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474
“그럼 남겨 놓은 비석도 봤지?”
“뭐, 보긴 봤죠.”
레펜하르트가 애매하게 대꾸했다. 분명 보긴 봤지. 박살이 나서 머릿속에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해서 그렇지.
“그럼 왜 몰라? 비석 앞면에 5중첩 돌파 심득 적혀 있고, 뒷면엔 비처 장소도 새겨 놨잖아? 알아서 나중에 경지 되면 찾아가라고.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딴소리냐?”
“……아, 뒷면에 그런 것도 적혀 있었습니까?”
그제야 레펜하르트는 상황을 이해했다. 테스론이 박살을 낸 걸 기억으로 짜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뒷면은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 앞면만 보고 뒷면 안 봤냐?”
“그게, 사정이 있어서…….”
레펜하르트는 짧게 테스론과의 얽힌 일에 대해 사부에게 말했다. 제라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구나.”
자칫했으면 레펜하르트 대에서 소중한 가르침이 끊길 뻔했다.
“질 좋은 돌 골라 다시 만들어야겠군. 그나저나 그 비처를 찾아가 보겠다고?”
“예.”
제라드는 잠시 고민했다.
“네 녀석이 자격이 되던가?”
현재 레펜하르트의 순수한 무술적 기량은 캘러미티 혼 6중첩을 완벽히 소화하고 7중첩의 경지를 넘보는 중이었다. 아직 20대란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라 할 것이었다. 역시 권마합신의 영향으로 진도가 빨랐다.
그렇다 해도 6중첩은 6중첩, 원래대로라면 아직 자격은 없다.
“그렇지만 네놈, 요상한 마법으로 7중첩 쓰지?”
권마합신을 통해 레펜하르트는 7중첩, 정확히는 6.5중첩의 캘러미티 혼을 구사할 수 있다.
“게다가 요새 보니까 거기다 괴상한 수법을 덧붙이기도 한 거 같고.”
캘러미티 혼의 경지는 쉬이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답답해진 레펜하르트는 결국 자신의 전공을 더더욱 살렸다. 권마합신의 술식을 더욱 보강해, 모자란 오러의 경지를 메운 것이다.
현재 그는 순수 오러로 6중첩, 권마합신으로 7중첩에 ‘천신의 권’이라는 새 마법 술식을 통해 8중첩 비스무레한 짓까지 가능했다.
굳이 말하자면 6.5중첩 버전 2.0 정도?
뭔가 슬슬 무술도 뭣도 아닌 괴상한 경지가 되어 버렸다만…….
‘어쨌거나 분명 고리 숫자는 여덟 개잖아?’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대 권왕이 정해 둔 자격은 ‘여덟 파괴의 고리가 빛을 발할 때’였다. 캘러미티 혼 8중첩이 아니었다.
이래서 기록은 명확하게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멋 부린다고 시적인 표현 써 봐야 의미 전달만 흐릿해지지.
“음, 그럭저럭 자격은 된 거 같구나.”
이걸로 제라드의 허락도 얻었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그럼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 ☆ ☆
보름 뒤, 레펜하르트는 눈 덮인 설산을 걷고 있었다.
사방이 새하얗다. 영혼조차 얼릴 듯한 추위로 뒤덮인 이곳을 보며 이니야가 방긋 웃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두꺼운 털외투를 바리바리 껴입은 붉은 머리의 미소년이 치를 떨며 물었다.
“이, 이게, 나, 날씨가 좋은 거라고요?”
“눈보라도 안 불고, 우박도 안 내리고, 엄청 화창한데?”
기분이 좋은지 이니야는 연신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복장은 간단한 털토시와 조끼뿐, 그런데도 추워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다.
이곳은 최북단의 프로즌 랜드, 그중에서도 크로방스 왕국과 인접한 대륙 북동쪽이었다. 이니야가 살던 지역과 인접한 곳이기도 했다. 고향 근처나 다름없으니 그녀 입장에선 신이 날 법도 하다.
뒤를 따르던 러스와 타시드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여긴 좀 살 만하네.”
“밀림보단 훨씬 낫다.”
플루탄 수해를 헤매며 더위로 고생했던 그들이다. 그러나 둘 다 지금은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이니야 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가벼운 복장인데도 추위에 시달리질 않는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그러게, 얼마나 편해?”
러스와 타시드가 서로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플루탄 때와 달리 둘 다 오러 유저로서 경지가 많이 올랐다. 특히 이니야의 가르침 덕에 육체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기술이 크게 늘었다. 이젠 어지간한 추위나 더위쯤은 무시할 수준인 것이다.
뭐, 레펜하르트나 제라드야 애초에 더위나 추위에 신경 쓰는 몸이 아니고.
“오랜만에 다시 와 보는구나. 여긴 정말 변함이 없군.”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웃통을 까고 있는 제라드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사부와 달라! 사람답게 옷 입고 살 거야!’라며 간단한 조끼 하나만 걸친- 정작 팔다리며 흉부, 복근의 맨살은 그대로 드러내 남들이 보기엔 그놈이 그놈인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사부? 실란이 좀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거의 다 왔다. 곧 보일 게다.”
사부의 허락을 받은 레펜하르트는 바로 제라드의 인도하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로 향했다. 그리고 이니야며 러스, 타시드와 실란도 그를 따라왔다.
굳이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대동한 이유가 있었다. 세이어 때문이었다.
세이어가 다시 습격하기라도 하면, 레펜하르트 개인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다. 현재 그나마 세이어에게 통했던 전법은 다양한 능력을 지닌 동료들의 힘을 조합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어딜 가도 최소, 대세이어 전용 전술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은 필요한 것이다.
덕분에 실란만 죽어나고 있었다.
“아으, 추워, 추워, 추워, 추워…….”
레펜하르트의 전술에는 강력한 신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강력한 신관은 현재 안타레스에 마켈린과 실란뿐이었다. 바쁜 마켈린은 도저히 업무에서 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실란이 선택되었다. 둘 다 바쁜 몸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상대적으로 실란이 일이 적었다.
“어우, 저 괴수들. 그저 나 같은 평범한 인간만 괴롭지.”
모두가 느긋한 가운데 홀로 벌벌 떨며 실란이 구시렁댔다. 보다 못해 제라드가 실란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에그, 이 녀석. 이러면 좀 나을 거다.”
그렇게 실란을 든 채 오러를 발한다. 황금빛 오러가 전신을 감싸며 실란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아, 살 것 같다.”
새끼 고양이처럼 허공에 대롱대롱 들려 간다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도 워낙 짐짝 취급 많이 당하던 처지였다.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살살 좀 옮겨요. 이 짐짝(?) 연약하답니다.”
아니, 익숙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뻔뻔해진 것 같기도 하다.
실란을 든 채 제라드는 계속 설산을 올랐다. 다른 이들도 계속 그를 뒤따랐다.
산중턱에 이르러 커다란 얼음 동굴을 지나니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이 나왔다. 제라드가 감동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다 왔구나, 제자야. 이곳이 바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처니라!”
동굴 끝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며 모두가 놀랐다.
“이곳이……!”
사방이 빙벽으로 막힌 분지 형태의 공터,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그곳에 달랑 작은 오두막 하나가 서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일 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돌 오두막이었다. 방 한 칸에 굴뚝 하나, 사냥꾼용 임시 오두막도 저것보단 클 것 같았다.
“……꽤 소박하네요?”
“작네…….”
어째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이다. 허름한 오두막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
“거,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 다들 부자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문의 궁극 비기가 숨겨진 비처인데 좀 근사하게 지으시지들…….”
제라드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뭐하러? 어차피 여기 올라올 인간은 우리 무문밖에 없는데?”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 그것도 8중첩의 경지에 들어서나 여길 찾을 일이 생긴다. 오두막 좀 허름하다고 감기를 걸리겠냐, 얼어 죽길 하겠냐? 대충 지붕 있고 몸 누일 바닥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평범할 줄은 몰랐지요. 그래도 명색이 지상 최강의 무문, 그 궁극의 경지가 숨겨진 비처인데…….”
레펜하르트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공감의 빛을 띠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은근 기대를 했다. 한겨울에도 꽃이 피고 기화요초가 만발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신비스러운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제라드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괴상한 걸 주워 본 모양인데, 그딴 게 세상에 어디 있겠냐?”
그렇다. 보통 흔한 영웅담을 보면 전설의 비기가 숨겨진 전설의 금역 같은 곳은 인세에서 벗어난, 뭔가 신비스러운 장소로 묘사되기 마련인데 사실 이게 현실적으론 참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한겨울에도 꽃이 피는 근사한 지역이라면 숙박업소 세우고 장사를 해야지. 떼돈 벌 텐데. 왜 그런 입지 좋은 곳에 무문의 금지 같은 걸 세워?”
“그것도 그러네요?”
“우리 말고는 방문객 하나 없는 곳에 굳이 돈 들여 근사한 저택 세울 이유가 뭐가 있는데? 쓸데없이 근사한 저택 지을 돈 있으면 제자 키우는 데 쓰고 말겠다.”
지출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알뜰한 자산 관리만이 알찬 제자 육성으로 이어진다는 것 또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가르침이다.
‘하긴 예전에 수행하던 곳도 오두막 자체는 허름했었지?’
하여튼, 제라드가 마저 손짓을 했다.
“헛소리 작작 하고 일단 들어가자. 짐 대충 풀고 초대 조사님의 가르침을 접하러 가야지. 그런데 저 안에 이 인원이 다 들어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성큼성큼, 제라드가 앞장서 오두막으로 향했다. 뒤를 따르지 않고 레펜하르트는 잠시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첫인상 탓에 감동이 많이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니 역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곳이 신을 멸했던 권이 숨겨진 곳이란 말이지?”
과거형으로 말하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의 기억 속에, 테스론이 마지막으로 펼쳤던 과거의 환영이 재차 떠올랐다.
2
테스론의 모습은 사라졌다. 어느새 레펜하르트는 순백의 거대한 홀 안에 서 있었다.
홀 중앙에 은색의 로브를 걸친 한 무리가 보인다. 그 가운데 웬 피투성이의 중년 사내가 꽁꽁 묶여 무릎 꿇고 있다. 복장을 보아하니 마법사인 것 같다.
그리고 그를, 홀 상단의 왕좌에서 세이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자인가?”
“예, 세이어시여.”
인류의 신을 향해 은의 현자들이 정중히 고개를 조아린다. 세이어를 바라본 레펜하르트는 순간 흠칫 놀랐다.
‘저 자식, 꼴이 왜 저래?’
인류의 신은 늙고 병들어 있었다.
윤기 흐르던 푸른 머리칼은 탈색되어 푸석푸석하고 매끈한 피부는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만신창이다. 눈빛은 흐릿하고 사지는 말라비틀어졌다. 그토록 건강하고 아름답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세이어가 묶여 있는 중년인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는다. 찬란한 빛이 마법사를 뒤덮는다. 중년인이 화들짝 놀라 신음을 터트렸다.
“으윽!”
그러나 딱히 고통 따위는 없다. 잠깐 당황했던 마법사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황당해한다.
늙고 병든 인류의 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자라다.”
은의 현자 중 하나가 당황하며 말했다.
“하지만 세이어시여, 이자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입니다. 마법을 익힌 이들 중 9서클의 영역에 든 이는 이자뿐입니다. 오래 사는 엘프나 드워프조차도 이 경지에 든 자는 없습니다.”
세이어는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자신이 바슈탈론의 이름으로 모든 이종족을 청소한 지 벌써 800년째다. 노예 신세가 된 엘프나 드워프에게 마법사가 남아 있을 리 없다.
“9서클이라…… 그 정도 경지의 마법사는 고대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이 정도로는 나를 담을 수가 없다.”
한탄하며 세이어가 손가락을 튀겼다. 불길이 치솟아 중년인의 전신을 감쌌다.
“으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마법사가 순식간에 한 줌 재가 되었다.
늙은 세이어가 왕좌 깊숙이 몸을 숙인다. 그대로 손을 내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