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00
그녀는 전략, 전술가가 아니다. 전사도 마법사도 아니다. 신을 몸에 품고 그 위치를 인정받아 은의 수호자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동안 세렐라인이 주로 행한 것은 은의 현자 내부의 종합 관리, 즉 서류 작업 쪽이었다.
천 장의 보고 서류를 10분 안에 파악하고 요약하라면 충분히 하겠지만 천 명의 병사를 다루라 하면 ‘전군 전진!’이라 외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역시 전문가에게 맡겨야겠지.”
손가락을 튀기며 그녀가 간단한 제어 코드를 외쳤다.
“국지적 공간 소환. 수호자 바슈탈.”
제어실 구석에 푸른 포털이 생기고 근엄한 인상의 60대 노인이 나타났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현 황제, 레어폴 프라임 바슈탈론 1세였다.
“부르셨습니까, 세렐라인 누님?”
“어서 와, 레어폴.”
새하얗게 머리가 센 주제에 레어폴 1세는 새파랗게 어린 세렐라인에게 누님이란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세렐라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정말 어린 남동생 대하듯 한다.
어쩔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세렐라인이 스무 살 가까이 연상인 데다, 레어폴을 아기 때부터 돌봐 준 이가 당시 막 세이어를 몸에 담고 은의 수호자가 된 그녀였으니까.
은의 수호자가 되었다지만 원래 세렐라인은 수조에 동동 떠 있던 수많은 실험체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갑자기 큰 지위를 받았다고 무지렁이 소녀가 현자가 되지는 않는 법, 그래서 전대 은의 수호자이자 제국 황제였던 고르단 3세는 일단 그녀를 제국 황족의 일원으로 위장시켰다. 먼 방계 황족으로 신분을 조작한 뒤 은의 수호자에 걸맞은 지식과 지혜를 교육시킬 셈이었다.
그렇게 황족의 방계가 된 세렐라인은 당시 어린 레어폴을 유독 귀여워했다. 원래 아기를 좋아하는 성품이기도 했고, 또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에서 그나마 어린 레어폴만이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상대라는 이유도 있었다.
어린 레어폴도 그녀를 정말 친누나처럼 따랐다. 황족의 특성상, 부모는 아무리 아이라도 근엄한 태도로만 레어폴을 대했고 시종이며 시녀들은 결코 황자 앞에서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오직 세렐라인만이 저잣거리의 남매처럼 스스럼없이 레어폴을 상대했다.
무려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아이를, 귀여워할 때 귀여워하다가 팰 때는 또 마음껏 팬다. 오직 고르단 3세처럼 은의 수호자인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다. 아이 교육에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황제도 묵인했다.
이후 레어폴이 장성해 제위와 은의 수호자 자리를 물려받게 되자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인 세렐라인을 하대로 대했지만, 그녀가 위대한 ‘신의 오른편’이 된 후론 다시 존대를 하게 된 것이다.
“누님이라…… 옛날 생각나네. 레어폴은 안 어색해?”
“허허,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쪽이 더 편하지요.”
아무리 세계 최강 제국의 황제라도 자기 기저귀 갈고 똥오줌 치워 주던 사람 앞에서 권위를 세우긴 힘들다.
‘그리고 그동안도 신경질 나면 곧잘 나이 내세우곤 했으면서 뭘 이제 와서?’
안 들키게 투덜거리며 레어폴 1세가 제어실 영상을 바라보았다. 박살 난 은의 협력자들을 보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귀한 사람들을 잃었군요, 세렐라인 누님.”
“응, 저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이단자들이 예상 밖으로 강했어.”
태연하게 대꾸하는 세렐라인을 보며 레어폴의 미간이 더욱 찡그러졌다.
저들의 죽음은 저리 태연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오러 유저들이고 은의 협력자 중에서도 귀한 존재들.
물론 세렐라인도 패배를 예상하고, 버린 돌 취급하고 저들을 내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귀한 고대 전투용 슈트를 들려 주지도 않았겠지.’
아다만드릴 슈트 하나 유출시키는 데도 그 난리를 피웠는데, 아무리 세이어의 허락이 떨어졌다지만 그걸 전원에게 몇 번씩 갈아입으라고 던져 주었을 정도면 확실히 최고의 지원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아쉽군요. 굳이 따로 내보낼 게 아니라 지하부에 배치하고 방어 시스템과 연동해 전투를 벌이게 했다면 훨씬 효율적이었을 터.”
온갖 고대 기물로 무장한 방어 시스템이 존재하는 세이어 템플 지하부를 놔두고 굳이 지상부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다니? 덕분에 저 귀한 이들이 헛되이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
은근한 레어폴의 힐난에 이번엔 세렐라인이 인상을 썼다.
“그럼 저들이 저 더러운 흙발을 성역에 디디게 되잖아?”
바로 레어폴이 태도를 바꿨다.
“그,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겠군.”
레어폴은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세이어 템플의 지상과 지하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지상의 화려한 신전은 신을 찬미하기 위해 인간들이 세운, 과거 은의 현자들이 고대 기물을 이용해 만들어 낸 건축물이다. 권위 있고 성스러운 영역이지만 분명 인류의 공간.
반면 지하는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초월적인 장소다. 감히 인류가 범접해서는 안 될 진정한 의미의 성역, 그곳에 이단자들의 발이 닿는 것 자체가 이미 불경 중의 불경이다.
“하지만 결국 저들을 지상에서 처리하진 못했어. 세이어께서 크게 화내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셋으로 갈라져 세이어 템플 안을 달리는 이단자 무리를 보며 세렐라인이 몸을 떨었다. 레어폴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어 데스크로 걸어왔다.
“상황은 알겠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맡지요.”
빠르게 제어 데스크를 조작하니 영상을 통해 현 상황에 대한 온갖 정보가 튀어나온다.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른 영상이었지만 레어폴은 침착하게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단의 현자, 카를. 그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지만…….”
두뇌를 풀로 가동시키며 예순이 넘은 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짐도 그렇게 떨어지진 않는단 말이지.”
그는 은의 수호자이기에 앞서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황제다. 그리고 제국은 결코 무능한 자를 중용하지 않는다.
이는 심지어 옥좌의 주인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략, 전술,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등 다양한 측면에서 초일류의 기량을 지니고 있어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제국의 옥좌다.
‘전략가’로서, 레어폴은 모든 현 정보를 파악하고 검토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최선의 대책을 떠올려 현실에 풀어 헤쳤다.
세이어 템플 전역으로 명령이 하달된다. 자동적으로 움직이던 방어 시스템이 기지개를 켜고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낸다.
보고 있던 세렐라인이 손뼉을 쳤다.
“역시 이런 건 레어폴이 잘한다니까?”
순식간에 세이어 템플 언더그라운드가 철통같은 성벽, 쥐새끼 하나도 범접 못할 가공할 요새가 된 것이다. 세렐라인이 손대고 있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자신만만하게 노인이 데스크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자, 그럼 움직여 볼까? 허허허허.”
제78장 산개
1
파괴된 신전 내부를 네 사람이 빠르게 주파하고 있었다. 흩어진 레펜하르트 일행, 그중 아틸카와 러스, 타시드, 시리스였다.
미티어로 인해 붕괴된 건물의 파편을 빠르게 타 넘으며 넷은 회색빛 통로와 연결된 커다란 공간에 들어섰다.
“여긴가 보군.”
지도와 공간을 비교해 보며 아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스가 혀를 찼다.
“겨우 찾았군요. 지도가 영 부실해서, 원.”
그들이 받은 세이어 템플 내부 지도, 그것은 곳곳에 공백 상태가 존재했다. 레펜하르트가 드림 다이브에서 얻은 테스론의 정보 자체가 워낙 중구난방이었던 탓이었다.
분명 테스론은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레펜하르트에게 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레펜하르트의 육신을 얻고 마법사의 길을 걸었어도 그는 원래 무인이었고, 그중에서도 유독 무식하기로 명성 높은 짐 언브레이커블이었다. 정보야 열심히 챙겼다지만 도저히 정리 정돈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세이어 템플 지상부에서 굳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은 이유였다. 분명 자신의 위치는 알고 있었다. 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위치한 곳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위치에서 지하 통로로 가는 길은 모른다.
이런 식이라 현재 아틸카 일행도 여기까지 오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중간에 적이 나타나지 않아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오래 걸렸겠군.”
아틸카의 혼잣말에 시리스가 말을 받았다.
“카를 재상님도 그러셨죠. 만약 세이어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아마도 지상부에 병력을 배치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또 레펜하르트 님이 틀렸네?”
일단 세이어가 수하를 움직이는 식으로 나온다면, 레펜하르트는 분명 지상과 지하 모두에 방어 병력이 순차적으로 포진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카를은 이번에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세이어 템플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러진 않을 겁니다. 이쪽의 전력을 알아보기 위해 지상부에도 밑밥 정도야 깔겠지만, 그것이 격파당한 시점에선 굳이 불리한 장소에 병력을 배치할 이유가 없지요. 저 같으면 보다 방어가 쉬운 지하부에 힘을 집중시켜 침입로를 차단할 겁니다.
비록 이유는 틀렸지만―세렐라인은 그저 신성한 지하부에 레펜하르트 일행이 들어오는 게 싫었을 뿐이니까― 그 외엔 제대로 예측했다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틸카 일행은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어떤 저항과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하여튼 두 사람 의견 엇갈렸을 때 형님 말이 맞은 적이 없다니까?”
러스가 너스레를 떨며 일루미네이터를 뽑아 들었다.
“그럼 문을 딸까요?”
“부탁하겠네, 러스 경.”
공간 안쪽에 위치한 커다란 금속제 문을 가리키며 아틸카가 말했다.
지하로 향하는 저 거대한 문은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진철 아다만티움과 진금 엘드릴 합금으로 만들어져 가공할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냥 문만 무식하게 튼튼한 것이라면 차라리 벽을 뚫고 가 버리는 방법도 있겠는데, 벽 역시 같은 재질에 마법에 의한 미닫이 형식이라 문과 벽 사이의 부품을 부숴 뜯어내는 방법조차 통하지 않는다.
“명정광폭화라면 부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역시 되도록 힘을 아껴야겠지.”
아틸카의 손짓에 따라 러스가 문 앞에 서서 발도세를 취했다. 차분히 호흡하며 손가락을 자루에 가져간다.
“후우…….”
그의 비기, 허공검 인피니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다. 이 기술 앞에선 진금 엘드릴과 달걀 푸딩의 강도 차이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난 오러양을 소모하게 되니 앞으로 어떤 적과 마주할지 모를 현 시점에서 저 기술을 쓰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굳이 인피니티까지 쓸 필요도 없고.”
러스가 공간의 검을 내뻗었다.
“허공검, 호라이즌!”
블레이드 오러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문은 멀쩡했다.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런데 문이 열렸다.
“갑시다.”
러스가 손짓으로 영기염동을 발동하니 거대한 문이 좌우로 스르륵 열린다. 문은 그대로였지만, 그 문을 잠그고 있던 잠금쇠가 풀린 것이다.
지금 러스가 벤 것은 이 무식하게 단단한 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문의 제어 시스템이었다.
문짝이야 온갖 마법 금속 때려 박아서 튼튼하게 만들었겠지만 그것을 열고 닫는 제어 시스템까지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 안쪽에 있어 손이 닿지 않으니까. 그러나 허공검은 그곳에도 손이 닿는다.
“그런데 정말 형님 말대로 대충 부수기만 해도 잠금 장치가 해제되네요? 보통은 자물쇠가 부서지면 잠긴 상태로 남는 것 아닌가?”
러스의 의문에 답한 것은 이제 제법 마법의 경지가 오른 시리스였다.
“그건 평범한 자물쇠 달린 문 이야기고, 이건 은의 시대 물건이잖아요. 자동화, 무인화된. 혹여나 시스템이 고장 나기라도 하면 사람이 갇힐 수도 있으니, 그걸 감안해 저절로 열리는 구조로 만드는 게 상식이죠.”
“과연, 은의 시대 정도로 발달해 버리면 상식도 우리와는 달라지는군.”
문 안쪽을 살피며 러스는 혀를 내둘렀다. 은의 시대 문명에 대해 혀를 내두른 게 아니었다. 바로 저 말을 알아듣는 자신에 대해서였다.
‘그동안 워낙 이것저것 많이 보고 들었더니 저런 말도 이해가 가네.’
문명이 다르면 상식도 다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의외로 폭 넓은 경험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자신이 레펜하르트를 따라다니며 얼마나 많은 걸 보고 익혔는지 새삼스레 실감이 난다.
‘가문에 틀어박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죽어라 칼질만 하고 있었다면 절대 이해 못 했겠지.’
러스를 선두로 네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밝았다. 벽마다 상당한 광량을 뿜는 마법의 등불이 설치된 덕이다. 길이 1미터에 빛을 발하는 유리 막대기를 등불이라고 하긴 좀 어색하지만.
그렇게 계단을 따라 한참 걷다보니 드디어 통로가 나왔다. 이제까지 보았던 세이어 템플 지상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사방이 금속과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사실 대리석은 아니다. 그냥 대리석 비슷한 느낌의 석조 재질일 뿐. 벽마다 복잡한 파이프라인이 오가고 장식인 건지 아니면 용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부품들이 정신없이 박혀 있었다.
“여기는?”
타시드의 의문에 시리스가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공백이네요. 이곳에 대한 정보는 없어요.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진 알겠네요.”
공백으로 그려진 지도 서남쪽에 다른 지구와 연결되는 통로가 보인다. 도로 지도를 챙기며 아틸카 일행이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위이잉!
묘한 기계음 소리가 울리며 움직임이 느껴진다.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았기에 러스와 타시드가 흠칫 놀랐다.
“뭐지?”
아틸카가 두 자루 단봉을 꺼내 들었다.
“편하게 보내 주는 건 여기까지인 듯하구려.”
그냥 장식처럼 보였던 벽면의 부품들, 그것이 일제히 움직이며 형상이 변화한다. 퍼즐처럼 복잡하게 회전하고 재배열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그 광경은 의외로 아틸카 일행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카를 재상이 사용하는 마검 엘드라드, 그것이 검집에서 마갑 형태로 변할 때와 흡사하다.
-가스트 파라 켈 하트!
어느새 이족 보행 형태로 변한 ‘그것’이 고대어를 외치며 붉은 눈빛을 발한다. 메사이어를 뽑으며 시리스가 차갑게 웃었다.
“은의 시대 골렘이군요.”
총 아홉 기의 은의 시대 전투용 골렘이 일제히 두 팔을 든다. 팔뚝이 매섭게 회전하며 불을 뿜었다.
드르르르륵!
☆ ☆ ☆
세이어 템플 지하부는 분명 철저한 방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식의 마법 함정이라든가 벽에서 솟구치는 칼날, 내려앉는 천장이며 용암이 흐르는 강 따위와는 전혀 궤가 달랐다.
저런 건 보통 온갖 부장품 묻어 놓고 도굴꾼 경계하는 왕의 무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통행 자체를 허락지 않을 때나 설치하는 함정, 반면 이 세이어 템플은 원래 우주의 알, 은의 시대 아카식 드라이브 제어 플랜트였다. 아침 되면 직원이 출근해서 자기 볼일 보다 밤 되면 퇴근하던 장소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