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29
버둥대는 아틸카를 향해 세이어가 시동 언령을 내뱉었다.
“블러드 컨트롤.”
아틸카의 전신 상처를 통해 수많은 핏줄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원래 트롤의 재생력은 그 피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파아아아앗…….
엄청난 양의 혈액이 허공으로 솟구쳐 그대로 불타올랐다. 혈액을 빼앗긴 아틸카의 푸른 피부가 점점 발갛게 변했다. 근육질 거구가 점점 쪼그라들며 눈동자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으, 으으으…….”
“저런? 피를 더 뽑으면 죽겠군.”
세이어가 마법을 멈추고 그를 멀리 던졌다. 탈진 상태가 된 아틸카가 맥없이 날아가 기둥에 부딪친 뒤 바닥을 나뒹굴었다.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바로 고개를 꺾는다. 너무 많은 피를 잃은 것이다.
“저 자식…….”
쓰러진 채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아틸카를 보니 확실해졌다.
‘세이어, 저자는 일부러 우릴 죽이지 않고 있어!’
아틸카뿐 아니라, 쓰러진 동료 중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전투 불능이 되었을 뿐이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다고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애초에 세이어가 세밀하게 위력을 조정했다는 의미다.
분노로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우릴 가지고 노는 거냐!”
“내게 그런 악취미는 없노라.”
세이어는 그런 이유로 이들을 살려 둔 것이 아니었다.
“그대는 세상을 너무도 망쳐 놓았다. 이를 되돌리는 것은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겠더구나.”
시공융합포, 니르바나로 대륙의 절반을 날리고 모든 이종족의 씨를 말릴 준비를 하고 있는 세이어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인류의 기억까지 날릴 수는 없다.
인류의 인식은 이미 바뀌어 버렸다. 대륙의 반이 사라진다 해도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이종족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인류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하려 함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그대들이 두려워하던 존재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위대한 신의 위엄 앞에선 그 무엇도 하찮을 뿐이라고.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레펜하르트의 동료, 안타레스의 중추들인 것이다.
“나의 종들에게 넘기면 알아서 잘할 테지.”
모든 힘을 잃고 몰락한 이종족의 우두머리들을 전시하는 것, 짐승이나 다름없는 몰골이 된 비참한 이단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 인류의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것, 이는 세이어 교단이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일이다.
“그게 악취미란 거다!”
기가 차 레펜하르트는 악을 썼다. 세이어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대들을 희롱하는 것은 약자를 괴롭히는 감정적 통쾌함 외엔 전혀 이득이 없다. 그러나 나의 교단에 넘긴다면 인류를 깨우치는 데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크으…….”
레펜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순 없다. 재차 전투에 임하는 그를 보며 세이어가 문득 실소했다.
“재미있구나.”
그는 테스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끝까지 남은 이는 권왕뿐이라는 것이.”
마왕 레펜하르트를 상대로 끝까지 남은 이는 권왕 테스론이었다. 비록 테스론은 사라졌지만 그의 육체는 여전히 남아 이 자리에 홀로 버티고 서 있다. 역시 운명은 돌고 도는 것인가?
“하지만 아쉽게도 난 그대가 아니지.”
당시의 레펜하르트는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테스론의 마지막 일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이어는 그렇지 않다. 비록 레펜하르트의 동료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한 마력과 오러를 소모하긴 했지만 여전히 여유가 남아 있다.
세이어가 손을 들어 레펜하르트를 가리켰다.
“염려치 마라, 인간의 마법사여. 그대는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자는 살려 둘 생각이 없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너무 위험하다. 확실하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 육체는 소멸될 것이며, 그 영혼은 내게 깃들 것이다. 그대의 지식과 지혜는 신의 양분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리라.”
레펜하르트가 애써 투지를 일깨웠다.
“누가 그렇게 되게 놔둔다더냐!”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지? 고집스러운 투지와 별개로, 가슴 한쪽에선 절망이 내려앉고 있었다.
세이어가 새로 손에 넣은 힘은 단순한 오러가 아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과 맞먹는 불굴의 신체야말로 그의 진정한 힘이다. 단지 그뿐이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겠지만 저 육체에 세이어의 방대한 마력이 뒷받침되면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 된다.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날아오르며 세이어가 손을 내리쳤다.
“쓰러져라.”
마법과 오러가 뒤섞여 레펜하르트를 난타했다. 이를 갈며 그도 마주 주먹을 내뻗었다.
“웃기지 마라!”
한차례의 격돌 후 레펜하르트는 또다시 피를 흘리며 날려 갔다.
“커어억!”
역시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정면 대결론 승산이 없었다. 공격도 방어도, 그 사이의 전환과 연계도 완벽했다. 차라리 예전처럼 10서클 마법이라도 구사하면 어떻게든 빈틈을 파고들어 보겠는데 이미 한번 당한 후라 그런지 세이어는 철저히 안전한 마법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굳이 10서클을 쓰지 않고 압도적인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것이다.
‘제길, 방법이 없어…….’
쓰러진 레펜하르트 위로 세이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피투성이의 가슴팍을 발로 짓밟으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벌레처럼 짓밟아 주마.”
“으윽…….”
신음하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겉보기엔 그저 세이어가 밟고 있는 걸로만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압박이 육체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덩치가 워낙 커서 밟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하하하.”
웃으며 세이어가 마무리를 하려던 찰나.
“임페리얼 버스…… 음?”
갑자기 세이어가 오른팔을 들어 마력장을 펼쳤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황금빛 유성이 세이어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콰쾅!
유성이 마력장과 충돌했다. 무지막지한 빛의 파문이 퍼져 나와 은의 전당을 뒤덮었다. 요란한 폭발과 함께 공기가 찢어지며 뇌성이 울렸다.
쩌어엉!
그 덕에 세이어의 압박이 사라졌다. 허겁지겁 레펜하르트가 몸을 빼내 뒤로 피했다.
‘사, 살았다!’
유성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2.5미터의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공중제비를 넘으며 바닥에 안착한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듯한―그리고 실제로도 안 들어가는― 두꺼운 근육질 육체 위로 새하얀 수염과 백발이 휘날린다.
“미안하다, 제자야. 조금 늦었다.”
거구의 노인을 바라보며 세이어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 그대가 있었지?”
레펜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사부?”
☆ ☆ ☆
헝클어진 백발, 떡 벌어진 어깨 아래 우람한 등이 드러난다. 전신 곳곳에는 피가 묻어 있다. 여기저기 찢긴 자상도 보인다. 바지자락도 여기저기 찢어져 볼품없이 나부낀다. 검성 바나텔과의 사투로 인한 흔적이었다.
그럼에도 권황 제라드는 철탑처럼 굳건히 대지를 디디고 서 있었다. 흔들림 없는 거악 같은 기세가 거구의 노인으로부터 강렬히 흘러나온다.
레펜하르트가 놀라 물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사부?”
사실 그는 이 자리에 제라드가 나타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바나텔과 제라드의 실력은 필적하니, 설사 제라드가 이긴다 해도 전력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아하니 멀쩡한 것 같다. 꽤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제라드가 씨익 웃었다.
“그 포션 되게 좋더구나, 제자야.”
아틸카를 갈아 마신 것은 레펜하르트 일행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바나텔을 쓰러뜨리셨습니까?”
“운이 좋았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한 번 더 붙는다면 어찌 될진 나도 모르겠구나, 허허허.”
너털웃음을 흘리던 제라드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그 친구에게 더 이상 그럴 기회는 없지만.”
평생의 호적수를 물리친 것치곤 그리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묘하게 허탈한 느낌도 든다. 상대의 죽음을 순수하게 기뻐할 만큼 그와 바나텔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라드는 이내 표정을 폈다.
“뭐, 그건 그거고…….”
도로 ‘짐 언브레이커블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이글거리는 시선을 세이어에게 보낸다.
“오랜만이다? 인류의 신인가 뭔가.”
불경한 말투지만 세이어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무감각한 눈으로 제라드를 응시한다.
“죄 많은 자의 후예여, 결국 그대도 이 자리에 도달했구나.”
갑자기 제라드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이 녀석, 제법 사람 됐네?”
놀란 레펜하르트가 제라드를 바라보았다. 설마 기감만으로 세이어와 아카식 드라이브의 관계를 알아챈 건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에 그런 효용도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사부도 세이어의 신성 단절을 느끼실 수 있으십니까?”
“응? 그게 뭔 소리냐?”
“예? 지금 사람 됐다고…….”
여전히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무문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인류의 신과 아카식의 관계’ 같은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예전엔 말라비틀어진 개가죽 쪼가리였는데 이젠 얼추 사내다운 티가 나잖냐?”
제라드는 그저 현 세이어의 ‘꽤나 탄탄한 육체’를 두고 한 말일 뿐이었다. 상식적으론 과대평가라고 해야 옳겠지만,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에선 과소평가가 맞다.
“…….”
기가 막혀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한번 짐 언브레이커블은 영원히 짐 언브레이커블인 모양이다.
‘저기, 그 말라비틀어진 개가죽 쪼가리가 원래는 제 몸이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제라드의 등장은 궁지에 몰린 레펜하르트에겐 실로 반가운 일이었다.
제라드의 합류는 단순히 믿음직한 전력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다. 물론 단순한 무력 비교로만 보면, 레펜하르트 일행이 모두 덤벼도 상대가 안 되었는데 제라드 한 명 가세했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다. 아무리 제라드가 강하다 해도 일행 전원을 합친 것만큼 강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세이어와의 상성이 나쁘지 않지.’
짐 언브레이커블의 전법은 언제나 정면 돌파.
다른 이들에겐 오러를 손에 넣은 세이어가 ‘약점 없는 완벽한 상태’겠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에겐 그저 상대가 ‘좀 더’ 강해졌을 뿐이다. 지금의 세이어가 상대라면 제라드가 오히려 더 강력한 아군이다!
‘……좋아, 조금이지만 가능성이 생겼어.’
반색하며 레펜하르트는 사부를 바라보았다. 은의 전당 내부를 힐끔거리던 제라드가 혀를 찼다.
“쯧쯧, 다들 뻗었네?”
“예.”
“독한 놈, 본보기로 삼을 셈이로구나.”
보자마자 제라드는 바로 상황을 알아챘다. 비록 세계의 진리나 고대의 지혜, 마법적 지식 따윈 전무한 그였지만 대신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이 있다. 온갖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본 제라드에게 세이어의 의도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 성격 한번 개 같은 놈이로고.”
연이은 제라드의 폭언에 결국 세이어의 무심이 깨졌다. 문득 발켄슈트가 떠올랐다. 그놈도 참 세이어 속 긁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진짜 대단한 점은 대대로 신의 비위를 거스르는 데 특화되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말이지 더러운 입담은 그놈이랑 똑같구나.”
분노한 세이어가 제라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은 오러와 마력의 영기가 회오리쳤다.
“네놈만큼은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제라드도 전신의 오러를 발현시켰다. 순수하리만치 선명한 황금의 오러가 전당 내부를 밝혔다. 여전히 굳건하고, 여전히 흔들림 없는 초월적인 빛이었다.
“그래, 그동안 바나텔 때문에 통 네놈이랑 제대로 붙어 보질 못했지?”
살기 어린 긴장감이 둘 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져 갔다.
그것이 정점에 다다른 순간.
“이번에야말로 조져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