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03
“저도 상당히 힘을 소모했어요. 상대가 계속 물량 공세로 나서기 전에 어서 움직이지요.”
성큼성큼 이니야가 길을 나선다. 레펜하르트 곁을 떠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여왕 모드’로 돌아간 그녀였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저쯤 되면 이중인격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뒤를 따르며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싶은데. 이니야 양이 지칠 땐 제라드 공이 나서면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이번 공세 전, 골렘들만으로 공격을 받았을 땐 이니야는 나서지도 않았다. 제라드 홀로 주먹질, 발길질, 오러질(?) 몇 번 한 것으로 깔끔히 처리했던 것이다.
이니야와 제라드가 번갈아 공격을 감당하며 체력을 유지한다면, 그리고 카를이 보조하고 마켈린 자신이 회복을 빠르게 도우면 아무리 상대가 물량 공세로 나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왜 카를 재상이 제라드 공을 이쪽에 붙였는지는 좀 의아하더구려. 차라리 아틸카 공과 바꾸는 쪽이 힘 균형이 좀 더 맞지 않나?”
아틸카가 결코 약하진 않다. 비록 러스와 타시드가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안타레스 공국에서 무력 서열을 매겨 보라면 제라드와 레펜하르트, 이니야에 이은 4인자 정도는 된다. 즉, 현재의 이니야보다는 전력상 밑이란 소리다.
그런데 굳이 제라드라는 최강 전력을 이니야와 함께 다니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이 마켈린의 의문이었다.
카를이 고개를 저었다.
“제라드 공은 전력 외입니다.”
이니야와 제라드도 동감의 뜻을 표했다.
“그렇겠지요. 은의 현자들이라면…….”
“들고 나올 수법이 뻔하니까 말이지.”
☆ ☆ ☆
“역시 권황 제라드와 눈의 여왕은 만만찮습니다. 방어 전력 절반 이상을 저곳에 투입해야 할 것 같군요.”
레어폴의 근심에 이번엔 세렐라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레어폴.”
“괜찮다고요?”
의아해하는 레어폴을 보며 세렐라인이 방싯방싯 웃었다. 그에게 잘난 척할 수 있게 된 것이 꽤 기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 부분은 이미 내가 처리했거든?”
☆ ☆ ☆
갑자기 제라드가 발을 멈췄다.
“허허…….”
이니야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나타났군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정황을 파악한 카를이 웃었다.
“역시 그렇게 된 겁니까?”
마켈린만 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뭔데? 뭔 일이 생긴 거요?”
해답은 금방 나왔다.
콰아앙!
가공할 폭발과 함께 통로 저편이 붕괴된다. 붕괴된 통로 너머로 거대한 지하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히 100여 미터가 넘는 넓이가 높이만도 수십 미터에 가까운, 그동안 세이어 템플 언더그라운드를 잠입하며 몇 번이나 봐 왔던 공간이었다.
마켈린이 ‘도대체 은의 시대에는 어디다 써먹으려고 땅 밑에 이런 무식하게 큰 공간을 지었대? 우리 드워프도 이렇게는 안 한다.’라고 의아해했을 정도로 드넓은 광장.
그 한가운데 진홍빛의 투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후후후.”
한 자루 검을 가볍게 든 채 전신으로 붉은 기운을 흘리고 있는 강퍅한 인상의 노인.
그가 제라드를 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요즘 자주 보는구나, 제라드.”
제라드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바나텔.”
검성 바나텔. 제라드와 함께 대륙 최강의 자리를 양분하는 그가 드넓은 광장 중앙에 홀로 서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가공할 위압감이 느껴져 카를과 마켈린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우우…….”
“으, 저 괴물이 이곳에 있다니…….”
반면 제라드와 이니야는 태연했다. 이니야가 제라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함께 움직이는 건 여기까지네요.”
“그렇구나.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주먹을 쥐며 제라드가 흥분한 얼굴로 걸어간다.
애초에 카를이 제라드를 전력 외로 치부한 이유가 이것이었다. 은의 현자라면, 반드시 바나텔을 투입해 제라드와 붙게 만들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상식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리 생각했을 테니까.
물론 무인이 아닌 프리스트, 마켈린은 황당해 물었다.
“아니, 제라드 공? 지금 저자를 홀로 상대하실 셈이오?”
“물론이오.”
“……지금 상황에서 왜 굳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타레스의 존폐가 걸린, 무려 인류의 신을 상대하는 싸움이다. 당장이라도 이니야, 카를과 힘을 합쳐 저자를 상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굳이 여기서 저 자와 일대일 대결을 펼칠 이유가 없지 않소?”
제라드가 태연히 대꾸했다.
“마켈린 공, 그대의 말이 옳소.”
“마침 저자는 홀로 나타났으니, 다 같이 힘을 합쳐 싸우면 아무리 검성 바나텔이라도 우리 상대는 되지 않을 터인데?”
“그 말 역시 옳소.”
입으론 계속 동의하면서도 제라드는 여전히 홀로 싸우겠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이니야와 카를 역시 마찬가지, 둘 다 전혀 끼어들 기미가 없었다. 제라드 혼자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아니, 왜…….”
당황한 마켈린을 향해 이니야가 조용히 말했다.
“평생을 싸워 온 호적수와의 대결입니다. 세계의 존망 따위 하찮은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으시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태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바로 옆에 바나텔이 서 있는데도 공격 따윈 할 리가 없다는 듯 반대편으로 향한다. 카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지어 제라드며 바나텔에게 인사까지 건네고 있었다.
“그럼 두 분 수고하십시오. 나중에 뵙게 되는 것이 어느 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길을 막아야 할 바나텔이 도리어 손을 내저었다.
“방해된다. 어서 꺼져라.”
그렇게 이니야와 카를, 마켈린이 광장 저편으로 떠났다. 마켈린만이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바나텔은 끝까지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이글거리는 눈으로 눈앞의 제라드를 노려볼 뿐.
문득 제라드가 입을 열었다.
“인류의 신이라는 작자가 용케 네놈 혼자 보냈구나? 이것저것 딸려 주고 싶어 하지 않더냐?”
바나텔이 피식거렸다.
“세이어께선 아무 말씀 없으셨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보다 무인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더군.”
무인도 뭣도 아니지만, 세렐라인은 80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보아 왔다. 경지에 오른 무인, 특히 검성이나 권왕쯤 되는 절대적인 초인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는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조력은 필요 없지요, 바나텔 공? 어차피 당신이 홀로 나서면 권황 역시 홀로 나설 테니까.’
‘물론이오, 신의 오른편이여. 누가 감히 우리들의 대결에 끼어든단 말이오? 그런 놈이 있다면 내가 먼저 베어 버리겠지!’
설사 일국의, 세계의 운명이 걸리고 신과 인류의 존망이 달린 장대한 전투라 해도 바나텔과 제라드는 둘만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인에게 있어 호적수란 존재.
그래서 카를은 제라드를 전력 외로 놓고 계획에서 아예 빼 버렸다.
그래서 세렐라인도 바나텔을 오직 제라드만을 상대하게 했다.
전략적으로도 양쪽 모두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각자 상대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를 무력화시킨 셈인 것이다.
진홍색 오러를 끌어 올리며 바나텔이 검을 뽑았다.
“너도 나도 늙었다, 제라드. 슬슬 이 지겨운 악연을 끝내자!”
황금빛 오러로 전신을 휘감으며 제라드도 자세를 잡았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바나텔!”
두 사람의 오러가 점점 더 위세를 크게 떨치며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이 요동치고 대기가 일그러지며 광장 구석구석까지 투기가 넘실대며 흘러넘친다.
어느 순간.
“타앗!”
“허업!”
두 줄기 섬광이 서로 충돌했다.
3
우르르릉!
등 뒤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온다. 흠칫하며 카를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드디어 두 분이 시작하신 모양이군요.”
마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라드 공은 괜찮은 건가? 바나텔이란 자는 듣자 하니 절대 제라드 공의 밑이 아니라 하던데…….”
나직하게 마켈린이 기도를 올렸다. 제라드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니야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다 강한 자가 살고, 약자는 죽겠지요. 그들의 승패는 그들의 손에 달린 것, 기도한다고 결과가 변하진 않을 겁니다.”
허허 웃으며 마켈린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 직업이 이래 봬도 그 기도로 먹고 사는 직종이오만?”
이니야의 안색이 변했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알 포트의 교황이었다. 성직자에게 할 소린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흠칫해 사과하는 이니야를 보며 마켈린이 고개를 저었다.
“이니야 양은 역시 폐하와 있어야 해. 평소엔 왜 그렇게 인간미가 없나?”
“……엘프라서?”
엘프라서 ‘인간’미가 없다는 식의 농담인 모양이었다. 마켈린이 더욱 혀를 찼다.
“거봐, 폐하 곁을 떠나니 농담도 영 부실하잖아? 지금 그거 웃으라고 한 말인가?”
“아니, 저…….”
이니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덕분에 어깨의 긴장도 좀 풀어진다. 마켈린이 그 틈에 신성 주문을 발동시켰다.
“이제야 좀 긴장을 푸는구먼? 알 포트시여, 당신의 종에게 활기의 빛을 내려 주소서.”
가공할 마켈린의 신성력이 이니야의 전신으로 스며들며 지친 육신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다. 덕분에 이니야의 오러 재생력도 보다 원활해졌다.
오러와 신성력은 어울리지 않으니, 신성 회복으로 바로 오러를 회복시킬 순 없다. 하지만 오러의 기반이 되는 육체의 피로를 지우고 상처를 재생시키면 오러 회복 속도 역시 훨씬 빨라진다.
그렇게 이니야를 회복시키며 마켈린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원래 약사들도 그러잖소? 약발 잘 받으려면 몸에 힘 빼라고. 신성 주문도 별 차이 없지.”
“확실히 제가 좀 긴장하긴 했나 보네요.”
순순히 승복하며 이니야는 숨을 골랐다. 과연, 조금 전의 전투로 소모된 오러가 급격히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의 긴장을 빼니 육체의 회복 역시 훨씬 빠르다.
잠시 후, 이니야가 생기가 도는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투를 치르기 전과 거의 차이 없는 컨디션이었다. 이 정도면 다시 적이 나타나도 연달아 북해의 숨결과 서리 여왕의 지배를 구사하는 데 별 차질이 없을 것 같았다.
“이래서 카를 재상이 마켈린 공과 저를 붙이신 거군요?”
“왕비 전하의 약점은 체력, 하지만 마켈린 공이 있다면 그 약점도 충분히 없어질 테니까요.”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켈린의 가공할 신성력이면 거의 짐 언브레이커블과 맞먹는 무한 체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분이 힘을 합친다면, 아까 같은 공격이 계속되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요.”
카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