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08
살짝 흥분하기까지 하며 레펜하르트는 통로를 주시했다.
‘어둠의 여왕이라…….’
이윽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란이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으윽, 기분 나빠…….”
깡마른 몸매에 음울한 표정, 웃음이란 걸 지어 본 적이 없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생기 없는 눈동자를 지닌 젊은 여인이었다. 검은 로브에 회색빛 지팡이를 든 채 어둠을 걷고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전설 속 죽음의 신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검은 입술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무저갱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목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 목을 취하겠다.”
레펜하르트는 굳었다.
“어…….”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너무도 변했지만, 거의 딴 사람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린 시절 수년을 함께했던 이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로서 전혀 대단하지 않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고 테스론과 함께 나타났을 때도 그냥 가슴 좀 아리고 말았던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릴 적의 소꿉친구.
그랬던 그녀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필레나?”
21권
제79장 어둠의 여왕
1
바슈탈론 제국 내에서 차기 검성으로 추앙받던 키린트.
태양탑의 미래라고까지 불렸던 대마법사 제이드.
제국 최고위층이기도 한 두 사람의 현재는 너무도 비참한 몰골이었다. 영광스러운 지위를 지녔던 저들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런 끔찍한 괴물이 되어 나타났단 말인가?
……라고는 해도 뭐, 이제 와서까지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는 딱히 없었다.
“또 세이어가 뭔가 했겠지.”
“그러게.”
“그동안 못 볼 꼴을 좀 많이 봤어야지?”
그동안 보고 겪은 것들이 워낙 기상천외하다 보니 죽은 키린트와 제이드가 합체(?)해서 다시 나타난 것쯤은 호기심조차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서 러스 일행은 쓸데없는 궁금증 따위 깔끔하게 갖다 버리고 현실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저들은 적.
그렇다면 그냥 해치워 버리면 될 일이다.
“크아아아!”
울부짖으며 괴물은 열 개의 손톱을 휘둘렀다. 열 줄기 은청색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흐느적거리며 러스의 눈앞에 쇄도했다.
“하압!”
짧은 기합과 함께 러스는 일루미네이터를 빙글 돌렸다. 단순히 원을 그리는 동작일 뿐이지만 그것이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완벽한 균형을 지닌 검, 일루미네이터를 통해 흘러나오면 눈앞의 모든 것을 흘려 버리는 가공할 검술이 된다.
파아아앗!
열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청색 오러의 파동에 휘감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러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평소라면 흘리기와 동시에 바로 역습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저 괴수가 날리는 공세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크아아!”
다시 포효하며 괴수, 한때 키린트이자 제이드로 불리었던 그것이 재차 블레이드 오러를 쏘아 냈다. 지극히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외침을 터트리면서도, 쇄도하는 공쇄는 그 무엇보다도 세련되었고 이성적이다. 도저히 허점을 파악해 파고들 틈이 없다.
“쳇!”
욕설을 흘리며 러스는 반격을 포기하고 피했다. 그 뒤로 타시드가 달려들었다.
“날벼락 떨구기!”
러스가 물러서는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 덤벼든 것이라 괴물도 미처 반응할 틈이 없었다. 벌써 몇 년이나 대련에 대련을 거듭하며 호흡을 맞춰 온 두 사람이었다. 청록색의 오러가 한 줄기 벼락이 되어 괴물의 머리 위로 내리쳐졌다.
그러나 이 자리엔 저 괴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아아!”
노래하며 천사들이 창을 던져 왔다.
드르르륵!
사방을 포위한 골렘들이 연달아 마탄을 쏘아 댔다.
마력이 깃든 투창과 이글거리는 마탄이 참마도, 다카르를 내리치는 타시드를 정확히 노린다. 순간 타시드는 두 개의 현실을 보았다.
자신의 다카르가 괴물의 머리통을 쪼개고, 그 대가로 마탄과 투창에 꿰뚫려 피 흘리며 물러나는 자신.
다카르를 거두고 방어로 돌아서며, 마탄과 투창을 걷어 낸 뒤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서는 자신.
타시드는 후자를 택했다. 그의 애병, 다카르가 궤도를 바꾸어 방어 스타일로 돌아선다. 이미 모든 공격 궤적을 알고 있는 만큼 수십 발의 공세라도 일일이 막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콰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마탄과 투창의 비가 모조리 빗나가 굉음을 낳았다. 괴물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타시드가 혀를 찼다.
“젠장, 골치 아프네.”
골렘들에게 연달아 엘리멘트를 쏘아 대던 시리스가 잠시 기회를 잡았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몸을 뺀 뒤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두 자루 시미터를 교차해 날린다.
“엘리멘틱 스피어!”
정령합신을 통해 증폭된 마력과 엘리멘트를 합일, 진철 아다만티움조차 꿰뚫는 일격이 괴물의 뒷통수를 노렸다. 러스에게 모든 공격을 집중하고 있던 괴물 속의 키린트 입장에선 그야말로 허를 찔린 일격이었다.
하지만 괴물 속의 제이드에겐 뻔히 보이는 공격이기도 했다.
“재로 만들어 주마, 천한 엘프 년! 플레임 퍼니시먼트!”
괴물의 목 뒤가 갈라지며 흉악한 이빨이 드러났다. 쩍 벌린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멘틱 스피어로 뚫지 못할 정도의 공격은 아니지만, 그 경우 시리스 자신도 저 불길에 휩싸이게 될 터다. 그녀가 신고 있는 부츠를 가동시켰다.
“블링크!”
시리스가 허공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길의 강이 메웠다. 어느새 석실 반대편에 나타난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가리가 두 개니 심리적 허점을 노리는 수법 자체가 안 먹히네.’
마음 같아선 다시 한 번 공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시리스는 일단 물러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다른 천사와 골렘 무리가 그녀를 향한 공격을 재개한 것이다.
드르르르륵!
골렘의 마탄을 피해 연신 마법을 날리며, 그 와중에 천사들의 투창도 피해가며, 또 간간히 날아오는 제이드의 마법에도 신경 써 가며 시리스는 연신 블링크로 공간 여기저기를 번쩍번쩍 이동했다. 그리고 치를 떨었다.
‘아우! 골치 아파!’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아니 난전이었다.
천사와 골렘들은 착실히 대열을 갖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그 공세의 중심에 괴물이 있다. 키린트와 제이드가 융합되어 인간도 뭣도 아닌 끔찍한 괴물로 재탄생한 존재, 멋대로 날뛸 뿐인 저 괴물은 러스와 타시드, 시리스와 아틸카 할 거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 공격을 해 대고 있었다. 문제는 과녁을 정하는 게 마구잡이였을 뿐 공격 자체는 세련된 오러와 고도의 마법이었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천사와 골렘들이 저 괴물의 엉망진창인 움직임에도 철저히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다.
괴물의 공격에 대비하다 보면 천사가 뒤에서 습격을 하고, 그걸 감당하고 반격하려 하면 어느새 골렘의 마탄이 측면을 치고 들어온다. 정신없이 일루미네이터를 휘두르며 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도저히 허공검을 쓸 틈이 없는데…….’
타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공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순차적으로 사라진다. 연달아 파상공격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도저히 강력한 일격을 날릴 틈이 없다. 전투 예지를 발동해 허점을 찾아보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몇 초 앞의 미래를 미리 보아도…….
‘내가 처맞는 미래밖에 없잖아! 아오! 이걸 어쩌라고!’
점점 수세로 몰리는 러스 일행을 향해 괴물이 통쾌한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 ☆ ☆
“잘한다! 레어폴!”
영상을 보며 세렐라인은 신바람을 냈다. 키린트와 제이드가 합쳐진 저 괴물은 분명 강력했지만, 이토록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천사와 골렘 무리가 저 괴물을 철저히 백업하기 때문이다. 지금 레어폴은 전혀 통제가 안 되는 괴물의 움직임에 맞춰서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격 진영을 계속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퀸 하나가 멋대로 움직이는 체스판에서, 그때마다 모든 말의 움직임을 유동적으로 맞춰 가며 체스를 두고 있달까?
“대단해. 이런 건 아마 레어폴밖에 못할 거야.”
세렐라인의 칭찬에도 레어폴은 그리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영상을 보며 더더욱 안색을 굳힌 채 연신 손가락을 놀린다.
“음…….”
문득 레어폴이 신음을 흘렸다. 세렐라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왜 그래, 레어폴?”
레어폴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단하군. 트롤…….”
대신 더더욱 손동작을 빨리하며 감탄사를 흘릴 뿐이었다.
“이걸 대응한단 말인가? 듣던 것 이상으로 현명한 자로군.”
☆ ☆ ☆
정신없이 사방의 공격을 막고, 또 피하던 중이었다. 문득 러스는 깨달았다.
‘어째 좀 편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타시드와 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분 탓인가?”
“공세가 좀 뜸해진 거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로 들어오는 공격의 수가 줄었다. 물론 괴물이 아까보다 공격을 덜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키린트-제이드는 여전히 광기에 휩싸여 러스 일행을 노리고 있었다.
“죽어라! 러스!”
“죽어라! 엘프 년!”
키린트와 제이드가 저마다 원한 섞인 외침을 토하며 오러와 마법을 날린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거구로 연신 몸을 날려 공세를 퍼붓고 또 퍼붓는다. 그러나 다들 용케도 공세를 피하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천사와 골렘의 공세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혈정광폭화를 건 채 전장을 누비는 아틸카의 활약 덕분이었다.
“한 줄기 낙수가 바위를 꿰뚫는도다!”
관통력을 담은 주술의 빛이 골렘들 사이로 길게 뻗어 갔다. 그 공격 자체에 피해 입은 적은 많지 않았다. 천사 두 개체, 그리고 골렘 1기가 휘말려 부상과 파손을 입은 정도였다. 저 정도의 주술력을 구사하고 이 결과라면, 솔직히 아틸카가 손해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틸카의 일격은 절묘하게, 적절한 타이밍으로 천사와 골렘의 흐름을 끊었다. 막 괴물의 배후로 돌아가 러스와 시리스에게 마탄을 날리려던 골렘들의 발이 묶였고, 타시드를 향해 창을 던지려던 천사들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연달아 손가락을 튀기며 아틸카가 소리쳤다.
“이것들은 내가 맡겠네! 그대들은 저 괴물에게만 집중하시게!”
충격파가 연신 전장을 가로지른다. 그때마다 천사와 골렘의 움직임이 방해받는다. 한 방, 한 방이 적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적이 움직이는 공간, 상대를 공격하려는 타이밍을 가로막는 것이다.
영상을 통해 천사와 골렘을 조작하고 있던 레어폴이 혀를 내둘렀다.
“혈신 아틸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나?”
보고 있던 세렐라인이 눈을 깜빡였다.
“뭔데? 뭘 하고 있는 건데?”
“지금 저 트롤은…….”
레어폴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파악해 먼저 선수를 치고 있는 겁니다.”
현재 레어폴은 멋대로 날뛰는 괴물의 움직임에 맞춰 천사와 골렘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즉, 괴물의 움직임을 보면 레어폴이 어떤 식으로 천사와 골렘들을 조작할지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레어폴이 혀를 찼다.
“거참, 오래 살다 보니 트롤과 수 싸움을 하는 일이 다 생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