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24
터널 끝은 거대한 전당이었다.
커다란 기둥이 무수히 들어서 천장을 받친다. 벽마다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천장마다 휘황찬란한 마력등이 촘촘히 박혀 내부를 밝힌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스레일이 중얼거렸다.
“마치 왕궁의 알현장 같군요.”
“스케일이 무지막지하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지.”
카를의 말대로, 전당은 높이가 40여 미터에 직경은 200여 미터가 넘었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건물 6층 높이에 달한다. 질릴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레펜하르트 일행은 시큰둥했다.
그간 격납고니 실험실이니 연구소니 하는 식으로 이 정도 거대한 공간은 질리게 본 것이다. 이제 와서 딱히 사이즈에 감탄할 시기는 지났다.
마켈린이 호기롭게 외쳤다.
“흥! 그랜드 포지 중앙 광장도 이 정도는 됐거든? 이제 와 놀랄 것도 없다!”
“그나저나…….”
문득 레펜하르트가 카를과 아스레일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싸울 수 있겠나?”
두 사람이 가진 고대 무구, 엘드릴 기간투스와 바포메트 슈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곳에서 벌인 사투 덕분에 저 강력한 고대 아티팩트들은 이미 걸레짝이 되었다. 다른 일행들이야 아무리 상처 입어도 아틸카 좀 갈아 마시면(?) 낫겠지만 아티팩트는 그렇게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워낙 여기저기 부서져서 언제 기동 정지될지 모를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생각은 없다.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다른 사람 발목 잡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스레일도 카를도 투지를 불태웠다. 그야말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뭐, 레펜하르트는 전혀 감명받은 기색이 아니었지만.
“발목이란 게 잡히기 싫다고 안 잡히나? 그냥 힘없으면 잡히는 거지.”
투덜대며 레펜하르트가 두 사람의 갑옷에 마력 감지를 걸었다. 반파된 엘드릴 기간투스와 바포메트 슈트에 마력을 흘려 상태를 살핀다.
‘많이 부서지긴 부서졌네. 비상 전투 모드로 들어갔잖아?’
마력과 오러 증폭력은 극히 낮아지고, 아티팩트에 내장된 출력 대부분이 사용자의 생명 보호를 위해 방어 쪽에 집중되어 있다. 방어력은 원래의 80퍼센트 정도, 공격력은 20퍼센트 이하로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래도 방패 노릇은 할 수 있겠군.”
어차피 이들에게 바란 건 공격력이 아니라 적의 공격을 대신 맞아 줄 방패 역할일 뿐이었다. 공격력을 바랐다면 스탈라나 다른 오러 유저들을 굳이 돌려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죽어도 원망 말게.”
레펜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졌다. 아스레일이 기뻐하며 외쳤다.
“안타레스를 위해서라면 웃으며 죽을 수 있습니다!”
카를도 함께 웃었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지면 원망할 겁니다. 그러니 꼭 이기십시오.”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전당 내부를 계속 이동했다.
이윽고 저 멀리, 전당 끝자락에 위치한 커다란 왕좌가 보였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얼키설키 얽혀 수많은 파이프라인과 연결된 강철의 왕좌에 푸른 머리칼의 한 사내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의 신, 세이어였다.
☆ ☆ ☆
세이어 템플 언더그라운드의 심장부, 은의 전당.
지상 최대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이 거대한 홀 안에 한 무리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모인, 모두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결코 부서지지 않는다는 강철의 육체를 지닌, 짐 언브레이커블의 당대 계승자이자 세계를 한 번 파멸시킬 뻔한 전설의 마왕 레펜하르트.
한 자루 검으로 영혼조차 얼려 버린다는 엘프 최강의 검사, 눈의 여왕 이니야.
불사의 육체, 무한한 자연의 힘을 다루는 트롤 주술사, 혈신 아틸카.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필라넨스의 신관, 실란 필 마르시스.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일일이 짚어 주기엔 숫자가 좀 많구먼.’
일행을 둘러보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무려 아홉 명, 전생 때 알렉스 일행의 거의 두 배다. 정말이지 용케 아무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싶을 정도다.
‘카를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어쨌거나 기분이 묘하다. 운명의 재귀再歸가 느껴지는 상황이랄까?
전생의 마왕 레펜하르트는 반대편 위치에 서서 대륙의 강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자신과 함께한다. 검성 사이러스는 배신의 기사 러스가 되었고 테스론은 자신의 육체가 되었다. 엘린은 사라지고 그의 아비였던 실란이 이 자리에 있다. 물론 빛의 마도사 제이드는 없지만…….
‘그런 놈 따윈 필요 없고.’
전생의 사천왕 역시 건재하다. 시리스, 아틸카, 마켈린, 타시드. 관계가 조금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든든한 동료로 이 자리까지 함께 왔다.
현생의 새로운 인연도 생겼다. 이니야, 카를, 아스레일.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동료들이었다.
‘실로 많은 것이 바뀌었어.’
아니, 어쩌면 그리 변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레펜하르트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저들은 여전히 전생의 행보를 걸어, 전생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정말 변한 것은 내 자신이겠지.’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내디디면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다.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레펜하르트는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인류의 신, 세이어.
그는 다리를 꼰 채 턱을 괸 오만한 자세로 일행을 오시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식 드라이브의 침묵으로 인해 신성과의 연결이 끊어졌을 텐데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세이어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잘도 왔구나, 인간의 마법사여.”
레펜하르트가 대꾸했다.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세이어.”
실은 필레나 때문에 죽을 뻔했었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싸우기도 전에 기세에서 밀리고 들어갈 수는 없다.
문득 세이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습이 많이 변했군?”
확실히, 더 이상 레펜하르트는 예전 테스론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는 완연히 검은빛을 띠는 흑갈색 머리칼 아래 차분한 검은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우락부락한 인상 대신 선이 굵으면서도 이지적인 인상이 안면 가득 담겨 있다. 권왕의 육체 위로 지고의 마법사였던 마왕의 모습이 겹쳐진다.
레펜하르트도 비슷한 표정으로 세이어를 바라보았다.
“그거, 내 육체가 아닌 것 같은데.”
전생의 육체와 얼굴은 같지만, 지금 세이어의 머리칼은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적어도 인간에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색상이다. 귀도 짧고 뾰족하다. 세이어의 원 종족이었던 선주 종족의 육체인 것이다.
게다가 몸도 달라졌다. 빼빼 마른 마법사의 육체가 아니라 어깨도 넓고 전신이 알차게 단련되어 보인다.
“그대의 육체는 자격 있는 자가 거두어 갔다. 원래 육신이 아쉬운가?”
“전혀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와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
“그렇군.”
마치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듯한 담담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말투뿐, 단상과 홀 사이에서 점점 짙은 살기가 회오리치며 커져만 간다.
“솔직히 말하겠다, 인간의 마법사여.”
갑자기 세이어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감탄하고 있노라.”
일행의 안색이 굳었다. 인류의 신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참으로 훌륭히 내 힘을 묶었구나.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세이어가 강철의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의 백색 로브 대신, 제국 특유의 귀족적인 복식 위에 새하얀 긴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분명 천인데도 금속처럼 표면이 반짝이며 메탈릭한 빛을 낸다.
“그래서 더더욱 묻고 싶구나.”
세이어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믿고 있는 것이냐?”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방대한 마력이 넘실거리며 이 넓은 은의 전당을 가득 메운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힘이 일행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른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 신을 해할 수 있다고?”
가공할 영기의 압박에 모두가 치를 떨었다.
“큭!”
“젠장, 뭔 기세가 이리…….”
역시 상대는 인류의 신이다. 비록 신성이 없다 해도 그저 마법의 힘만으로도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존재!
그러나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세상을 멸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 정도는 전생의 나도 가능했거든?’
지금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저 준비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이지.
그래서 그는 신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이다, 세이어.”
근육질의 양어깨에서 황금빛 오러와 보랏빛 영기가 흘러나왔다. 다른 일행들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반파된 갑옷을 걸친 채 아스레일과 카를이 앞으로 나섰다. 이니야와 러스, 타시드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태세로 무릎을 살짝 낮췄다. 시리스와 아틸카가 좌우로 이동하고 마켈린과 실란이 후방으로 빠지며 성표를 꺼내 들었다.
주먹을 들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뇌까렸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내겠다!”
긴장된 공기가 사방에 퍼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세이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대의 뜻인가?”
인류의 신이 가볍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 오너라, 신에게 대적해 그 뜻을 펼쳐 보아라.”
3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미리 준비해 둔 마법을 발동시키며 강대한 언령을 토한다.
“A.M.P 쇼크웨이브!”
부채꼴 모양의 푸른 파동이 세이어를 덮치며 퍼져 갔다. 개량한 국지형 A.M.P 쇼크웨이브였다. 함부로 마력을 낭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시리스며 카를, 아스레일처럼 아티팩트를 지닌 아군이 있으니 오리지널 광역 A.M.P 쇼크웨이브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만큼 세이어에게도 충분히 피할 여력이 있었지만…….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세이어는 푸른 파동을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비웃었다.
“애꿎은 마력만 낭비했구나, 인간의 마법사여. 지금의 나는 도구의 힘 따위는 빌리지 않노라.”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마법은 그냥 불빛과 전혀 다를 게 없다. 당연히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개량해 필요 마력을 줄였다 해도 10서클은 10서클, 마력 소모는 상당히 크다. 그러니 굳이 레펜하르트의 마법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알아서 제 힘 깎겠다는데 말려 무엇하리?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뒤로 물러났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모험을 할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건 그렇군,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게냐?”
레펜하르트와 교차하며 러스와 타시드가 몸을 날렸다.
“타아앗!”
“간다앗!”
명령이 채 떨어지기 전에, 둘은 세이어의 좌우로 빠르게 돌진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들은 최종전을 대비해 수없이 손발을 맞추며 전술을 연습해 왔다. 세이어를 상대로 실전도 한번 겪어 보았다. 굳이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굉천월광!”
“벼락 떨구기!”
푸른색과 청록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검광을 번뜩였다. 이니야와 시리스도 바로 뒤를 따랐다.
“동토의 칼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