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64
문득 러스의 눈에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보다 훨씬 앞을 걷고 있는 강력한 무인, 난생 처음 만난 진정한 오러 능력자, 그에게 진실된 오러의 길을 알려 준 남자.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를 구해 준 자…….’
러스는 결심했다.
☆ ☆ ☆
사실 레펜하르트의 질문은 그냥 이야기 흐름상 던져 본 말이었다. 딱히 러스의 차후 계획이 궁금해서라거나 해 물어본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러스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더니 넙죽 고개를 조아린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응?”
당황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러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 기사된 도리로 응당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하나 저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자, 이 한 몸 바치는 것 외에는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이거 생색을 너무 과하게 냈나? 레펜하르트가 난처해하며 러스를 내려다볼 때였다. 러스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빛냈다.
“그리고 제가 오러에 눈 뜨게 된 것은 모두 당신 덕분. 내 생애 최초로 보는 강자, 그의 뒤를 따르며 더더욱 내 기량을 갈고닦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도 갚고, 따라다니면서 무술 기량도 훔치고 싶다는 소리다. 레펜하르트는 멍한 눈으로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레펜하르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확고함이 깃들어 있어,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면서…….”
“권왕 제라드의 후계자란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날? 전공도 다르잖아?”
칼 쓰는 놈이 주먹 쓰는 놈 따라다니면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레펜하르트의 의문은 타당했다. 하지만 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라 오러 능력, 그 자체니까요.”
실제로 검사인 러스는 권사인 레펜하르트를 보며 오러를 각성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납득은 가는 이야기다.
“그, 그래도 너도 오러 능력자잖아? 그럼 혼자서 잘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운 좋게 오러를 일깨웠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으음…….”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러스의 상황은 이해가 갔다. 오러에 각성했다고 전부가 아니다. 각성한 오러를 갈고닦으려면 그에 걸맞은 용법을 익히는 것이 필수다. 레펜하르트 같은 경우도 오러를 각성하고도 2년 넘게 제라드 밑에서 수행을 하지 않았던가?
원래대로라면 러스는 이대로 가문에 돌아간 뒤, 그라임 왕국의 오러 유저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어 기량을 높이게 된다. 온갖 가르침을 받고, 온갖 실전을 겪고, 그렇게 마흔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검성이란 칭호를 얻으며 대륙의 모든 검사들 중 우뚝 서는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배신자가 되어 죄인 취급을 받게 된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타국의 오러 유저를 만나 가르침을 받거나 홀로 세상을 떠돌며 기량을 높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 타국의 오러 유저란 게 나잖아?’
오러 유저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니, 생각해 보니 지금 러스의 입장에서 저렇게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레펜하르트야 마법사 출신이라 어색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강자를 만나 잠시 몸을 의탁하며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일은 무인들 세계에서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다.
러스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언젠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 그러니 주군으로 모시진 못합니다. 그러나 제 검이 자리를 잡는 그날까지는 당신의 명에 따르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받아 주시길!”
강한 의지를 담아 외치는 러스를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사이러스가…… 그 검성 사이러스가 나를 따른다?’
전생의 적, 타시드의 원수.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지닌 사이러스에 대한 감상이었다. 구하기는 했어도 그는 러스를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미래의 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라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모든 시간은 리셋되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적이 아군이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것도 미래에 검성이 될 것이 확실한 천재적인 재능의 검사가 말이지?’
생각해 보니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이대로 다른 놈들도 꼬셔 버릴까?’
그저 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전생의 적들도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잠깐 혹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무리였다. 일단 용사 알렉스와 성녀 엘린은 나이상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태어났어도 갓난아기다. 그럼 남는 건 테스론이랑 사이러스, 빛의 마도사 제이드뿐인데, 지금 그의 육체가 권왕 테스론의 것이니 얘는 이미 제외.
‘제이드, 그놈은 너무 음흉해서 줘도 가지기 싫고.’
타시드까진 그렇다 치고 시리스를 죽인 놈이랑 한 편이 되긴 싫다! 논리라고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감정이란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제이드는 빛의 마도사라고 불리긴 했지만 상당히 음흉한 놈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칭호와 달리 뒷구멍으로는 온갖 더러운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잠시 딴생각을 하자 러스가 불안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검을 완성하는 그날까지만 충성하겠다는 것이 기분 나빴던 걸까?’
생각해 보면 저 말, 빼먹을 거 다 빼먹으면 바로 등 돌리겠다는 소리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테네스 가문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주군으로 모실 수는 없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게 러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데, 레펜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뭐, 충성이랄 것까진 없고 그냥 동료로서 함께 다니는 것이라면 나도 좋은데.”
러스가 화색이 되어 일어났다. 이걸로 그는 받아들여졌다. 저 강력한 오러 능력자에게! 앞으로 그를 따르며 그의 모든 것을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당당히 한 사람의 오러 유저, 진정한 초인이 되어 가문으로 돌아가리라!
레펜하르트의 손을 마주잡으며 러스가 감격해 물었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순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지금 몇 살인데?”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당당히 대답하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왜 저러나 러스가 의아해하는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딴청을 피우더니 작게 뇌까렸다.
“……나, 아직 스물셋인데.”
“에에엑!”
러스는 경악해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 덩치, 저 얼굴로 고작 스물셋이라고? 하지만 잘 보니 정말 얼굴이 앳되다. 워낙 몸이 좋아 미처 못 느꼈는데 얼굴을 보니 확실히 20대의 청년이었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얼굴만 보았다면 오해하지 않을 정도다.
‘왜 이제까지 몰랐지?’
레펜하르트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턱을 매만진다.
“내가 그렇게 노안인가?”
“그보단 분위기가……. 묘하게 나이 든 사람처럼 느껴져서…….”
더듬거리는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하긴, 머릿속이 50대이니 그렇게 느껴질 만도 하겠다. 이 시간대로 회귀하며 많이 젊은이처럼 사고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러스가 난처해하더니 물었다.
“그럼 레펜하르트 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
비록 러스가 충성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레펜하르트의 종이 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가문으로 돌아갈 입장에, 그런 식의 칭호는 역시 부담스럽다.
“그럼 스승님? 사부님?”
“그건 더 이상하다, 야.”
둘 다 당혹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처 레펜하르트는 생각 못 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전생에서 사이러스가 대륙에서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진 이유였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은 대대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면 오러를 각성한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테스론이나 제라드가 최연소 오러 능력자로 알려져야 하리라.
하지만 신장 2미터가 넘는 그들을 아무도 제 나이 때로 봐 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짐 언브레이커블의 역대 계승자들도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자고로 남자들 세계에서 나이 어리면 깔보는 것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러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앞서 길을 걷는 선배 무인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기야, 액면가로 보나 정신연령으로 보나 어색하지 않기는 하지. 머리를 사정없이 벅벅 긁다가 레펜하르트도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편할 대로 해, 그러면.”
“네, 형님.”
그렇게 러스가 함께 하기로 결정되자, 다른 이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아, 저는 실란. 필라넨스를 섬기는 성직자예요.”
“잘 부탁한다, 실란.”
“시리스입니다.”
“틸라입니다.”
“음, 둘 다 형님의 노예인가 보군.”
“둘 다 내 동료다. 노예 따위가 아니야!”
“……네?”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 당장 설명해 줄 일도 아니고 해서 레펜하르트는 일단 넘어갔다.
마차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마차를 타라고 실란이 권했지만, 러스는 몸을 회복시키려면 좀 움직여 주는 게 좋다며 레펜하르트 곁으로 가 걷기 시작했다. 대신 시리스와 틸라를 마차에 태운 뒤 그들은 다시 가도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던 중,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아, 러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너네, 대체 엘류시온 유적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냐?”
“글쎄요? 저는 말단 기사였는지라 그런 건 잘…….”
☆ ☆ ☆
그라임 왕국 수도, 템페라드.
인구 십만에 달하는 대륙 서부 최대의 도시인 이곳은 지금 한 가지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명성 높은 황금기사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은의 시대 유적, 엘류시온을 탐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이 쟁취한 고대의 유물들은 그 가치를 금은으로 바꾸면 마차 열 대를 가득 메울 정도라고 했다.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테네스 백작가를 귀족들은 모두 시기했고, 평민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술집이며 거리마다 그들이 겪은 모험담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읊어지고 골목마다 아이들이 검에 노란 칠을 한 채 ‘황금기사의 검을 받아라!’라며 칼싸움을 하고 놀곤 했다.
물론 켈베른 성에서 있었던 일, 유서스의 패배와 러스가 그를 암습한 일 등은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뭐, 비밀로 해 봤자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정보지만 일반 시민들은 알 수 없는 것, 그들은 그저 열심히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찬양하고 또 찬양할 뿐이다.
덕분에 가문 내 유서스의 평가는 여전했다. 레펜하르트에게 패했다 해서 그것이 누가 되지도 않았다. 엄청난 수입을 거두어 가문의 재력이 한층 두터워졌으니 가문의 원로들도 모두 흡족해했다. 상대가 무려 권왕 제라드의 제자인 만큼 그의 패배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검 쥔 자로서 어찌 승리만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번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 더욱 정진하시라며 흘러 넘겼을 뿐이다.
러스의 사건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테네스 가문이 오러 유저를 배출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선 다들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유서스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들 그런 승냥이 같은 놈에게 그런 재능을 내린 신을 원망하며 유서스를 위로했다. 그저 가주인 테네스 백작, 폴트만이 러스의 이야기를 듣고 한탄하다 등을 돌렸을 뿐이었다.
모든 면에서 유서스는 현재 왕도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왕도의 영웅’은 지금, 자신의 침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실망이군요.”
나직한, 하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찌른다. 유서스는 더욱 죄송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의 눈에 반투명한 두 발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은의 현자시여. 제가 미욱한 탓에 명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유서스 앞에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의 환영이 허공에 투영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달 전, 유서스에게 엘류시온의 정보를 알려 주었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니 저만을 벌하시고 부디 가문에는…….”
유서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그가 부복해 있는 곳은 바로 자신의 침실이었다. 연무장보다도 오히려 더 엄중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곳에조차 마음대로 환영을 보낼 수 있다니, 은의 현자가 지닌 권능에 대한 감탄과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공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저 마법이 걸린 수정구를 통해 서로의 모습과 음성을 확인하는 것이 현재 마법학이 지닌 한계, 그조차도 쌍방에 궁정 마도사급의 강력한 마도사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강력한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름 유적 탐사에 잔뼈가 굵은 유서스조차도 접하지 못했던 고도의 아티팩트를.
사소한 환영 하나만으로도 은의 현자란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느껴진다. 유서스는 더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청년의 환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닙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무리한 임무를 내렸던가요?”
“죄송합니다…….”
“아니면 그라임의 황금기사가 고작 이 정도 인물이었을 뿐인 겁니까?”
연이은 비아냥에 유서스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진다. 아무리 은의 현자라지만 자신 역시 이름 높은 기사다. 이렇게까지 오만하게 굴 입장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감히 화를 낼 수는 없다. 상대는 테네스 백작가쯤은 간단히 짓밟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
“이대로라면 테네스 가문의 앞날도 순탄치는 못하겠군요.”
“제, 제발 용서를!”
청년의 환영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거만한 태도를 한껏 과시한 뒤, 환영이 사라졌다. 유서스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독한 불안감이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가 이를 갈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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