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11
“아케인 스파이럴 가드!”
필레나의 공격을 방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밀려오는 어둠의 힘마다 뚜렷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흔들림 따윈 전혀 없는 확고한 살기, 그와 달리 상대를 죽이는 데 한 치의 고민조차도 없는 살기다.
‘끙,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가?’
레펜하르트에게 필레나와의 추억은 마탑에서 살아온 세월의 거의 전부다. 십몇 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그는 필레나와 함께 있었다.
반면 지금의 필레나에게 레펜하르트와의 추억은 고작해야 3, 4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이후는 모조리 테스론과 지냈다. 그녀 입장에선 진짜 어린 시절, 한때의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레펜하르트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겠나?
‘나도 딱히 필레나를 신경 쓰고 살진 않았고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전생의 자신에게 필레나가 정말 의미 있는 존재였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이 먹고는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그러니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도 딱히 필레나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지만…….
“어둠이여, 일어나라! 그대의 여왕에게 복종하라!”
필레나의 손짓에 따라 바닥에서 검은 형체가 솟아올라 인간의 형태를 취한다. 검은 형체가 저마다 손발을 휘저으며 레펜하르트를 압박해 간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탄을 날리며 레펜하르트도 반격했다. 동시에 정신을 집중해 필레나를 둘러싼 검은 영기를 관찰한다. 상대의 흑마법 메커니즘을 파악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끙!”
그런데 심란해서 영 집중이 되질 않는다. 미련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필레나는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그나마 친구라고 불릴 만한 존재다. 워낙 성격이 성격인지라 원체 친구가 없기도 했고…….
‘……라기보단, 전생의 내가 친구가 있긴 있었나?’
문득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생을 아무리 되새겨 봐도, 어째 인간과 친하게 지낸 기억은 거의 없다. 이종족들, 사천왕이라 불리던 시리스나 타시드, 마켈린과 아틸카도 친구라기보다는 소중한 연인이나 부하 쪽의 관계다. 잘 생각해 보니 정말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는 필레나 정도밖에 없는 것 같다?
‘헉? 나 진짜 친구 없었네?’
게다가 친구가 동등한 존재를 의미한다면, 현생의 지금도 딱히 친구라 할 만한 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왕따라니, 낯가림 심하니 하며 구박했던 러스조차도 전생엔 테스론이 있었고, 지금은 타시드와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이럴 수가! 나 사실은 러스 녀석보다도 사회성 없는 놈이었나?’
엉뚱한 자아 성찰 탓에 레펜하르트는 자괴감에 빠졌다. 덕분에 집중력은 더욱 깨져 자꾸 필레나의 검은 폭풍에 뒤로 밀린다. 보다 못한 실란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 해요, 레펜 씨!”
안 그래도 신성력 퍼붓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레펜하르트 저 작자의 태도가 아까부터 계속 걸린다. 전심전력으로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뭔가 딴생각하는 티가 옆에서 봐도 역력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사과했다.
“미, 미안…….”
필레나를 보며 실란이 말을 이었다.
“상대가 저 여자라서 그런 거예요? 아무리 어릴 적 친구라도 지금은 분명한 적이거든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난 전생이나 현생이나 참 친구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지. 부하나 연인은 있어도.”
오러를 펼쳐 실란에게 가는 압박을 걷어 내며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실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요?”
살짝 눈을 흘기며 레펜하르트를 노려본다.
“그런데 말이죠, 난 딱히 레펜 씨 부하는 아니거든요?”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눈앞의 소년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 시대로 회귀해 또다시 세상에 나설 때부터 함께해 왔던 소년,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신에게 당연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몇 년을 같이 어울려 놓고 뭘 이제 와서 뜬금없이 나는 친구가 적다 타령인 거예요? 나 참.”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핫!”
뜬금없는 그 웃음에 실란은 물론, 필레나조차도 당황해 잠시 멈칫거린다. 덕분에 불어 대던 기류가 가라앉으며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실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또 시작이다. 거, 느닷없이 처웃는 버릇 좀 고쳐요. 그거 되게 이상해 보인다고.”
구박하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왠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농담마저 나올 정도로.
“그래, 실란. 네 말이 옳아. 넌 부하가 아니라 내 연인으로 알려져 있지, 아마?”
“아악! 그런 농담 좀 함부로 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니야 왕비 전하가 계신데도 아직도 그놈의 헛소문이 안 가라앉잖아!”
확실히, 이니야의 존재가 공표된 후 실란에 대한 소문이 조금 변하긴 했다. 권왕 레펜하르트의 ‘연인’에서 ‘애첩’으로.
“크으! 진짜 어서 장가가든가 해야지, 아오!”
실란의 발작을 무시한 채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필레나에게로 향했다. 변모한 레펜하르트의 태도를 경계한 듯, 그녀는 일단 어둠을 거둔 채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 모든 것은 바뀌었지.’
양손을 들고, 제대로 자세를 잡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불괴 불굴의 황금빛 오러가 근육질 육체 위로 찬란히 불타오른다.
레펜하르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원호해 줘, 실란. 저 여인을 처리해야겠다.”
더 이상 그 눈빛에 흔들림은 남아 있지 않았다.
☆ ☆ ☆
고오오오오-!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귀곡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검은 팔다리가 솟구치고 이내 인간의 형체가 되어 암흑을 두른 채 전장을 질주한다.
“가라! 사령인들아!”
필레나의 명에 복종해 어둠의 인형체, 사령인들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싸고 손발을 뻗는데, 그때마다 팔다리며 손톱이 죽죽 늘어나 예리한 칼날로 변한다.
“스파이럴 가드!”
오러의 소용돌이로 어둠의 공세를 갈아 버리며 레펜하르트도 몸을 날렸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 권왕의 육체가 마음껏 날뛰며 사령인들의 전신을 두들겼다. 펀치며 킥이 상대를 타격할 때마다 육중한 굉음이 공간 가득 울렸다.
쾅! 쾅! 콰쾅!
그러나 사령인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러가 실린 일격을 정타로 맞고도 조금 비틀거릴 뿐 결코 흩어지지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거참, 이게 원래 이렇게 강한 마법이 아닌데?”
사령인을 창조하는 흑마법, ‘서먼 데드맨’은 원한령이나 사령에 흑마력을 입혀 물질계로 소환하는 8서클 주문이다. 최강의 흑마법사이기도 했던 전생의 레펜하르트가 이 주문을 쓸 경우, 그는 어지간한 일류 기사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사령인을 소환할 수 있었다.
즉, 마왕이라 불리던 전생의 그조차도 사령인에게 일류 기사 이상의 전투력은 부여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필레나의 사령인은 차원이 달랐다.
고오오오-!
귀곡성과 함께 사령인들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에 공격을 가한다. 팔다리를 놀려 상대의 공세를 걷어 낼 때마다 뻐근한 충격이 느껴진다. 오러로 감싼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에 이 정도 타격이라니? 렐시아만은 못해도 어지간한 수호자급 악마 수준인 것이다. 이 정도면 어둠의 여왕이라는 칭호도 마냥 허세라 할 수 없다.
‘진짜 흑마법만큼은 나보다 훨씬 위로군.’
뭐, 그렇다고 딱히 레펜하르트가 자존심에 상처 입을 이유는 없었다.
흑마법은 마법이면서 마법의 틀에서 벗어난 무언가다. 자연 현상을 다루는 다른 마법과 달리 뒤틀린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모순을 바탕으로 발현된다.
자신이 다루는 어둠의 힘을 그 누구보다 경멸하면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동정하고,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증오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흑마법의 본질.
쉽게 말해서 오락가락하는 감정적인 성격일수록 대성하는 분야랄까? 정신병자 넘쳐 나는 마법사 중에서도 유독 흑마법사가 또라이가 많은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거저 줘도 갖기 싫은 재능이라 하겠다.
‘그런데 필레나가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테스론을 잃고 휙 돌아 버린 게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공세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일어나 오르라! 어둠이여! 흑암의 눈물 앞에 그 불길을 일구어라!”
아스레일과 싸우는 렐시아에게도 끝없이 어둠의 마력을 부여하고, 수많은 사령인들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검은 영기의 폭풍으로 레펜하르트 일행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다행히 상대가 흑마법인 만큼 천적도 명확했다.
“필라넨스시여!”
성표를 치켜들며 실란이 소리 높여 외쳤다.
“빛을 내려 주소서!”
분홍색 성광이 사령인들의 머리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검은 폭풍이 일어나 성광을 가로막았다. 실란이 다시 외쳤다.
“좀 더 내려 주소서!”
검은 영기와 핑크빛 성광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점점 밀리자 실란의 표정도 다급해졌다.
“필라넨스 님! 빛! 빛! 빛!”
빛을 내려 달라는 건지, 빚진 거 갚으라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막 읊어 대는 신성 주문이었다.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여전히 위력 하나는 발군이다. 다시금 성광이 빛을 발하며 사령인들의 위력도 대폭 약해졌다. 렐시아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덕분에 전투는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실란의 원호가 없었다면 아무리 바포메트 슈트를 걸친 아스레일이라도 렐시아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을 테고, 레펜하르트도 마법 없이 오러의 힘만으로 사령인들을 상대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 틈을 타 레펜하르트는 찬찬히 필레나에 대한 탐색을 이어 갔다.
‘확실히 흑마법만큼은 궁극에 다다랐군.’
사령을 조율하는 것도, 어둠의 힘을 제어하는 것도, 세밀하게 흑마력과 영기를 치환해 극도로 효율적인 현세 물리력으로 바꾸는 것 모두 완벽하다. 틀림없이 지금의 필레나는 은의 시대 이후 최강의 흑마법사였다.
‘그런데…… 아무리 흑마력 조물락거리는 데 도통했다 해도 근간이 되는 마력은 필요한 법이잖아?’
사령인들을 정신없이 상대하면서도 차분하게 계산을 잇는다. 필레나가 보이는 위력과, 그녀가 선택한 흑마법의 효율을 역산해 최대한 근사치에 달하는 해답을 내놓는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낮게 쳐줘도 필레나의 현 마력이 거의 왕년 내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현생도 아닌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그야말로 마법의 궁극체나 다름없었다. 그런 레펜하르트가 쉰이 다 되어서야 겨우 그 정도 마력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겨우 서른을 넘보는 필레나의 마력이 그와 맞먹는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세상이 넓다지만 자신과 맞먹는 마법적 재능을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다. 참으로 시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이란 건 레펜하르트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데.
‘필레나가 그 정도로 잘난 애였으면 어렸을 때 내가 몰라봤을 리가 없지.’
확신을 가지고 레펜하르트는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세이어겠지?”
세이어의 신성, 아카식은 곧바로 현세에 부여되지 않는다. 현재의 세이어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동네 주민 A, B, C가 곧바로 초월적인 강자가 되어 나타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예전의 이라나드 공작처럼, 몸 어딘가에 괴기한 아티팩트를 박고 있다는 소리.
“타아아앗!”
레펜하르트가 기합을 터트리며 전신의 오러를 폭발적으로 끌어 올렸다. 황금빛 광풍이 주변의 사령인을 밀어낸다. 사령인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그가 연달아 검은 폭풍을 향해 주먹질, 발길질을 퍼부었다. 황금빛 오러가 검은 영기와 충돌하는 걸 보며 필레나가 무뚝뚝하게 외쳤다.
“소용없다! 그대의 오러는 이 어둠을 뚫지 못할지니!”
“오러는 그렇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레펜하르트가 외침을 이었다.
“파이널 스트라이크 임팩트!”
휘두른 주먹질, 발길질이 그대로 마법의 소매틱이 된다. 그 움직임을 바탕으로 마력이 정해진 술식을 따라 흘러가며 현세에 구현된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가 검은 영기를 향해 연달아 제로 임팩트를 날렸다. 뇌전, 화염, 어둠, 빙설, 항마, 파괴, 광풍의 마법이 제로 임팩트와 합일해 폭풍을 가르며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쾅!
순식간에 검은 장막이 뚫리며 레펜하르트의 신형이 필레나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무심하던 필레나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주먹을 들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아낄 땐 아끼더라도 쓸 땐 화끈하게 써야지!”
그리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A.M.P 쇼크웨이브!”
푸른 파동이 필레나와 사령인, 검은 폭풍 전역을 뒤덮으며 퍼져 나갔다. 모든 아티팩트를 정지시키는 절대적인 권능이 화려한 빛의 꽃을 피웠다.
파아아앗!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
“일어 오르라! 어둠이여!”
필레나가 다시금 손을 들고 검은 영기를 떨쳐 냈다. 파괴의 바람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불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쾅!
순간 숨이 턱 막혀 온다. 쿨럭거리며 레펜하르트가 피를 토했다. 방심하다 아주 제대로 맞은 것이다. 고통 속에서 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분명 A.M.P 쇼크웨이브가 제대로 발동됐는데?’
자신이 마법을 실수했을 리는 없다. 아예 발동을 못하면 모를까, 할 수 있는 마법을 실수로 실패하는 일 따윈 희대의 천재인 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A.M.P 쇼크웨이브는 제대로 그 위력을 보였다. 필레나 뒤에서 대기 중이던, 아다만드릴 슈트를 걸친 R.X 시리즈가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으니까.
털썩! 털썩!
그 모습을 보며 필레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리고 고개 돌려 레펜하르트를 노려본다.
“……착각이다, 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