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72
의미는 모르겠지만 똑똑한 제자라면 뭔가 건지지 않을까 싶어 사부가 특별히 전해 준 말.
-너희들이 믿고 따르는 신이 내 의지에서 비롯되었으며 너희들의 삶과 죽음이 내 손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상을 조율하고 이끄는 것이 바로 나다. 나는 사람이며, 동시에 신이다.
그렇다. 세이어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신과 여신, 대륙의 모든 ‘사람’과 대륙의 모든 ‘현재’를 창조했다. 그리고 분명 사람이면서 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확실히 거짓말은 아닌데, 좀 과대포장하긴 하셨구먼.”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사고 거하게 친 다음 죽어라 수습한 걸 가지고 세상의 조물주처럼 행세하면 안 되지? 너무 뻔뻔하잖아?”
하지만 비웃는 레펜하르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무리 세이어를 비웃으며 긴장을 풀려 해도 이제껏 본 것들이 너무도 엄청났다.
“신성, 아카식…… 신의 권능…….”
신성, 그것은 전생의 레펜하르트조차도 말년에나 간신히 존재를 느낀 것에 불과한 힘이었다. 당시 어느 누구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다며 상당히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은의 시대 고대인들은 이미 그 힘을 완벽히 손에 넣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자부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자신의 적은 이미 그 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너무도 거대한 벽 앞에 그저 한숨만 나오고 또 나올 뿐이다.
“후우…….”
그러는 동안에도 시공의 역사는 사방에서 파편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 년 만에 눈을 뜬 세이어는 그의 거주지인 우주의 알을 얼어붙은 북쪽 극지로 공간 이동시켜 인류의 손을 피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인류를 위해 힘을 썼다. 인류의 뒤에서 조금씩 지식과 지혜를 전해 주고, 또 과도한 고대 문명의 유산을 인류가 손에 넣을 경우 다시 거두기도 했다.
이 모든 걸 혼자 하려니 너무 벅차 몇몇 영리한 이들을 선택해 자신의 사도로 삼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은의 현자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들의 영향으로 세이어의 존재가 세상에 흘러 나가고, 어느새 그는 지상의 열두 신처럼 인류를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인류의 신 세이어를 섬기는 교단 역시 세상에 나타났다.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인류의 모습에 세이어도 처음엔 어색해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적응하기 나름이라던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인류의 기도를 받아들였다. 차원 너머의 다른 아카식 시스템들, 즉 신과 여신처럼 아카식 일부를 그들에게 할애해 ‘기적’을 하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엘프며 드워프, 오크나 트롤을 대하는 세이어의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세이어도 저들을 적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을 가지고 인류와 함께 그들도 돌보려 했다.
하지만 딱히 할 게 없었다.
인류보다 월등한 문명을 지닌 엘프와 드워프는 세이어 없이도 충분히 잘살고 있었다. 인류보다 월등한 육체 조건을 지닌 오크와 트롤도 굳이 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오직 인류만이 그를 신으로 섬기고, 그의 도움을 갈구했다.
자신의 동족, 그 후예의 섬김을 받으며 점점 세이어의 의식도 변했다. 어느새 그는 오직 ‘인류만을 위한’ 신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인류는 계속 번성했다. 그 와중에 아름다운 엘프를 숭배하고 드워프의 손재주를 부러워하고 오크의 육체에 경탄하며 트롤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 모습은 세이어로 하여금 오랜 과거를 반추하게 만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후손들의 모습에, 엘드라스인을 섬기던 선주종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트라우마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세이어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용납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나의 후손들이 보다 높은 곳으로 향하길 원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엘프와 드워프가 득세할 때마다, 세이어가 전해 준 고대 유물을 든 인류가 나타나 그들과 대적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인류와 이종족이 죽어 갔다.
엘프나 드워프의 문명을 부러워해 저들과 손잡는 인간의 왕국이 나타났다. 편협해진 인류의 신은 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엘프도, 드워프도, 저들과 손잡은 인간의 왕국도 모두 신벌을 받았다.
적을 죽이고, 적과 손잡은 아군을 죽이고, 적을 본받으려는 개척자를 죽이고, 적을 이해하려는 철학자를 죽였다. 죽이고 또 죽였다. 수천, 수만의 죽음은 그에겐 그리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수백 년만 지나도 원상태로 복구될 숫자였다.
“아름다운 숲을 가꾸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아까워해선 안 되는 법이지.”
수천, 수만의 죽음을 아까워하다가 훗날 다가올 수십, 수백만의 ‘인류’의 미래가 헝클어지는 걸 방치할 순 없는 것이다. 아카식의 전지 영역 속 확률 연산을 통해 미래를 예지한 세이어는 이런 자신의 판단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처 느끼지 못했다.
이는 자연nature의 사고방식이지, 사람human의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걸.
어느새 자신이 아카식 그 자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일만 이천 년이 지났다. 수없이 육체를 바꾸고 영혼을 전이하며 세이어는 인류의 뒤편에서 신으로 군림했다.
세상은 깨끗하고 아름다워졌다. 인류의 신이 보시기에 심히 흡족한 세상이었다.
신은 웃었다.
☆ ☆ ☆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다. 흘러가던 시공의 파편이 모조리 사라지고 암흑이 그 자리를 잠식한다.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지?’
어둠 저 멀리, 낯익은 청년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탄탄한 체구를 지닌 잘생긴 미남자였다. 레펜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스론…….”
의식 속의 부유체가 된 테스론이 허공을 디디며 다가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묘하게 초췌해 보이기까지 한다.
“꼴이 말이 아니군.”
말을 건네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의아해했다. 이미 육체를 잃고 남의 의식에 묶여 있는 영혼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되려나?
뭐, 어째서 테스론의 영혼이 저런 몰골인지는 짐작이 갔다. 이 정도 정보량을 긁어모으려면 세이어의 의식에 한두 번 다이브한 걸로는 어림도 없다. 수십, 어쩌면 수백 번일지도 모르지.
그때마다 기억의 주체에게 쫓기고 때론 붙잡혀 정신적 타격을 입었을 터다. 아직도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테스론이 물었다.
“모두 보았나?”
“보았다. 평생의 의문을 풀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지.”
“저걸 보고 즐거웠다고? 역시 네놈은 마법사로군. 아무리 육체가 바뀌어도 그 영혼의 본질은 어디 가는 게 아니야.”
“원래 마법사란 호기심에 죽고 사는 생물이지…….”
쓴웃음을 짓던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고 안색을 굳혔다.
“무슨 수작이지? 어째서 적인 나에게 이런 정보를 주는 거지?”
“그래, 마왕 레펜하르트여, 그대는 분명 나의 적이고 인류의 적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테스론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정신 나간 인류의 신이란 작자가 내 아군이자 인류의 수호자가 되는 건 아냐!”
격한 감정이 폭풍처럼 레펜하르트의 의식에 몰아친다. 꽤나 흥분한 모양이다.
“난 무식한 무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내 목적도 단순했지.”
테스론이 말을 이었다.
“난 수많은 인간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권왕으로 살아가며 무수한 살인을 저지른 테스론이었다. 개중엔 무인이나 마법사뿐 아니라 평범한 민간인도 물론 있었다.
칼과 창을 휘두르지 않고도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있다. 마법과 오러의 힘이 없이도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다. 힘없는 사내라도 연약한 여인을 학대할 때는 지옥의 악마보다 더한 존재가 되며, 때론 말 한마디가 천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아픔을 주기도 하는 법이다.
힘없는 민간인은 죽였을지 몰라도, 테스론은 억울한 자를 죽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은 다르다. 전화의 불길은 강자와 약자, 악인과 선인, 죽어 마땅한 자와 억울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마왕이여, 난 그대로 인해 일어난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 그대로 인해 흘러간 피의 강과 시체의 산을 보았다. 그대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억울한 이들을 보았다.”
‘……넌 정말, 자신은 절대 억울한 이를 죽인 적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테스론.’
기가 막혀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말꼬리 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억울함이란 단어 해석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일단은 넘어가지. 그래서?”
테스론이 증오의 눈빛으로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마왕 레펜하르트, 난 그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
“그거야 잘 알고 있지.”
“마찬가지로 인류의 신이란 저자의 존재도 용납할 수 없다!”
진실은 참혹했다. 세이어는 조물주도, 인류의 창조주도 아니었다.
“그는 우연히 신의 힘을 넣고 그 힘으로 세상을 망친 얼간이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도 멋대로 그 힘을 휘두르고 있지!”
이를 가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그렇다 해도 그는 여전히 인류를 비호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인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신인 것 같은데.”
테스론이 실소했다.
“재미있군, 그대가 내게 그런 소릴 하다니.”
“아, 적어도 그대는 그리 여길 거라 여겼다는 소리다만.”
레펜하르트가 아는 테스론이라면, 세이어가 무슨 짓을 저질렀건 엘프와 드워프의 정체가 무엇이었건 받아들일 줄 알았다. 어쨌거나 세이어는 분명 인류를 위해 저런 짓을 저질렀고, 영혼이 바뀌건 육체가 바뀌건 이종족과 인류가 별개의 종족이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물었다.
“알고 있나? 일만 이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트롤에게 죽은 인류의 수가 몇인지?”
알 리가 없다. 물론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평범한 숫자는 아니겠지만.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닌지 테스론이 바로 말을 이었다.
“의외로 적다. 다 합쳐 봐야 팔백만이 채 되지 않더군.”
팔백만이면 엄청난 수처럼 느껴지지만 일만 이천 년이란 세월 속에선 그리 큰 숫자가 아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1년에 육백에서 칠백 명 사이? 저 정도면 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일만 이천 년 동안 세이어의 손에 죽은 인류의 수는 팔억이 넘어!”
순간 레펜하르트가 움찔했다.
인류의 뒤에서 무수한 전쟁을 일으킨 세이어였다. 직접 나서 뒤섞인 이종족과 인류를 통째로 날려 버리기도 했다. 신의 뜻을 거역한 인간의 왕국이 신벌로 인해 멸망하는 것도 보았다. 잠깐 엿본 과거만으로도 무수한 살육이 세이어로 인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팔억이라고?’
이건 일만 이천 년이라는 시간으로도 변명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게다가 저 팔억에 이종족의 숫자는 끼어 있지도 않다. 여전히 테스론은 인간 외의 이종족은 사람으로 보고 있지도 않으니까.
‘맙소사, 그럼 다 합치면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야?’
기가 막힌 레펜하르트를 향해 테스론이 오열하듯 고함을 질렀다.
“인류의 신이라고? 인류의 수호자라고? 인류 역사상 저 미쳐 버린 신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자는 없어!”
감정의 폭풍이 정신 공간 전체를 휘몰아친다. 굳건한 정신력을 지닌 레펜하르트조차 일순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었다. 지금 테스론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익히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하고, 그렇기에 더더욱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다.
“마왕 레펜하르트, 그대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화가 없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수천, 수만 단위로 죽일 수 있으면 안 된다는 거다.”
예전의 레펜하르트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대량 살상에 특화된 짐 언브레이커블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자신도 인간의 감정이란 걸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하나를 죽이나 열을 죽이나 살인인 건 마찬가지지만, 사람이라면 응당 하나를 죽인 자보다 열을 죽인 자에게 더 분노한다. 수십 명을 죽이나 수천 명을 죽이나 어차피 대량 학살이긴 마찬가지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후자를 더 증오한다.
‘그래, 역시 인간이군.’
테스론은 인간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편협하고 자기 본위에 따른 그의 분노 역시 옳고 그름을 떠나 분명 인간다웠다. 여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레펜하르트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것이 나에게 진실을 보여 준 이유인가?”
“아쉽게도 세이어를 상대할 가능성이 있는 자는 마왕, 그대뿐이니까.”
육체를 빼앗긴 뒤 테스론은 신의 진실을 엿보았다. 세이어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며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딴 건 모르겠고, 테스론이 본 것은 그저 일만 이천 년에 걸쳐 벌어진 대규모 학살의 역사일 뿐이었다. 마왕 이상으로 인류의 신은 용납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경악하고 절망했다. 테스론 자신이 원래의 힘을 되찾아도, 마왕과 대적하던 동료들의 힘을 모아도, 심지어 사부인 제라드나 검성 바나텔이라도 저 거대한 존재 앞에선 조족지혈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자신은 두 번째 육체조차도 잃은 허깨비 신세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좌절해 있던 테스론에게 희망이 보인 건 얼마 전, 아주 잠깐 일어났던 레펜하르트와의 정신적 연결 이후였다.
“뭔 수를 썼는지 그대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오더군. 그래서 바로 움직였다. 어떻게든 내가 얻은 세이어의 정보를 전달하려 했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다. 마왕 정도라면 세이어의 정보만으로도 그의 약점이나 상대법 등을 충분히 찾아내리라 기대했다. 저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적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승산이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비록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제대로 된 건 하나도 못 전달했지만.”
그날 이후론 미리미리 대비를 해 두었다. 레펜하르트가 재차 드림 다이브하길 기대하며 온갖 정보와 역사를 전달하기 쉽게 준비해 놓았다.
“네놈이라면 분명 다시 한 번 드림 다이브를 시도할 테니까.”
“내가 그리할 줄은 어찌 알고?”
“흥, 마법사가 진실을 앞에 두고 간만 보고 끝내는 경우가 있긴 하던가?”
“……제법 마법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테스론이 왜 이리 협조적으로 구는지는 알았다.
“힘을 키워서 싸우다, 같이 죽어라 이건가?”
“그게 제일 기대하는 결과긴 하지.”
테스론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