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537
“괜찮아, 난 지금도 만족해. 테스론.”
부귀영화 따윈 원치 않는다. 매일 배를 곯고 더러운 길바닥에서 자도 괜찮다. 그녀는 이미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지금은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즐겁다.
“에헤헤…….”
마침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소중한 이를 보며 필레나는 그저 웃었다.
☆ ☆ ☆
한때 바실리 왕국과 안타레스 공국을 가르던 국경 지대, 재쿼드 평원은 이제 영토 변경으로 인해 안타레스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구舊 엘드릴 가드가 위치했던 테르마니아 관도와 협곡 사이에 커다란 도시가 세워졌다.
대륙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바슈탈론의 수도, 엠퍼러란드보다도 더욱 장대하고 아름다운 도시.
안타레스 제국 황도, 레펜하임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내건 종전 협정 후, 2년 만에 바슈탈론 제국은 왕국으로 격하되었다. 제국에 칭제의 권위를 안긴 것이 세이어 교단인데 그 교단이 몰락했으니 제국도 더 이상 명분이 없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다.
필라넨스의 권위하에 안타레스 공왕 레펜하르트가 칭제를 선포했으니 그는 황제 레펜하르트 1세가 되었다. 안타레스 역시 부서진 아라난 그라드 대신 더욱 웅장한 제국의 수도, ‘레펜하르트의 도시’ 레펜하임을 건설하고 수월하게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레펜하르트는 끝까지 아라난 그라드란 이름을 고집했지만 이번엔 카를의 결사반대에 가로막혔다. 공국 시절이면 모를까, 제국 수도라면 무조건 건국 황제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레펜하임 갑시다! 레펜하임!
-싫소! 부끄럽단 말이오!
-자기 성은 안타레스의 지배자라고 지어 놓은 양반이 이제 와서 뭐가 부끄럽다는 겁니까?
-그,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그건 그냥 각오하겠다는 의미고…….
-안 달라요. 똑같습니다. 제발 좀 그 이상한 감각 버리시라니까요?
-기분상의 문제야!
-제가 여기까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폐하께서 전에 말씀 안 하셨습니까? 앞으론 제가 뭐라고 하건 토 안 달겠다고?
-앗, 치사하게 그때 이야기를 지금 꺼내다니.
……결국 카를의 뜻이 관철되었다.
그렇게 안타레스 제국이 건국된 지 5년째.
황도 레펜하임의 중심에 위치한 황궁 가이라크에서 웅장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황궁의 심장부, 심연의 전당.
거대한 홀 상단의 화려한 옥좌 앞에서 시종장이 큰 소리로 외친다.
“엘븐하임의 군주, 엘프와 정령의 수호자, 세계수의 관리자, 엘븐 포레스트의 영주, 엘프 여왕 시리스 발렌시아이십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갈색 피부의 백금발 엘프 소녀가 중앙 홀로 들어선다. 그 뒤를 백색 관복을 걸친 한 무리의 엘프 남녀가 따라온다. 안타레스 제국 자치령, 엘븐하임의 엘프들이었다.
안타레스 제국이 설립된 지도 어언 5년, 스펠라트 사막은 세계수 니힐렌의 힘으로 초목이 무성한 푸른 대지로 재탄생했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고대의 엘프 왕국이 재건되었고, 이는 안타레스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시리스 여왕을 필두로 엘프들은 충실히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시종장의 외침이 이어진다.
“그랜드해머의 지도자, 드워프와 대지의 수호자, 알 포트의 지상 대행자, 마켈린 포트 해머라인 교황 성하이십니다!”
전쟁이 끝난 후 드워프들은 부서진 그랜드 포지를 재건했다. 다른 종족의 도움을 받아 마켈린의 지도하에 힘을 합치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웅장한 지저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그랜드해머라 명명되었고, 동시에 그 명칭은 안타레스 제국 휘하 드워프 자치령의 이름이 되었다.
“자연의 추구자, 트롤의 대표자, 대수해大樹海의 인도자, 대大구루 아틸카이십니다!”
다른 종족들이 정치 체제를 갖추고 왕국을 건설하는 반면, 트롤들은 여전히 부족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과의 연계를 위해서 어느 정도 정부의 형태를 지닌 체제는 필요했다. 그래서 트로리아드와 대수해 플룬탄pluntan에서 존경받는 여러 트롤 구루들이 아틸카와 함께 대표 의회 형태로 일하고 있었다.
“오크라트의 제왕, 페틀랜드의 패자覇者, 검과 오크의 지배자, 칼켄의 검을 이은 자! 오크 대족장 다이카루가 타시드이십니다!”
오크라트를 재건한 뒤 모든 오크들은 타시드를 중심으로 힘을 합쳤다. 드넓은 페틀랜드에 안타레스 오크 자치령을 건설하고 열심히 조상의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엘프, 드워프, 트롤, 오크.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뭉친 네 종족은 제국 건설 후 저마다 자치적인 정치 체제를 갖췄다. 인간의 영역은 황제 직할령이 되었으니, 다섯 종족이 자율적으로 살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계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시종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칭호가 길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이번엔 꽤 간략했다.
“안타레스의 군주, 우리들의 황제, 레펜하르트 1세…….”
잠깐 목을 가다듬은 후 시종장이 외침을 잇는다.
“……의 대리자, 카를 재상이십니다!”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드리우는 검은 수염에 건장한 체구, 누가 봐도 무식한 장수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대륙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 불리는 안타레스 제국의 재상, 카를이었다.
카를이 모인 이들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반갑습니다. 위대한 안타레스의 동맹들이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모인 이들이 살짝 목례한다. 동시에 시리스와 마켈린, 아틸카와 타시드가 카를과 눈빛을 교환했다.
‘레펜하르트 님은 올해도 안 나와요?’
‘아주 그냥 업무에서 손 놨네?’
‘작년에도 못 뵌 것 같은데…….’
‘황제가 너무한 거 아니유?’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행사는 시작되었는데.
시종장이 마지막으로 목청을 높였다.
“제5차 제국 회의를 개시하겠습니다!”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제국 회의 1일 차 일정이 모두 끝났다. 복잡한 외교 회의와 담화를 몇 시간이나 지속한 뒤, 각 종족의 수장들은 겨우 업무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저녁노을이 비치는 황궁 가이라크의 한 거실.
정갈한 응접실에 각 종족의 수장들과 카를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에 풀썩 엎어지며 시리스가 구시렁댔다.
“아우, 힘들다아…….”
옆에서 타시드도 뻐드렁니를 득득 갈며 비슷한 소릴 해 대고 있다.
“머리 아파, 머리 아파.”
반면 아틸카나 마켈린은 태연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기 전에도 어차피 비슷한 업무를 해 온 것이다. 역시 경험은 중요하다.
마켈린이 웃으며 두 사람을 타박했다.
“힘들어도 참으시게. 무릇 수장의 자리에 오른 이라면 응당 해내야 할 의무가 아닌가?”
카를 재상도 한마디 첨언한다.
“다른 이들의 위에 선 자가 자기 편의대로 막 살 순 없지요.”
“그 말, 설득력 없다는 거 카를 재상도 알죠?”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세상 모든 왕국과 제국이 다 저 소릴 해도 안타레스는 그럴 수 없다. 당장 그들이 섬기는 위대한 황제 폐하부터가 이미 자기 편의대로 막 살고 있지 않은가?
카를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여러분이 자기 손으로 신을 죽이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면 막 살아도 됩니다.”
“쳇, 그렇게 나오다니.”
“……그래요,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게 살아야지.”
참 할 말 없게 만드네. 타시드와 시리스가 다시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작은 드워프 여인이 티 세트를 들고 나타났다.
“여러분, 차 드세요.”
여인이 티 세트를 테이블 위에 세팅한다. 그녀를 본 시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틸라 언니, 오랜만이에요!”
“꺄, 시리스, 오랜만!”
손을 잡고 두 사람이 소녀처럼 폴짝폴짝 뛴다. 찻잔을 들며 아틸카가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 재상 부인께서 어찌 직접 이런 일을…….”
6년 전, 결국 카를은 틸라의 아버지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두 사람은 금슬 좋게 행복한 부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종족이 다르다 보니 자식이 없다는 것인데…….
“그거 폐하께서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하셨어요. 연구 성과가 곧 나올 거 같다고.”
희망찬 틸라의 말에 시리스도 환하게 웃었다.
“헤에, 저도 이모가 되는 거네요?”
히죽거리는 두 여인을 보다 말고 문득 아틸카와 마켈린이 의아해했다.
“그런데 올해는 어째 황후께서 안 보이시더구려?”
“듣고 보니 그렇구려, 이니야 씨는 이런 행사 빼먹을 성격이 아닌데.”
전쟁이 끝나고 1년 뒤, 레펜하르트와 이니야는 실란의 주도하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안타레스가 제국이 되자 이니야도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고, 요 근래 계속 레펜하르트의 황제 대행을 맡고 있었다. 작년에 이들이 만났던 황제 대리도 그녀였다.
그런데 어째 올해는 통 보이질 않는 것이다.
틸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황후께선 독수공방 너무 길다고 폐하 쫓아가셨어요.”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거기 가 있겠네요?”
“그러게, 거기.”
타시드가 그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러스 녀석도 올해는 거기 가 본다고 하던데…….”
☆ ☆ ☆
바실리 왕국 남부, 라키드 산맥의 깊은 험지.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평범한 여행복 차림의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 대륙 최강자 중 하나로 명성이 높은 검제劍帝 사이러스 폰 테네스였다.
산길 주위를 둘러보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음, 경치 좋네. 그런데 대체 어디야?”
사투의 날 이후 러스는 안타레스를 떠나 가문으로 돌아갔다. 유서스의 죽음으로 인해 후계자가 그밖에 남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라난 그라드 최후의 날, 유서스는 안타레스 황궁 감옥에 갇혀 있었다. 똑같이 붙잡혀 있던 현자 브렉티스는 오러 유저라 그 참상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유서스는 마갑이 없으면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결국 세이어의 아토믹 버스트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후 안타레스 제국은 공식적으로 황금기사 유서스의 사망을 발표했다. 그가 쓰던 마갑 엘드라드며 엘드릴 기간투스를 제국 재상 카를이 대놓고 사용 중이었으니 모른 척 입 닫고 있을 순 없었다. 후계자를 잃은 테네스 가문은 몇 번이나 러스를 불렀고, 아무리 가문에 미련 없는 그라도 부모의 부름마저 거부할 순 없었다.
러스가 돌아오자 테네스 가문도 재건에 들어갔다. 폴트 테네스 가주가 복권되었고 러스도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굳이 안타레스에 마갑 엘드라드의 반환을 요구하진 않았다. 일단 명분도 없었고, 게다가 돌아온 러스야말로 세계 최강의 오러 유저 중 한 명이 아닌가? 이미 오러의 길을 다시 찾았는데 굳이 황금갑옷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돌아온 러스는 스스로의 경험을 정립해 테네스 가문에 새로운 검술을 남겼다.
전생 땐 워낙 홀로 잘난 검성이신지라 평범한 이들을 위한 검술 따위 만들지 못한 사이러스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여기저기 치이고 죽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며 힘을 얻은, 약자의 기분을 매우 잘 이해하는 사이러스가 되었다. 깔끔하게 가문의 검술을 만들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가문이 안정을 되찾자 러스는 다시 떠났다. 자신의 기량을 높이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대륙 각지의 강자들과 만나 대련을 펼쳤다.
검성 바나텔도, 중압의 기사 키린트도 사라진 현 대륙에서 그는 틀림없이 다른 오러 유저를 압도하는 최강자 중 하나였다. 세인들은 그에게 검제라는 칭호를 붙여 경의를 표했다.
검성이 아니라 굳이 검제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검성의 지위는 다른 여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 저긴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러스가 산기슭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능선 가운데 공터가 보였다. 화려하진 않아도 튼튼하고 정갈한 2층 집 세 채와 커다란 연무장이 설치된 곳이었다. 저택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곳이 인적 드문 깊은 산속이란 걸 감안하면 도대체 어떻게 저런 걸 지었는지 의문스러운 광경이었다.
어쨌건, 목적지가 반대편에 보인다는 의미는…….
“……이 산이 아닌가벼?”
혀를 차며 러스가 발을 굴렸다.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라 숲 위로 날아간다. 나무 꼭대기를 사뿐사뿐 밟으며 러스는 순식간에 반대편 산에 도착했다. 족히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리를 몇 걸음 만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으차!”
재차 하강해 러스가 공터에 안착했다. 그곳엔 한 여인이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녀가 러스를 보더니 눈을 떴다.
“어머나?”
뾰족한 귀에 보랏빛 머리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엘프 여인이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나무 비녀를 꽂고 원피스에 앞치마만을 걸친, 상당히 수수한 차림임에도 그 미모는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여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러스 경?”
러스도 미녀를 향해 정중히 목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