가드의 탑 하나를 비우고 신설한 것이었다. 아라난 그라드에 있던 원래 연구실에 비하면 시설도 설비도 물품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시녀들은 지금의 광경만으로도 치를 떨었을지 모르겠는데, 아라난 그라드의 원조 연구실에 비하면 이곳은 아늑한 동산 수준이었다.
“아라난 그라드의 마탑은 무슨 ‘인세에 펼쳐진 지옥’쯤으로 보였는데 말이죠.”
카를 재상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렸다.
“사실 전생 땐 더했었다네.”
그땐 인세에 펼쳐진 지옥 정도가 아니라 그냥 오리지널 지옥으로 보였었다.
어쨌거나, 손을 멈추고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어쩐 일인가, 재상?”
카를이 가볍게 대꾸했다.
“아, 별일 있어서 일부러 온 건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보고할 일인데, 굳이 연구에 바쁜 폐하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카를이 연구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구석에 세워진 거대한 동상을 보며 그가 물었다.
“이 마법 갑옷에 대한 연구는 잘되고 계십니까?”
“바포메트 슈트 말인가?”
은의 현자가 소유했던 초월적인 고대 아티팩트, 장착형 골렘 바포메트 슈트는 아라난 그라드가 아토믹 버스트에 휩싸일 때 그대로 매장되었다. 이후 카를은 특별히 브론즈 나이츠를 보내 저 바포메트 슈트를 발굴시켰다. 브론즈 나이츠의 마갑은 아라난 그라드 인근에 남아 있던 마법 독의 여파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기에, 무리 없이 바포메트 슈트를 회수해 올 수 있었다.
“이 마갑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테니까요. 앞으로의 전략 방향성이 달라지니 여쭙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일단 발동 조건과 사용자 권환 위임 재변경 조건까진 알아냈다네. 그렇지만 아직도 주요 기능은 블랙 박스에 싸여 있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군.”
“그렇군요. 되도록 정확한 기능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꼭 그래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이 마갑은 오러 유저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폐하나 제라드 님, 그리고 오크 오러 유저들은 사이즈 때문에 못 쓰니 누가 써야 가장 효율적인 전력이 될지 파악해야 합니다.”
말을 잇다 말고 카를이 혀를 찼다.
“전 원래 왕비님을 떠올렸는데, 의외로 거절하시더군요?”
레펜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니야의 강점은 정교한 오러 제어술이니까. 아무리 바포메트 슈트가 대단해도 원래의 육체에 비하면 아무래도 오러 흐름에 허점이 생겨. 이 마갑은 기교파보다는 파워 중시형 오러 유저에게 더욱 어울릴 걸세.”
“예, 같은 이유로 러스 경에게도 거부당했습니다. 이런 것 입고 허공검 날릴 자신은 없다더군요. 제어가 너무 힘들어진다던데…… 오러 유저가 아닌 제겐 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만.”
“오러 유저인 내게도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지, 그건. 하여튼 이니야나 러스나 대체 똑같은 오러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카를이 바포메트 슈트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보고드릴 것도 있습니다. 전에 명하신 불사 아티팩트 회수 건에 대해서입니다.”
“음, 전부 회수되지 않았던가?”
불사를 자랑하며 싸워 댔던 은의 현자는 전원 그 신원이 파악되었다. 맞서 싸운 상대가 바로 안타레스의 고위층이니까. 당시 전투에 임했던 이들에게 물어 가며 카를은 확실한 명단을 작성하고 며칠이나 시체를 뒤져 가며 그들을 찾았었다.
“두 명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둘?”
“예, 제국 기사 키린트와 태양탑의 마법사 제이드. 이 둘은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A.M.P 쇼크웨이브의 유효 기간은 사흘이다.
“그렇다면 혹시 사흘이 지나 두 놈만 다시 살아난 걸까?”
“하지만 키린트도 제이드도 모두 오체 분시되어 난자당해 죽었습니다. 상대한 러스 경과 시리스 양이 직접 손을 썼으니 확실하지요. 설마 그 상태에서 살아났을까요? 더구나 사흘이나 지났으니 이미 시신에 부패가 진행되었을 텐데…….”
“나도 그리 가능성은 없다고 보네만…… 그러면 시체가 발견되어야 하지 않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박살을 내 놓았다고 들었으니 말이죠.”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문득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고작 이거 보고하러 굳이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카를이 한가한 처지도 아니고, 어차피 접견 시간도 따로 있는데 굳이 자기 업무 시간 비워 가며 마탑까지 온 이유가 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역시나, 카를의 볼일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따로 여쭤 볼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꺼내기 힘든 말이어서요.”
“무엇이기에?”
주위에 둘밖에 없는데도 카를이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는 시간을 거슬러 이 시대로 오셨다 하셨지요?”
“그렇지. 그 이론에 대해 알고 싶은 건가? 솔직히 자네 마법 수준으론 좀 이해하기 힘들 텐데?”
천하의 레펜하르트조차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 주문, 그야말로 운에 운이 겹쳐 간신히 성공한 주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자신이 왜 성공했는지 잘 모를 정도다. 그런데 카를이 아무리 천재라지만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저도 마법사지만 아무래도 그쪽이 전공은 아니죠. 그건 관심 없습니다.”
“그럼?”
“시공 회귀 주문의 이론은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주문의 효과에 대해선 간과할 수가 없더군요.”
다른 이들은 레펜하르트가 시간을 되돌아 이 시대에 왔다는 소릴 듣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은 달랐다. 그는 저 진실에 담긴 이면의 의미를 읽어 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남들 앞에서, 심지어 시공 회귀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 앞에서도 감히 언급하기 두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바로 묻지 못했다.
순간 카를이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분명 그 시대에서 이 시대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폐하가 계시던 원래 시대, 그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 ☆
카를이 물었다.
“그냥 레펜하르트 님이 사라지고 안타레스 제국이 망하는, 인류가 승리한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다고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사실 틀린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세계의 시간을 되돌려 이 시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무심코 다른 표현도 써 오지 않았던가?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고.
“아니. 그 시간대는 사라졌다. 역사는 지워졌고 지금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지.”
시공 회귀 주문은 실패할 경우 그 여파로 차원이 붕괴되어 세계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마법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고대에서 시공 회귀 주문을 경계한 것은 아니다.
30여 년이란 시간 동안 태어나고 살아간 무수한 생명, 그들이 쌓아 온 무수한 인생, 그 사이에서 벌어진 무수한 사건. 그것이 세계를 구성하고 그 시대를 만든다.
그리고, 시공을 되돌리면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즉, 시공 회귀 주문은 성공한다 해도 똑같이 세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카를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폐하는 이미 세계 하나를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군요.”
레펜하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는 저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신이 이 시간대로 왔으며, 그로 인해 새롭게 인생을 살아간다고 애써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실은 전생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래. 알고 있었지.’
그럼에도 시간을 되돌렸다.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고, 보호하던 이를 모두 잃고,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었기에. 더 이상 그 시간대에 남은 미련이 없었기에 감히 저질러 버렸다.
‘뭐, 테스론 놈이 사람 열받게 만들기도 했었고.’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마왕이 할 법한 짓은 골고루 다 저질렀구나, 나.’
굳은 얼굴로 카를에게 묻는다.
“날 비난하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